열어서는 안되는 상자가 있다. 하지만 개봉을 금하는 억압은 늘 인간의 탐욕 때문에 열릴 운명을 전제하고 있기 마련이다. 결국, 미지의 영역에 접근한 프랭크가 이 운명의 굴레에 발을 들이밀었다. 금단의 열매 앞에 선 이브마냥 들떠있던 프랭크는 악마의 상자 때문에 처참한 모습으로 지옥에 끌려간다.

한편, 프랭크의 선량한 형 래리는 아내인 줄리아, 그리고 딸 크리스티와 함께 살고 있다. 어느날, 과거의 연인이던 프랭크를 추억하고 있는 줄리아 앞에 죽은 줄로만 안 프랭크가 나타난다. 그날부터 줄리아는 남자들을 유혹하여 집으로 끌어드린 후 이들을 프랭크의 부활을 위해 제물로 바친다.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크리스티는 프랭크와 줄리아의 계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결국 금지된 악마의 상자에 손을 댄다. 그리고, 지옥의 수도사들이 찾아온다.

 <헬레이저> 의 포스터
ⓒ 클라이브바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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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3대 공포 문학의 대가를 칭할 때, 러브 크래프트와 스티븐 킹, 그리고 클라이브 바커를 거론하기 마련이다. 스티븐 킹 원작에 스탠리 큐브릭이 감독한 <샤이닝>과 더불어, 호러 장르를 문학 차원으로 확장했다는 평을 듣는 <헬레이저>(Hellraiser 87') 는 원작자 클라이브 바커가 직접 연출까지 맡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제시한 세계관과 독특한 등장인물들은 훗날 서로 다른 장르와 매체에서 수 많은 형태로 인용하고, 작가들에게 새로운 상상력의 단초를 제공해왔다.

일찍부터 영화라는 매체의 가능성에 매료되어 있던 클라이브 바커는 두번에 걸친 시나리오 작업에서 극심한 좌절감을 맛본 후, 직접 자신의 영화를 연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원작자가 만든 영화는 문자와 문자 사이에서 부유하는 문학적 자의식을 스크린에 그대로 반영하느라 내실있는 줄거리를 구축하는데 번번이 실패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집필 초기부터 이 대목이 화면에 어떻게 비칠지 고민하며 썼다는 소설 <헬 바운드 더 하트> 를 직접 영화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바커는 장르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등장하는 괴물의 완성도에 최대한 주력하기로 결심한다. 헤모글로빈 다량과 고문으로 얼룩진 장면이 화면에 함께 실렸다.

그렇게 완성한 <헬레이저>는 사도마조히즘적 미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면서 '고딕 호러' 류의 하위 장르를 탄생시키는데 일조한다. 슬래셔가 지배하던 80년대 극장가에서 철학적인 공포물 <헬레이저>의 등장은 호러무비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기에 충분했으며, 연출력의 '상대적인' 빈곤은 흥미로운 등장인물 구축과 창조적인 고어효과만으로도 충분히 상쇄되었다.

그런데 <헬레이저>는 셀 수 없이 많은 관객과 평론가들에게 소개됐는데도 단순히 '피범벅 효과'에 대한 편향된 선호도만이 부각된 채 작품에 대한 해석과 담론 형성의 여지가 완전히 거세되어 버렸다.

여기에는 영화 속 세계관과 등장인물들의 역할에 대한 오독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특히 수도사들과 인간들의 관계를 종종 이분법적 대결 구도로 오해하면서 영화의 의도 자체가 위협받는 상태로 악화한 것이다.

 <헬레이저> 는 사도마조히즘적 미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면서 '고딕 호러' 류의 하위 장르를 탄생시키는데 일조한다. 슬래셔가 지배하고 있던 80년대의 극장가에서 철학적인 공포물 <헬레이저>의 등장은 호러무비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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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몇 가지 가닥만을 놓치지 않는다면 <헬레이저>는 무척 유쾌하고 친절한 작품이 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특이한 요소는 바커의 의도대로 '수도사'들의 존재감일 것이다.

<헬레이저> 시리즈의 간판 스타격인 '수도사'들은 힌두교 고행자들과 동양에서 말하는 '저승사자'의 이미지 그리고 마리오 바바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모티브들이 한데 뒤섞여 창조된 특별한 등장인물이다.

육체적 고통을 연상시키는 수도사들의 외모는 20여년이 지난 시각으로 보더라도 상당히 충격적이다. 시리즈 내내 더그 브래들리가 연기한 '핀헤드'(그는 얼굴 전체에 가득히 쫄때못을 박고 있다)와 그를 위시한 수도사들은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는 의상과 무기들로 치장한 채 등장한다.

영화의 맥락에서 볼 때 그들의 외모를 훔쳐보는 관람행위가 곧 사디즘적인 쾌락의 연장선으로 치부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수도사들의 면면이 단순히 쇼크효과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바커가 '시너바이트'(cenobite/수도사)라고 표현하는 이들은, 자신의 육체를 끊임없는 고통 속에 의도적으로 밀어 넣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육신을 자진하여 훼손하는 이유가 바로 그 고통을 찬미하기 위해서다.

이는 '고통, 오 달콤한 고통' 이라는 저 유명한 핀헤드의 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신을 경배하기 위해 쾌락을 멀리하는 고행자들처럼, 수도사들은 고통을 경험하며 지옥과 순수한 악을 찬양하고 나선다.

단순히 수도사들의 외모만 보고 착각하기 쉽지만, 그들은 정확히 말해 <헬레이저>에 나오는 부정적인 등장인물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 작품의 독특한 세계관과 도덕관이 드러난다.

지옥의 수도사들이 퍼즐 상자의 메커니즘으로 지상으로 소환될 때, 그들을 불러내는 의지는 늘 고통을 향한 인간의 탐욕이다. 인간이 악행으로 쾌락의 절정에 이를 때 결국 영원하고도 순수한 고통을 갈망하게 된다는 운명적인 역설이야말로 이 작품의 묘미인 것이다,

악행의 정점에서 영원한 고통의 쾌락을 추구하였으나, 실제 그러한 지옥의 고통 앞에서는 철저하게 무너지고 괴로워하는 악한 인간들의 모습이 제법 묵직한 울림을 전달한다. 그것은 이 작품의 궁극적인 방향이 사도마조히즘적 쾌락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음행위가 아닌, 권선징악의 교훈에 닿아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렇게 원론적인 수준의 도덕관을 호러 장르의 외피를 빌어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구축하는 광경은 <헬레이저>에 특별한 장르사적 의미를 부여한다.

 악행의 정점에서 영원한 고통의 쾌락을 추구하였으나, 실제 그러한 지옥의 고통 앞에서는 철저하게 무너지고 괴로워하는 악한 인간들의 모습에서, 이 작품의 궁극적인 방향이 사도마조히즘적 쾌락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음행위가 아닌, 권선징악의 교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클라이브바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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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브 바커는 수많은 저작활동과는 대조적으로 여태까지 <헬레이저>를 포함해 영화는 단 세 편만 연출했다. 하지만 후기작 <심야의 공포>(Nightbreed 90')와 <일루젼>(Lord of Illusion 95')은 <헬레이저>가 피해간 작가들의 딜레마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아쉬운 평작으로 남고 말았다.

특히 <헬레이저>에 비해 지나치게 약화된 고어효과나 신선함이 결여된 등장인물들은 훌륭한 시나리오와 좋은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바커라는 이름이 주는 매력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다.

하지만 고딕 문학의 수혜를 받은 등장인물들과 인간의 원초적인 죄의식을 다루는 특유의 갈등 구도는, 바커가 직접 기획하고 원작을 제공한 <캔디맨>에서 다시 한번 그 진가를 발휘한다.

클라이브 바커가 그려낸 <헬레이저>의 독창적인 세계관과 등장인물들은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급격하게 퇴행해 4편부터는 비디오용 영화로 전락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헬레이저> 시리즈가 팬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인간들의 탐욕과 죄악에 대한 문학적 성찰과 더불어 '핀헤드' 라는 더 없이 훌륭한 등장 괴물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70,80년대 호러영화 감독들이 리메이크와 차기작으로 돌아오고 있는 요즘, 클라이브 바커의 복귀를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비디오 출시 : <악령의 상자> (1989/08),<헬레이저> (20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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