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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83년 '녹화사업' 기간 중 군대에서 의문사한 6명의 대학생들. 왼쪽 상단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두황(고려대), 이윤성(성균관대), 최온순(동국대), 한희철(서울대), 정성희(연세대), 한영현(한양대).
ⓒ 유가협
당시 공안기관은 학생운동이나 재야운동, 노동운동 등에 광범위하게 프락치를 침투시켰다. 이 프락치는 공안기관 차원에서 침투시킨 경우도 있고, 공안기관원이 개인적으로 관리한 사례도 있다.

공안기관(원)들이 저항운동 내부에 프락치를 침투시킨 이유는 우선 그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데 있다. 프락치가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저항운동 내의 동향을 파악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프락치가 속한 조직을 일망타진하려는 것이다. 공안기관원들은 이 같은 목적에 자신들의 승진이나 해외연수의 기회 포착, 인사고과에서 좋은 평점을 얻으려는 의도 등 지극히 개인적인 요인까지 추가하게 된다.

프락치가 무서운 이유

공안기관이 프락치를 침투시키는 이유는 1차적으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지만, 프락치는 많은 경우 공안기관에 다른 방식으로 보다 중요하게 복무한다. 그것은 바로 프락치 침투에 대한 두려움이 초래하는 상호불신, 그리고 프락치를 적발하는 과정에서 운동진영이 종종 자살에 가까운 실수를 범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전반 간도의 민족해방운동 진영을 강타한 민생단(民生團) 사건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프락치가 조직 내부에 침투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운동진영 내에 심각한 불안과 공포를 낳게 되고, 서로 프락치가 아닌가 의심하는 속에서 상호불신이 극에 달하여 서로를 고발하고 급기야 수백 명을 일제의 프락치로 몰아 죽이기까지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간도의 유격대가 입은 피해는 일제와의 싸움에서 입은 피해보다 더 컸다. 이 사건으로 간도에 근거를 두었던 유격대의 근거지는 철저히 파괴되고 유격대는 간도를 떠나야 했다.

프락치의 침투로 인해 저항운동이 타격을 입은 가까운 사례로는 학생들이 프락치 혐의자를 적발하여 침투선을 확인한다고 취조하다가 폭력을 행사하여 취조받던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거나 중상을 입힌 사건들이다.

대표적인 예로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9년 연세대에서 발생한 설모씨 치사사건이나 1997년 한양대에서 발생한 이모씨 치사사건은 학생운동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발생한 한총련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직후 발생하여, 정권과 수구언론이 학생운동을 공격하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한 197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대학가에는 우리 주변에 프락치가 침투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동급생 내에서도 혹시 누구누구가 프락치 아니냐는 소문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다시 소문이 돌곤했다. 이와 같은 프락치 침투에 대한 두려움은 공안기관이 공세적으로 프락치를 활용한 1980년대에 들어서 더욱 증폭되었다.

프락치공안기관원들은 망원(網員)이라 불렀다. 이들은 유급과 무급으로 나눌 수 있는데, 유급망원의 경우는 기관에서 예산이 지급되는 식으로 제도화된 경우도 있고, 망원과 관계를 맺은 기관원이 개인적으로 활동비를 지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무급망원은 대개 연행되었다가 훈방되는 사람들 중에서 업무에 협조할 것을 사후관리 차원에서 강요하여 관계를 맺게 된다. 이런 망원의 운용은 꼭 정치적인 공안사건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 형사사건에서도 경찰은 유흥가나 조직폭력배 등을 상대로 광범위하게 망원을 운용하고 있다.

녹화사업과 강제징집은 정부의 여러 부서가 간여한 종합적인 범죄행위

공안기관의 프락치공작과 관련된 의문사로는 정성희·이윤성·한희철·한영현(이상 의문사 인정), 김두황·최온순(이상 진상규명 불능) 등 이른바 '녹화사업' 관련사건과 1982년 실종된 서울대생 노진수, 1986년 변사체로 발견된 서울대생 김성수, 1992년 사망한 전남대생 문승필, 1997년 사망한 광주대생 김준배 사건 등이 있다. 먼저 녹화사업을 살펴보자.

녹화사업이란 전두환의 집권 초기에 강제징집된 학생운동 출신 대학생들을 '특별정훈교육'으로 순화한다는 명목으로 보안사가 추진한 계획이다. 이 사업에 따라 강제징집된 사병들에 대한 강압적인 사상개조와 학생운동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불법연행과 수사가 자행됐고, 엄청난 육체적·정신적 가혹행위가 가해졌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보안사가 녹화사업 대상자들에 대해 관제 프락치공작을 강요했다는 점이다. 즉 이들에게 휴가를 줘서 내보내 과거에 함께 활동한 동료·선후배들의 행적과 동향을 파악해 보고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너 하나쯤 죽어도 안전사고로 보고하면 그만이다"라는 협박 속에서 엄청난 고문을 당하며 녹화사업 대상이 된 사병들의 인간성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1980년대 초반의 녹화사업은 군이 국방의 의무를 처벌의 수단으로 악용하고, 나아가 프락치공작을 강요하였다는 점에서 씻을 수 없는 범죄행위다. 역사사회학의 세계적인 대가인 찰스 틸리는 국가의 성립 자체를 조직범죄로 보고 국가의 행동양식을 조직범죄와 견주기도 했지만, 녹화사업은 그런 국가폭력이나 국가범죄 가운데서 가장 비열하고 치사한 것이었다.

녹화사업과 강제징집은 단순히 보안사만이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내무부, 문교부, 병무청, 국방부, 육·해군본부, 검찰 등 정부의 여러 부서가 간여한 종합적인 범죄행위였다.

보안사는 1982년 9월 대공처에 중령 서의남을 책임자로 하는 5과(심사과)를 신설하고, 그들의 용어로 '문제발생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적극적 예방대책'을 세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과정에 전두환이 깊이 개입했다는 점이다.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 최경조의 증언에 따르면, 보안사 간부들과의 청와대 만찬에서 운동권 출신 입대자들이 불온낙서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전두환이 "야, 최경조, 너 임마 뭐하는 거야"라고 질책하여 특별정훈교육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보안사의 특성상, 그리고 보안사령관 출신인 전두환과 보안사의 특수한 관계를 놓고 볼 때 당시 전두환의 이런 발언은 '명백한 지시'였다.

1988년 12월 5공청문회에서 당시 보안사령관 박준병은 프락치공작을 일부 시인했다. 그런데 그는 정보수집과 관련하여 일부 관계자들이 사병들에게 '부탁'한 사례가 있었을 것이라고 발뺌했다.

친구를 팔라는 프락치공작은 국방의 의무를 지는 사병들을 공작정치의 도구로, 아니 자신의 출세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던 보안사 요원들의 비열한 인간성 파괴행위였다. 일부는 친구들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다 아는 정보를 물어다주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그 좋은 휴가기간에 아무도 만나지 않고, 전화도 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다가 귀대하기도 했고, 일부는 어쩔 수 없이 몇가지 사실이나 이름을 대주고는 평생을 괴로워해야 했다.

녹화사업은 단순한 정훈교육이 아니었다

▲ 지난 6월 10일 의문사진상규명위 소속 조사관들이 기무사의 현지조사 비협조에 항의하며 오후 6시10분경부터 기무사 앞에서 연좌농성에 벌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녹화사업은 단순한 정훈교육이 아니었다. 몇몇 비전향 장기수들은 과거 박정희 시대의 강제 전향공작에서도 단순히 전향서에 도장을 찍는다고 전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다고 증언한다. 동지를 팔아야만, 그래서 다시는 과거의 동지들과 만날 수 없게 되어야만 전향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전두환의 보안사는 '순화'의 기준을 단지 교육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렇게 반인륜적인 수준에서 강요했다. 그리고 일부 보안사 요원들은 학생들을 이용하여 출세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프락치공작을 강요했다. 당시 보안사는 공작예산의 절반가량을 이 사업에 쏟아부을 정도로 녹화사업을 강력히 밀고 나갔다.

흉흉한 소문으로 떠돌던 프락치공작과 학우들의 사망소식에 관한 '학원괴담'은 1984년 3월에 제적생과 해직 근로자를 위한 기도회에서 처음으로 종합적으로 제기되었으며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여론이 거세지자 정부는 1984년 9월에 '소요 관련 대학생 조기입영제'를 폐지했고, 이어 녹화사업의 전담부서인 보안사 3처5과도 폐쇄했다.

그러나 녹화사업이 전면 중단되지는 않았다. 1990년의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에서 보듯이 학생운동 관련자들을 이용한 프락치공작과 민간인들에 대한 사찰은 계속되었다. 전 국민이 입대예정자·군복무자·전역자이거나 심지어 그 가족까지도 이 땅 위에서 보안사의 촉수를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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