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5.16 쿠데타 당시 시청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소장. 오른쪽에 소령 이낙선과 대위 차지철, 왼쪽에 소령 박종규가 보인다.

혁명, 혁명이 일어났다. 청년학생들이 흘린 피로 늙은 독재자는 물러났다. 1960년 4월, 전쟁이 끝난지 채 7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죽은 이들의 이름도 불러주지 못했던 세상에도 봄이 오는 듯 싶었다.

민간인 학살의 희생자들을 되는대로 묻어버렸던 땅에 조심스럽게 봉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유족회가 만들어지고, 위령비가 세워지고,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진상규명 요구가 들려왔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4대 국회에는 양민학살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되어 몇몇 지역에서 조사가 시작되었다.

5·16 쿠데타, 한국 사회 다시 어둠 속에 갇히다

4월혁명이 일어나고 1년 조금 지나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민주당 정권이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서지 못함으로써 군사반란은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성공했다. 군사반란 자체는 피를 흘리지 않고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그 주동자인 박정희의 집권은 한국이 '죽음을 죽인 사회'를 벗어나려는,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노력을 죽여버렸다.

민간인 학살의 어두운 골짜기를 벗어나려는 노력은 좌절되고, 한국사회는 다시 의문사와 광주에서의 학살이 기다리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민간인 학살의 유족회 간부들이 투옥되었고, 실제 집행이 되지는 않았지만 사형판결을 받기도 했다.

애써 세운 위령비는 산산이 빠개져 땅 속에 묻혔고, 평토였던 집단학살지에 세운 봉분은 불도저에 밀려버렸다. 민족과 통일에 유달리 관심을 기울이던 젊은 언론인 조용수는 박정희가 만든 이른바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박정희가 집권한 시기 동안(1969년 10월 17일 3선개헌 이후) 의문사 사건으로 의문사위에 진정되어 조사된 사건은 모두 14건으로 집권기간에 비해 의문사 건수는 적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박정희 시기는 사실상 의문사로 가는 모든 조건이 준비된 시기였다.

특히 검찰을 포함한 사법기구가 완전히 권력에 장악된 사실과, 중앙정보부 등 공안기구가 비대화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 것은 박정희가 집권했던 시기가 모든 의문사의 출발점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자기를 천황 쯤 되는 초월적 지위에 놓고 싶어했던 박정희는 3권분립을 원리로 삼는 민주주의을 경멸했고, 가끔 행정부를 견제하려 드는 사법부를 극도로 불신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1962년 5월 14일 대법원장에게 보낸 '지시각서' 5호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박정희는 "혁명 이래 일부 법관이 아직도 새로운 세계관의 확립 없이 돈과 술에 팔리고 정실과 야합"하고 있으며, 중대한 국가적·사회적 법익을 침해한 불순분자는 방면하고 힘이 없어 땅을 치고 우는 약자에 대하여는 무고한 벌을 가하고도 하등의 양심적 가책도 없이 마치 법은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질책했다. 완전히 사단장이 밖에서 술 먹다가 사고치고 들어온 초임 법무관 야단치는 어조였다.

박정희에게 모든 국가기구는 통치권자가 세운 목표를 향해 일로매진해야 하는 존재였지만, 사법부는 여기에 역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도 꿈꾸지 못한 사법기구에 대한 지배를 시도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박정희의 시대에는 가인 김병로나 권승렬, 최대교 같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가끔씩 권력에 맞서 외풍을 막아줄 역할을 할 사람이 없었다.

36살의 신직수 중정차장을 검찰총장에 임명한 이유

▲ 75년 4월 8일 인혁당 사건 당시 대법원 판결에 참가한 대법원 판사들(생존자).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민복기 대법원장, 민문기, 안병수, 양병호, 한환진, 주재황, 임항준, 이일규 대법원 판사. 이중 이일규 판사만이 소수의견을 낸 가운데 사형 확정 판결 다음날 사형수 8인에 대한 처형이 이뤄져 '사법살인' 논란을 빚고 있다.
1963년 12월 7일 박정희는 36세의 중앙정보부 차장 신직수를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임용 후 15년이나 20년 정도 지나야 검찰총장이 될 수 있었으니, 그가 얼마나 벼락출세를 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의 학교나 고시 동기들은 대개 평검사였고, 심기가 불편해진 고검장들은 그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신직수가 벼락출세를 한 비결은 박정희가 5사단장 시절, 그가 사단 법무참모를 지낸 인연 때문이다. 육사출신이 주도한 군사정권과 판검사들의 야합을 육법당(陸法黨)이라 불렀는데, 아마 신직수가 법당의 초대 당수 쯤 되지 않았을까. 신직수는 무려 7년6개월을 검찰총장 자리를 차지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장수 총장이 되었는데, 그의 총장 시절 검찰은 독재권력의 충실한 시녀로 전락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1964년 8월의 제1차 인혁당 사건이다.

한일회담 반대시위인 6·3시위로 인해 계엄령이 선포된 지 얼마 후 중앙정보부는 북의 지령을 받아 국가를 변란하려는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의 각본을 다 짜서 서울지검으로 송치하였는데, 서울지검 공안부 부장 이하 검사들이 아무런 증거도 혐의도 찾을 수 없어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고 나선 것이다.

이에 법무부 장관 민복기는 "상명하복의 검찰기강을 세우기 위해 공소장에 서명을 거부한 검사에 대해서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공안부장 이용훈 등 3명의 검사가 사표를 제출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몹시 분개하였고, 중정 차장으로서 그를 모셨던 신직수가 총장으로 있던 검찰은 이용훈의 사표를 수리했다.

이 사건을 거치면서 검찰은 1970년대를 풍미한 참고서의 이름마냥 박정희 체제에 '완전정복'되었다. 신직수는 이후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사법살인으로 악명을 떨친 2차 인혁당 사건을 처리하였다.

박정희 하에서 사법부가 철저히 길들여진 계기는 역시 1971년 7월말에 시작된 사법파동이었다. 박정희는 1971년 4월의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에 가까스로 이기고 7월에 3선 임기를 시작했다. 바로 이 무렵 대법원은 사상 처음으로 위헌심판권을 행사하여 군인과 군속의 손해배상권을 제한하는 국가배상법을 위헌이라 판결하였다.

그리고 학생시위로 구속되거나 반정부 논문을 기고했다가 반공법으로 기소된 문인들이 잇달아 무죄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이에 박정희는 격노했다. 새로이 법무장관으로 승진한 신직수에게는 사법부를 길들이는 과업이 부여되었다.

박정희, 법관의 임명권마저 손에 넣다

▲ 영등포 문래근린공원에 있는 박정희의 흉상.
ⓒ 최윤수
1971년 7월 28일 서울지검 공안부는(이 때 공안부장은 1964년 인혁당 사건 때 공안부 검사로는 유일하게 사표를 쓰지 않은 최대현이었다) 무죄판결을 많이 낸 재판부중 하나인 서울형사지법 항소3부 이범렬 부장판사와 최공웅 판사 등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혐의사실은 재판부에 할당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의 증인심문을 위해 제주도에 갔을 때, 피고인의 변호사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피고인 변호사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은 것은 잘못이지만, 그당시 공식 출장비가 거의 책정되지 않는 현실에서 이는 오랜 관행이었다.

형사지법 유태흥 수석부장판사가 증거인멸과 도주우려가 없다고 영장을 기각하자 검찰은 증거를 보강하여 다시 영장을 청구했다. 보강된 증거란 두 판사가 출장가서 '객고(客苦)'를 푼 것에 관한, 좀 쑥스러운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누가 보기에도 명백하게 법관 길들이기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보수적이고 집단행동을 안하기로 소문난 판사들도 집단사표를 내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판사들은 이번 집단사표가 단순히 동료를 두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법권 독립'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무죄선고가 나면 법관이 부정한 재판을 한 듯 비난하면서 예금통장을 조사했다", "판사들을 미행·사찰하고 함정수사까지 했다"는 등 그동안의 사법권 침해 사례 7개항을 공개했다.

일선판사들의 집단행동이 이어지자, 대법원 판사들은 회의를 열고 대법원장(1차 인혁당 사건 당시 법무부 장관인 민복기가 대법원장이 되어 있었다)이 대통령을 만나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결의했다. 그러나 대법원장의 대통령 '알현'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박정희는 결국 영장을 청구한 공안부 라인을 문책성 전보인사를 하는 것으로 법관 쪽에 약간의 퇴로를 제공했고, 법관들은 얻는 것도 없이 사건 한 달 만에 스스로 사표를 철회했다.

사법파동이 일어난 1971년 여름은 유난히 큰 사건이 많았다. 파동이 한참 진행 중에 광주대단지 폭동, 남북이산가족찾기와 남북적십자회담 발표, 실미도 사건 등이 일어났고, 뒤이어 교련반대 데모로 위수령이 발동되고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사법파동은 박정희의 영구집권 음모인 10월유신을 앞두고 걸림돌이 되는 각 집단을 각개격파해 나가는 과정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유신헌법이라는 황당한 헌법 아래 법관 재임용제도가 도입되어 대통령은 법관의 임명권마저 손에 넣었다.

소수의견 낸 이회창 판사와 의문사를 막지 못한 사법부

그리고 1973년 3월 법관재임용에서는 전체 법관의 10퍼센트가 넘는 48명의 법관이 법복을 벗어야 했다. 1971년 국가배상법 위헌판결에서 위헌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 9명을 포함하여, 학생들을 무죄방면하거나 구속영장을 기각한 판사들도 대개 재임용에서 탈락되었다.

살아남은 판사들은 길들여져 갔다. 이제 사법부(司法府)는 행정부의 한 부서인 사법부(司法部)라 불리더니, 급기야는 사법부(死法部)라 조롱받게 되었다.

10·26 사건의 주범 김재규에게 신군부가 원한 내란목적살인죄 대신 단순살인이라는 소수의견을 제시한 대법원판사 6명은 모두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재임용에서 탈락됐다. 전두환 정권 출범 직후 대법원장에서 물러난 이영섭은 신군부의 외압에 마음고생을 하다 입이 돌아갈 정도였다. 그가 퇴임사에서 한 말, 자신의 대법원장 시절은 오욕과 회한의 역사였다는 말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었다.

형사지법 수석부장 시절 검찰의 영장청구를 기각하고, 사표를 쓴 판사들을 대표해서 성명서를 읽던 유태흥은 대법원 판사가 된 뒤에는 김재규 사형 판결에서 적극적 역할을 했고, 결국은 대법원장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유태흥은 법관인사의 난맥상을 비판하는 글을 한 법조신문에 기고한 판사를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부임 하루만에 울산지원으로 전보시켰다가 2차 사법파동을 초래하여 대법원장에 대한 사법사상 최초의 탄핵발의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렇게 처절하게 망가져간 사법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올라가는 대법원에서 그나마 소수의견을 가장 많이 낸 판사가 이회창이었다는 사실은 의문사를 막지 못한 사법부의 역설적인 현실을 가장 잘 보여준다.

관련
기사
[특별연재① 이승만 정권과 한국전쟁] '죽음을 죽인 사회' 탄생하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