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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인양된 김주열의 시체로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등 처참함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사건으로 마산 등 전국 각지에서 반 이승만 시위가 더욱 격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 4·19기념도서관

똑같이 국가권력에 의한 죽음이었다 해도 지금 우리는 박종철이나 강경대의 죽음을 의문사라 부르지는 않는다. 박종철의 죽음은 어쩌면 조작과 은폐의 휘장에 가리어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 불행한 죽음 속에서도 다행히 가해자들의 집요한 은폐기도는 좌절되고, 그의 죽음의 진상이 널리 알려지면서 6월민주화운동을 촉발시켰다.

만약 1973년 10월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에서 죽었을 때 중앙정보부가 최 교수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자체 조사로나마 밝히고, 고문살해와 은폐조작의 범죄자들을 처벌하였다면, 이 사건은 몇몇 중앙정보부 직원들의 고문치사 독직사건은 될 수 있었을지언정 살인과 은폐조작의 국가범죄로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정남 전 수석 "우리의 무관심과 무능이 의문사를 초래해"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요컨대 우리가 최종길 교수의 고문치사 사건을 막지 못했고, 또 그것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방치해온 우리 모두의 무관심과 무능이, 그 이후 이 땅에서 그렇게도 많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온 권력 기관에 의한 의문사를 초래케 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있을 수 없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지만 거기서 그칠 수 있었고, 더 심각한 범죄로 발전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는, 아니 중앙정보부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 직원의 범죄에 대한 수사권한을 가진 중앙정보부 감찰실에서 이 사건을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을 덮어버렸다.

중앙정보부는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대신, 최종길 교수가 자신의 간첩행위가 밝혀지자 남은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투신한 악질 간첩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사람을 죽여놓고 그를 간첩으로 조작하는 이 엄청난 국가범죄를 발표한 중앙정보부 차장 김치열은 얼마 후 검찰총장으로 영전했다.

중앙정보부도 최종길 교수를 고문할 때 그를 이용하여 어떤 공작을 꾸미려한 것이지 죽이려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때 국가는 기로에 서게 된다. 이런 불행한 사건이 또다시 일어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사건의 최소한의 진상을 공개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할 것인가, 아니면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고 관련자들을 보호할 것인가.

있어서는 안될 일이 일어났기에 국가로서는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큰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관련자들을 보호할 경우, 몇몇 중앙정보부 직원들의 독직사건-낮은 차원의 국가범죄-로 끝날 수 있었던 이 사건은, 이제부터는 중앙정보부만이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전체의 범죄로 비화되게 된다.

반면 관련자들을 처벌할 경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시궁창에 한 발을 딛기는 했으나 더이상 빠져들지는 않을 수 있다. 그 대신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있는 독재권력은 중앙정보부라는 막강한 기구의 절대적인 충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

박정희 정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미 발생한 불행한 사건이 더 큰 국가범죄로 변하는 것을 막는 대신,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관련자들을 보호하고,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조작했다. 그 대가로 박정희 정권은 자신이 만들어낸 중앙정보부 부원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군사정권, 재판절차 밟아 '사법살인' 정당화해

▲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선생.
ⓒ 장준하 기념사업회
모든 국가권력이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정통성이 없는 독재권력일수록 국가기구, 특히 폭력을 다루는 기구 구성원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게 된다. 만약 박정희 정권이 최종길 교수 사망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고문치사 관련자들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중앙정보부 등 공안기관의 어느 누구도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고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고문이 비록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나 중앙정보부는 법 위에 군림하는 특수기관이고, 설혹 빨갱이를 고문하다가 조금 사고가 났다하더라도 회사(중앙정보부)에서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내게 별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직원들에게 심어주지 않는 한, 불법과 탈법을 지속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

고문을 가하는 사람들이 죽일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피의자들은 고문당하다가 죽을 수 있다. 그렇기에 고문행위 자체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살인과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은 엄연히 다르다.

또 인혁당 사건을 비롯하여 독재정권이 고문에 의거하여 사건을 조작하고 형식적인 재판절차를 밟아 사형을 집행한 경우는 정치적으로 '사법살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법살인'의 경우는 독재권력이 자기 식의 절차를 밟아 합법성을 부여하면서 일반시민들에 대한 본보기 효과를 염두에 두고 그 죽임을 준비해간 것이다.

그런데 장준하 사건이나 1973년의 김대중 납치사건은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장준하 사건의 경우, 현재 진상규명불능 상태로 남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당시 재야의 지도자였던 장준하는 단순한 실족사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김대중 납치사건의 경우는 미국 비행기가 납치된 김대중이 타고 있던 선박을 계속 감시한 덕에 김대중은 수장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납치가 아니라 살인미수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이들 두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이나 재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지도자였던 장준하와 같은 정적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사건이다.

이들 두 사건은 처음부터 대상자를 죽이려는 계획 하에 일이 진행된 것으로 보이지만, 대부분의 의문사 사건이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의문사 사건이 발생하고, 의문사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왜 그렇게 빈번하게 고문이 자행되었을까.

고문은 왜 그렇게 빈번하게 일어나는가

첫째, 사법부가 제 구실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법파동과 유신을 거치면서 사법부는 완전히 독재권력에 종속되었고, 법관들은 고문에 의해 끌어낸 강제자백 외에 다른 증거가 없는 경우에도 검사의 공소장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판결문을 작성하며 유죄판결을 내렸다.

수사기관에서의 자백은 증거 능력이 없지만, 검사 앞에서의 자백은 증거 능력이 있다. 난수표도, 그 흔한 독침도 없는 조작간첩 사건이나 기타 조직사건에서 자백은 증거의 왕이었다. 조작간첩 사건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971년에 이미 한 공안검사는 재일동포 관련 사건이란 "거의 대부분이 물적 증거는 없고 또 인적 증거도 거의 없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결국 피고인의 자백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니 자백을 얻기 위한 고문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잡아다가 일단 고문을 시작하는데, 간첩이라 자백하면 당연히 간첩이 되는 것이고, 간첩이라 자백하지 않고 버티면 고문에 저항하는 훈련이 잘된 거물급 간첩이 된다. 수사기관에 간첩으로 찍히면 빠져나올 길이 없는 것이다.

만약 사법부가 고문으로 끌어낸 자백 이외에 증거가 없는 사건들에 대해 엄격하게 증거주의에 따라 무죄판결을 내렸다면, 공안기구의 고문 남용을 근절시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상당한 제동을 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군사독재 정권 하의 사법부는 그런 기능을 스스로 포기했다.

둘째, 고문을 용인하는 공안기구 자체의 분위기가 문제였다. 물론 공안기구의 상급자들도 수사관들에게 노골적으로 연행해온 피의자를 고문하라고 지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만들어내려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상급자들은 하급자들에게 "그것하나 해결 못해? 어떻게 좀 해 보란 말이야,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해결해!"하는 식으로 질책하게 된다.

상층부가 아주 적극적으로 고문 금지를 위해 노력해도 공안기관의 성격상 고문을 막아내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상급자들조차 고문을 당연시 여기고 기대하는,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고문기술자'를 초빙해서 고문을 하는 분위기 속에서 의문사의 씨앗은 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고문을 자행하는 수사관들은 저항세력의 세계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특히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막강한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였다는 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자기 머리로 생각해서 유인물을 작성했다는 점 등 저항세력의 행동에는 그들이 이해 못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상부의 지시가 있어야 움직이는 수사관들이 보기에 유인물을 만들거나 시위에 참가하는 것은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진급하는 것도 아니고 감옥갈 것이 뻔한 일이다. 그런데 학생과 노동자들이 자기 돈과 시간을 써가면서 이런 일들을 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그들은 어린 학생이나 배우지 못한 노동자들이 이런 일을 하게 만든 데에는 어떤 거대한 배후가 있어서 투쟁의 방향을 지시하고 자금을 대주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잘못된 자기 확신 때문에 어떻게든 배후를 캐내겠다는 사명감이 더하여지면서 고문은 계속되었다. 조금 거칠게 이야기하면 고문을 가하여 배후를 만들어내면 조작간첩 사건이나 조직사건의 그림표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배후나 동지들에 관한 진술을 거부하며 체포 이후 '또 하나의 투쟁'을 계속하다가 고문에 희생되면 그것이 바로 의문사였던 것이다.

군사독재의 폭력이 만들어낸 두려움이 의문사 불러

넷째, 시민들 역시 수사기관에서의 구타나 고문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 자신이 고문의 피해자였으며 민주화운동 경력을 자랑했던 실세 장관이 간첩은 고문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1971년 이른바 공화당 일부 의원들이 야당의 내무장관 해임안에 동조하여 이를 가결시킨 이른바 10·2 항명파동 때 이른바 4인체제를 구성하였던 여당의 실세의원들이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중앙정보부나 대공분실이나 보안사 같은 공안기구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정치범들은 고문을 받으면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라도 있었다. 경찰서, 파출소에서는 일반 피의자들을 상대로 구타를 포함한 가혹행위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군사독재의 폭력에 위축된 시민사회가 두려움과 그 두려움이 만들어낸 무관심 속에서 고문을 외면하고 있을 때 의문사는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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