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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느덧 김장철을 맞았고, 우리 집도 무난히 김장을 했다. 요즘은 어느 집이나 김치냉장고가 있는 덕에 대개들 김장을 일찍 하는 것 같다. 별로 춥지 않을 때 김장을 하는 것도 한 가지 생활 지혜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집은 다른 집들에 비해 김장을 좀 늦게 하는 편이다. 옛날부터 12월 초순 꽤 추워졌을 때 김장을 해 버릇한 오랜 관성이 지금도 팔순 어머니에게서 작용하는 탓이다. 어머니는 김치냉장고가 있으니 일찌감치 김장을 하는 것도 좋다는 말씀을 하면서도 막상은 그러지 못하신다.

그래도 올해는 12월 초순까지 가지 않고 11월 말일에 김장을 마쳤으니 예년에 비해서는 꽤 일찍 한 편이다.

올해도 우리 집에서는 배추 80포기 김장을 했다. 70포기를 3만원에 구입했는데, 10포기쯤이 덤으로 더 온 것 같다. 배추 80포기가 3만원이라니, 다시금 농민들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농민들에게 절로 미안해지는 심정이다.

배추 값은 3만원에 불과하지만, 여러 가지 양념거리들을 장만하는 쪽으로는 돈이 꽤 든 것 같다. 고춧가루와 마늘 따위 기본적인 것들에다가 굴, 새우젓, 액젓 값을 합하고, 또 대전과 천안으로 김치를 보내는 탁송료까지 합하면 30만원이 넘게 들었을 거라고 했다.

우리 가족은 다섯이다. 단출한 다섯 식구 중에서도 딸아이는 천안으로 유학을 가서 살고 있으니 실제론 네 식구인 셈이다. 아내와 아들녀석은 평일 점심을 학교에서 먹고, 천안 딸아이는 저녁까지 학교에서 먹는다. 아무튼 네댓 식구에 배추 80포기 김장은 사실 어마어마한 양이다. 만날 다른 반찬 없이 오직 김치 한 가지만 먹고살아도 다 먹을 수 없는 양이다.

내 어머니는 해마다 김장 욕심을 많이 내신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손쓸 데가 많은 탓인데, 올해는 손을 더 많이 쓰신 것 같다.

우선 뒷동에서 사는 가운데아들집에 김치냉장고 박스로 두 통을 주었다. 뒷동의 한 주부가 얼마 전에 다리를 다쳐 일을 하지 못하니 그 집에도 양동이로 한 통을 주었다.

우리와 같은 동에서 사는 한 집은 주부가 몇 년 전에 교통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으니 모른 척할 수가 없다. 또 한 집은 아이들 교육 문제로 가족을 외지로 보내놓고 사업 관계로 남자 혼자 살고 있는 형편이니 그 집도 외면할 수 없다.

성당 수녀원에도 한 통 드리고, 대전의 막내아들 집에도 택배를 했다. 대전의 막내아들에게는 플라스틱 양동이에다 한 통 가득 보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별도로 동치미를 한 양동이 담고, 무생채에다가 파김치까지 담아서 도합 세 개의 짐을 부쳤다.

그리고 같은 천안에서 사는 죄로 종종 내 딸아이에게 가서 보살펴주곤 하는 막내 처제에게도 고마운 뜻으로 플라스틱 양동이로 김치 한 통을 보냈다.

지난달 29일에 배추를 짜개어 절이고 양념을 만들고, 30일에 김장을 하고, 어제 대전과 천안으로 탁송을 함으로써 우리 집의 올해 김장 공사는 모두 끝이 났다.

지난해 팔순을 넘기신 내 어머니의 김장 욕심과 인심 덕에 올해도 두 아들집을 포함하여 도합 일곱 집이 우리 집 김장 맛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그렇게 일곱 집에 나누어주고도 김장김치는 우리 집 김치냉장고를 채우고도 집 앞 화단의 땅에 묻은 독 하나에도 가득 찼다.

어머니는 이렇게 여러 이웃들에 김장 인심을 쓰셨지만, 앞으로 겨울을 나는 동안 여러 이웃들에게 동치미 인심도 쓰실 것이다.

어머니는 열흘 전쯤에 '지르동치미'를 담그셨다. '지르'라는 말은 아마도 '지레'라는 말이거나 '초벌'이라는 뜻인 것도 같다. 어머니는 지르동치미라는 말을 매년 사용하신다. 그 지르동치미를 플라스틱 큰 양동이에다 담가서 옥상으로 통하는 현관 구석에다 자리잡아 놓으셨다.

그러고는 어제 또 진짜 동치미를 담그셨다. 집 앞 화단의 땅에다 묻은 큰 독이 가득 차도록 미리 절인 무를 한 이틀 넣어두었다가 어제는 사과, 배, 파, 청각, 마늘, 생강 등을 넣고 마늘과 생강 가루를 섞어 간을 맞춘 물을 부었다.

그 동치미 독은 겨우내 수시로 열리고 닫히면서 우리 집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고, 어느 눈발 날리는 날에는 이웃집들에 전달이 되기도 할 것이다.

어머니의 김장 인심과 동치미 인심은 해마다 되풀이되는 것이지만 올해는 내 눈에 좀더 각별한 모습으로 비쳤다. 그 모든 일은 올해로써 끝나게 되는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내년 가을쯤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된다. 내가 좀 무리를 해서 평수를 늘린 상태로 새 집을 장만하게 된 까닭이다. 우리가 이사 갈 집은 신축 아파트 가운데 동의 8층이다. 그런 집에 살면서도 어머니가 계속 김장 인심과 동치미 인심을 쓰실 수는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게 지레 아쉬워지는 눈치다. 올해로 어머니의 김장 인심과 동치미 인심이 끝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도 뭔가 허전해지는 심사다.

나는 어머니의 연세를 생각하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머니의 즐거움 한 가지를 너무 일찍 '차압'해 버리는 것 같아 죄송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그 아쉬움과 허전함으로 뭔가를 잘 예비해야 할 것 같다. 연로하신 어머니께서 세상을 뜨신 후 맞이하게 될 극심한 허전함을 미리부터 잘 달랠 수 있는 시간을 하느님께서 내게 마련해 주신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내년부터는 어머니의 그 김장 인심과 동치미 인심 탓에 나까지 조금은 힘들었던 시절을 아쉽게 회억하며 반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세상을 뜨시게 되면 어머니 생전의 그 모습들을 몹시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해마다 김장철이면 "옛날 그 시절이 좋았어"라는 말을 되뇌며….

세월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머니와 나와 우리 모두를 데리고 시시각각 눈에 보이지 않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향해 흐르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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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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