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zombi)'는 우리에게 더 이상 생소한 용어가 아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주술의 의미를 떠나서 이미 대중적인 호러 아이콘의 하나로 떠오른 지 오래이다.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 늑대인간 같은 고전적 괴물 캐릭터들이 떠나간 자리에 이제는 좀비들의 무리가 서성이며 인육의 섭취를 갈망하고 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포스터
ⓒ 조지 A.로메로
60년대 이전 까지만 해도 '좀비'는 다소 모호한 의미로 통용되었다. '좀비'는 부두교에서 일컬어지는 일련의 의식과 주술 그리고 약물을 통해서 스스로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조종자에 의해 지배당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의 좀비들은 60년대 이전의 초기 좀비 영화들에서 등장한 바 있다. <화이트 좀비(White Zombie)>(1932)나 <나는 좀비와 걸었다(I Walked with a Zombie)>(1943)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영화들에서 좀비들은 주인의 저주에 의해 조종되고 지배되어 살인이나 범죄를 저지르는 행동을 보인다. '좀비'들은 이렇게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 사람의 조종자에 의해 지배되고 양성되며 임무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 사상을 비판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호러 영화의 수많은 소재들 가운데서도 가장 정치적인 아이콘을 꼽으라면 역시 좀비가 선정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 속 좀비의 원형은 60년대 후반 완성되었다. 오늘 소개할 조지 A.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1968)은 '좀비'에 대한 몇 가지 일반적인 정의들을 제시한 선구자격의 작품이다. 이들은 인간의 뇌를 먹고, 사후경직 이후의 상태이므로 행동이 굼뜨다. 또한 과거처럼 누군가의 주술로 인한 변이가 아니라 현대사회의 모순점이 잉태한(주로 방사능이나 핵) 피조물들로서 존재하며, 반드시 집단적인 행동양태를 보인다. 바바라와 쟈니는 부모님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이다. 묘지에서 갑자기 나타난 괴물이 쟈니를 덮치고 바바라는 근처의 외딴집에 대피한다. 이곳에서 바바라는 벤을 만나게 되고 다른 두 쌍의 부부와 한 명의 어린 아이와 함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집 밖으로 모여드는 괴물들의 숫자는 점점 더 늘어가고, 급기야 이들은 밖으로 탈출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엄청난 저예산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훗날 많은 저예산 감독들에게 제작비를 충당하는 방법에 대한 영감을 제공하였다. 로메로는 친구들과 '이미지 텐'이라는 제작사를 설립하고 10명의 주주가 각각 600달러씩 차출하여 같은 액수를 제공할 제 삼자들을 한 명씩 끌고 오기로 약속하였다. 이들은 그렇게 마련한 자본으로 러시필름을 제작하고 배포하였으며, 또 다른 6만 달러를 추가로 충당할 수 있었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좀비들은 대부분 제작 스태프들과 그들의 친지들이며 스크린을 장식하는 수 양동이 분의 피는 식료품 가게에서 구입한 조악한 재료들로 조합된 것이었다. 극중에 등장하는 인간의 내장과 살덩이는 주간에 정육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스태프가 제공한 것이다. 어설픈 소품들은 흑백 필름으로 충분히 가려졌으며, 별도의 장비가 없어 선택한 핸드 헬드 카메라 기법은 이 영화가 마치 낯선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하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조지 A.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68, Night of the living dead) 은 '좀비'에 대한 몇가지 일반적인 정의들을 제시한 선구자격의 작품이다.
ⓒ 조지 A.로메로

9개월 동안 완전 신인들에 의해서 제작되고 연출된 저예산 공포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역사상 존재하는 호러 영화들 가운데서 단연 돋보이는 명작으로 빼놓지 않고 거론된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이 의미하는 구세대의 가치 혹은 파시즘 그리고 거기에 대응하는 인간들의 집단 광기들은 구구절절히 다양한 텍스트로 변주되고 해석되어 소개되었으며, 급기야 70년 6월 16일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작 조지 A. 로메로는 이 영화에 뒤따르는 모든 정치적 암시에 대한 혐의를 부인하며, 단지 쉽게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호러영화를 택했고 가장 사실적으로 찍는 데에만 집중하였다는 변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로메로의 몇 마디 설명으로 덮어두기 불가능할 정도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온통 정치적인 함의와 미국사회에 대한 실랄한 조소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의식은 주로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을 통해 이룩된다. 이 작품은 과거 할리우드 영화가 구축해 놓은 관습적 태도들을 하나하나씩 산산조각 내어간다. 주연배우로 흑인배우를 캐스팅한 로메로 감독은 그를 선택한 이유가 단순히 연기력 때문이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번번히 방해를 겪는 '벤'의 역할을 상기해 볼 때, 주인공의 피부색이 미국사회에서 소외받는 마이너리티를 대변하고 있다는 혐의를 벗기란 어려운 일이다.
 논리적 적절성을 잃어버린 독재자 해리나, 그에 맞서서 합리적으로 사건을 해결해보려는 벤 모두 자신의 논리에 빠져서 우왕좌왕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 조지 A.로메로

할리우드가 숭상하는 제일의 가치 '가족주의'는 이 작품에서 가장 의미심장하게 붕괴된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가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군사 독재자 같은 폭거를 일삼는 아버지(해리)는 번번히 다른 생존자들의 연대의식에 균열을 가하기 일쑤이다. 내부 결속을 위해 갈등을 조장하는 사회에 대한 상징인 이 불안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좀비로 변해버린 딸 아이(내부인)가 어머니와 아버지(통치자)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그들을 포식함으로써 극적으로 이루어진다. 결정적으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기존의 이분법적인 선악구도를 비틀고 해체한다. 논리적 적절성을 잃어버린 독재자 해리나 그에 맞서서 합리적으로 사건을 해결해보려는 벤 모두 자신의 논리에 빠져서 우왕좌왕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여기에는 감독이 바라보는 미국의 정치 구도가 펼쳐져 있다. 공화당과 민주당에 대한 명백한 비유인 두 인물의 갈등을 둘러싸고 감독은 공허한 논쟁만 있을 뿐 생산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정치세계에 비웃음을 흘린다. 또한 좀비들이 인간들에 의해서 소탕되는 말미에 이르러, 감독은 공권력에 의해서 처참하게 학살당하는 좀비들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뿌려놓는다. 이것은 과거 미국이 자행했던 정치적 마녀사냥, 혹은 소수 민족에 대한 백인 보수집단의 집단광기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영화는 주체의 전복을 통해서 인간들의 폭력성을 도드라지게 묘사하고, 이로써 '누가 좀비인가, 인간이 좀비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광기에 대한 폭로는 다분히 베트남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현실감각을 잃어가는 미국인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옳겠다.
 이러한 광기에 대한 폭로는 다분히 베트남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현실감각을 잃어가는 미국인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옳겠다.
ⓒ 조지 A.로메로

로메로 감독은 이 영화에서 좀비들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나 존재의 이유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설명도 거부하고 있다. 이것은 영화 속의 정치적인 의식를 무색하게 하려는 까닭인 동시에 관객들이 좀비라는 괴물의 특수성에 함몰되기보다는 그들의 사회와 삶을 반추해보는 데 치중해주기를 바랐던 의도에서 기인한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사람들은 좀비들의 모습보다는 그들을 처단하는 인간들의 모습에 경악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후속편인 <시체들의 새벽(Dawn of the Dead)>과 <죽음의 날(Day of the Dead)>을 통해서 로메로 감독은 더욱 더 사실적이고 비관적인 세계관을 확립시켜 갔으며, 특유의 현실 풍자적 주제의식 또한 강해졌다. <시체들의 새벽>은 올해 초 리메이크 되어 <새벽의 저주>라는 제목으로 국내 개봉되었으며, <죽음의 날> 또한 현재 리메이크 작업 중이다. 무엇보다도 기쁜 소식은 2004년 11월 현재,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숱한 루머만을 뿌려왔던 조지 로메로 감독의 4번째 좀비시리즈 <시체들의 대지>(Land of the Dead)가 촬영 중이라는 사실이다. 톰 사비니를 비롯하여 데니스 호퍼 같은 배우들의 캐스팅 소식 또한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데 큰 몫을 하고 있다. 내년에 공개될 이 영화를 통해서 아무쪼록 노인의 혜안으로 한층 더 성숙하고 치열해진 조지 A. 로메로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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