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포스터
ⓒ 싸이더스
흔히 치매라 불리는 알츠하이머병은 현대의학이 풀지 못한 숙제 중 하나이다. 진행성 뇌 질환인 이 병은 인간의 뇌기능이 점차 퇴화하면서 결국 인간의 생존능력을 상실하도록 만든다.

대부분 60대 이상에서 발생하는 이 병은 환자가족들에게 참을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안겨준다고 한다. 대소변도 못 가리고 자신이 누군지도 잊어먹게 만드는 병. 게다가 우울증이나 인격의 황폐화 등 정신질환도 동반하기에 현대인들에게 가장 두려움을 안겨주는 질환이라고 할 수 있다.

정우성과 손예진이 남녀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이 알츠하이머병을 소재로 만든 멜로영화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여자주인공이 젊은 나이에 이 병에 걸려 기억을 잃어버리면서 꿈만 같았던 신혼생활이 파국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흡입력보다는 관객들의 정서적 연민을 불러일으키는데 애를 쓴 영화였다.

이 영화로 데뷔한 이재한 감독은 누군가가 죽음으로써 감동을 뽑아내는 기존 멜로영화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한다. 죽음에서 비롯된 상실감 외에 다른 상실감을 고민하던 끝에 기억을 잃어 가는 여자주인공을 바라보는 남자주인공의 상실감을 그리고 싶었다고. 실제로 영화에서 부각되는 것은 여자주인공 수진의 사랑보다 기억을 잃어가는 그녀에 대한 남자주인공 철수의 사랑이었다.

모처럼 멜로영화에 도전한 정우성은 치매에 걸린 젊은 아내에게 순정을 바치는 남편 철수로 그 역할을 다했다. 다만 그의 영화 속 이미지가 현재 텔레비전 광고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과 비슷한 것이 흠이었다. 새로운 인물의 창조보다는 광고 속 이미지의 연장인 듯싶었다. 손예진 역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보여주던 모습보다 연기의 폭이 넓어진 것 같았지만 치매를 앓는 환자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데는 아쉬운 점이 남았다.

일본에서는 29세에 치매에 걸렸다는 보고가 있다지만 실제 이십대에 치매에 걸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대개 예순 살 전후로 걸리는 이 병을 이십대 후반 여인이 걸린다는 것 자체가 영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수진이라는 인물은 다분히 상상력을 발휘해야 만들어질 수 있었던 캐릭터였다.

ⓒ 싸이더스
문제는 현실의 치매환자들이 결코 수진처럼 아름답게(?) 병을 앓지 않는다는 것이다. 치매는 단지 기억만 잃어버리는 병이 아니라 인격이 망가지는 병이다. 영화 속 수진은 그런 단계까지 나가지 않았다. 현실의 대부분 사람들도 치매환자의 그 정도 단계까지는 수발을 들며 사랑을 쏟는다.

여성관객들을 겨냥한 멜로영화의 분위기를 의식한 나머지 주인공들의 사랑이 아름답게만 그려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 생활과 좀 더 밀접한 상황에서의 애절한 사랑이 더욱 관객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주인공들의 안타까운 사랑에 목이 메는 장면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주인공들의 사랑이 영화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한 느낌이었다.

요즘 한창 필명을 날리고 있는 소설가 김영하가 각색을 했다. 영화에서 카메오로도 출연한다. 정우성의 친모로 나오는 김부선은 짧은 장면이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평단과 관객들에게 모두 좋은 평을 얻었으면서도 흥행에 고전했던 <슈퍼스타 감사용>이후 싸이더스가 내놓은 기대작. 유독 멜로영화가 많은 늦가을 개봉작 중에 거의 유일한 국산 멜로영화이다.
2004-10-27 12:30 ⓒ 2007 OhmyNews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