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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빚어져 일본에서 국보와 보물이 된 사발을 보고, 한 일본인은“다른나라(조선)에서 ‘잡기’였던 물건을 일본인이 미를 찾아내 국보로까지 승화시킨 것은 우리 일본인들만이 가진 특유의 미의식이 있다"며 "그 미의식은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한국인은 “우리 조상이 간단히 빚은‘막사발’마저 신주 모시 듯하는‘일본인’"을 보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은 자료부족과 정성부족 그리고 식민사관에 오염되어 우리의 옛사발 실체를 못보고 있고, 일본 또한 우리 사발에 대한 많은 연구를 했지만, 자기 조상이 만든 도자기가 아니라 진실을 밝히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한국의 사기장인 필자는 이 사발들은 여러 지면을 통해‘한민족의 제기’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왔으나 항상 몇 페이지로 정해진 지면상의 이유로, 단순하고 추상적으로만 이야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필자는 이번 기회에 민족정기 바로세우기 운동을 하고 있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일본 국보사발은 왜 조선의 제기인가'에 관한 이야기를 5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합니다.

조금은 지루하고 도자기 전문용어가 많습니다만, 친일사전을 발간하여 민족정기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듯이 우리사발을 우리가 정확히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일본 노무라미술연구소의 요청으로 일본 학술지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필자주>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자기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 중 여기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사발입니다. 필자가 이야기 할 사발은 본래 제기를 비롯해서 필세, 보시기 그리고 밥공기도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여러 가지 용도를 가진 그릇이었으나 일본으로 건너가 찻 사발로 사용된 것이 이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 일본의 국보와 보물, 그리고 대명물
ⓒ 본문 참조
그 중에서 일본 문화의 중심이 되고 일본인이 '이도자완(井戶茶碗)'이라 부르고 숭배의 대상이 되어 있는 사발들이 있습니다. 필자는 일본인이 '이도자완'이라 부르는 이 사발들을 진주 근교에서 빚었다하여 진주사발이라 부릅니다.

이 중 하나가 일본의 도자기 중 가장 먼저 국보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보가 된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이 사발을 국보로 지정할 때 일부 우익들이 조선 사발이라 반대했었다고 합니다.

(1)의 그림은 진주멧사발(일본 大井戶茶碗, 일본국보), 고봉암소장입니다.
(2)의 그림은 진주멧사발(일본 大井戶茶碗, 일본중요문화재), 개인소장입니다.
(3)의 그림은 진주멧사발(일본 大井戶茶碗, 일본중요문화재), 부산기념관 소장입니다.
(4)의 그림은 진주멧사발(일본 大井戶茶碗, 일본중요문화재), 세이까또미술관 소장입니다.

그림(1)이 일본의 국보가 된 이유로는 비록 조선에서는 가치가 별로 없는 잡기인 막 사발이었으나 일본 차인의 심미안에 의해 아름다움을 찾아내었고, 또한 밥공기였던 이 사발의 용도를 찻 사발로 승화시켜 이 사발 속에 내재 된 미를 세상에 알린 것은 일본이고 또한 사랑을 받은 곳도 일본이므로 그들의 국보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사발과 같은 '이도자완'이란 분류명을 가진 여러 사발들이 중요문화재(한국의 보물에 해당됨), 중요 미술품 그리고 대명물이 되어 현재 일본에서는 숭배의 대상이 될 정도가 되어 있습니다.

▲ 대덕사 고봉암에서 일본국보가 된 진주멧사발을 감상하는 필자
ⓒ 신한균
그리고 일본 미술품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 된 것이 '대이도자완'이라 불려지는 조선시대에 제기용으로 사용 된 진주멧사발 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 사발의 관련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서울 중앙박물관에도 이 사발과 비슷한 사금파리만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사발들은 ‘지방가마’라 불리며 도자사(陶磁史)에서는 상대적으로 경시되어왔습니다. 현재도 도자기 학자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이 사발을 ‘井戶자완’이란 일본 이름을 사용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분류명도 아닌‘막사발’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앞에서 필자는 이 사발들을 진주사발이라 부른다고 언급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 단지 굽이 좁고 높아서 제기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 있을 뿐 정확히 조선의 제기라는 근거를 어느 누구도 제시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 사발의 용도를 확실히 밝히지 못하자 일본에서는 일부의 의견이기는 하지만 본래 이 사발은 일본인이 디자인(design)하여 밀무역에 의해 조선에서 수입한 주문품이라는 억지 주장도 있습니다.

진주사발은 과연 잡기인 막 사발이었을까요? 막 사발이란 이름을 통해 일본인들은 우리 조상의 잡기 마저 숭배한다는 우월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이 빚은 사발은 우리가 정확히 그 그릇의 쓰임새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필자는 여러 가지의 근거를 들어 일본에서 명물이 된 진주사발의 대부분이 우리 한민족의 제기였음을 밝히고자 합니다. 물론 진주사발 중 소수이지만 밥 사발이 명물이 되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명물로 되어 있는 진주사발이 대부분 제기였음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우리민족의 제기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1) 우리 한민족의 제사를 향한 마음가짐을 소개하면

▲ 제사 풍속도
“제기는 특별한 곳에 보관하며 항상 자물쇠를 채워 봉하며 다른 일에 쓰지 않으며 창고가 없을 때는 특별히 함을 만들어 보관해야 된다. 대장부는 제기를 빌려쓰지 않으며 제기를 미처 마련하지 못할지라도 보통 그릇과 같이 값 싼 것으로 대용하지 않는다.”(왕제)

곡례(曲禮)라는 책에는 “군자라면 아무리 가난 할 지라도 제기는 팔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제기가 생명을 다하면 특별히 묻어서 처리한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조상은 제기를 얼마나 중요시 여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기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제물이나 제수를 담는 것을 비롯해 술을 따르는 잔, 반찬을 담는 보시기, 밥을 올리는 멧그릇, 갱그릇이라 하여 탕을 담아 올리는 제기 등에 그 다양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대부분의 제기는 굽을 높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조상이나 모시는 신을 높이 받든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입니다.

(2) 한반도 제기의 특성

우리 한반도의 제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주 특별한 디자인이었습니다.

제기의 변천사를 간단히 설명해 보면
ㄱ) 한반도의 제기는 처음에는 청동기를 흉내내었다.


▲ 청동기나 유기를 흉내낸 임진왜란 전의 도자기
ⓒ 본문참조
사진과 같이 한반도의 제기는 형태뿐만 아니라 문양 역시 청동기를 그대로 모방하였습니다.
그림(1)은 중국의 오래 된 청동기 제기입니다. 그림(2)는 고려 청자로 된 제기입니다. 고려시대에도 중국의 청동기를 그대로 닮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입니다.

그림(3)은 15세기 관요에서 만든 왕을 위한 백자제기 입니다. 그림(4)와 상당히 닮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백자제기는, 원래는 그림(4)과 같이 위로 뻗은 막대문양이 있었으나 깨어져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그림(1),(2),(3)은 임진왜란전의 제기입니다. 그림(4)는 조선 초기에서 조선 후기까지 유기로 제작 된 제기입니다. 결론적으로, 한반도의 제기는 청동기나 유기를 모방했었습니다.

ㄴ. 제기는 문양이나 특별한 장식이 없을 경우에는 굽이 아주 높다

▲ 제기는 문양이나 특별한 장식이 없을 경우에 굽이 아주 높다.
ⓒ 본문참조
그림(1),(2)는 한반도 도기(토기)로서 제기입니다. 굽을 높게 만들어 조상을 높게 받들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림(3)은 조선의 민가용 제기라고 추정됩니다. 분청사기입니다. 그림(4)는 현재 일본에서 찻사발로 더 유명한 지방가마의 제기로 추측됩니다. 이것과 비슷한 목기로 된 제기도 있습니다. 그림(1),(2),(3),(4)는 임진왜란 전의 제기입니다. 특히 (3),(4)는 지방가마에서 빚은 민가용 제기입니다.

또한 제기 고유의 난해한 형태와 문양이 단순화되어 아주 소박하고 정겹습니다. 그리고 제기의 형태에서 지방의 토속미가 강하게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림(5),(6)은 임진왜란 후의 제기입니다. 임진왜란 후 전국 토에서는 백자만 정착하게 됩니다.

그림(5)는 궁중에서 제를 올릴 때 쓰던 잔입니다. 아주 굽을 높게 만들었습니다. 그림(6)은 조선 도자명고라는 책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 그림을 통해서도 제기는 굽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조선의 소반 - 조선도자명고, 학고제
ⓒ 아사까와 다꾸미
조선에서는 제기로 쓰는 그릇은 도자기뿐만 아니라 철기, 목기도 굽이 좁고 높은 것이 대부분이며 굽이 높은 이유는 조상을 높이 섬긴다는 뜻입니다. 위의 그림을 보아도 제기는 일반 그릇과는 특별히 다른 디자인이었으며 일반적으로 굽부분이 높거나 특별한 처리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민족의 제기는 굽이 높다는 것입니다.

ㄷ. 굽이 높지 않으나 굽에 홈을 판 것도 있다

그림(1)은 임진왜란 전에 일본으로 건너 간 조선의 제기입니다. 현재 일본에서 대명물 찻사발이 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 찻 사발로 쓰기 위해 전부분의 귀를 고의로 떼어 냈다 합니다. 그림(2)는 임진왜란 중에 왜군이 노획하여 전리품으로서 도요토미히데요시에게 상납된 조선의 제기입니다. 이것도 일본인이 찻 사발로 쓰기 위해 옆부분의 귀를 떼어 냈습니다. 그림(3)은 진주부근의 제기 보시기입니다.

▲ 굽이 높지 않으나 굽에 홈을 판 것도 있다.
ⓒ 본문참조
굽 부분에 홈만 나있지 귀를 붙인 흔적은 없습니다. 일본에서는‘청이도(靑井戶)’라 부릅니다. 일본 네즈미술관에 있습니다. 그림(4)는 동경박물관에 있습니다. 옆면의 붙인 귀 장식의 디자인이 특이합니다.

일본에서는 그림(1),(2)의 사진과 같은 종류를 ‘와리고다이(割高台)자완’이라 부릅니다. 필자는 이것을 ‘나눔굽사발’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림(5)는 아티카컬렉션에 있는 17세기 한민족의한반도 제기입니다.

또한 일본에서는 위의 그림 속의 제기를 모방한 찻 사발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림 (1),(2),(3)와 같이 굽에 홈을 파거나, 그림(4),(5)처럼 옆면에 귀 장식을 단 제기는 사실 민가에서 쓰는 제기가 아니었습니다. 지방에서 유학자들이 공자에게 제를 올리는 향교에서만 사용하였습니다. 그림(3)은 굽 부분에만 홈이 파여 있습니다. 이것은 진주사발을 빚었던 옛 가마터에서는 향교용 제기, 민가용 제기, 일반 식기 등 여러 가지를 함께 빚었음을 뜻합니다.

지방의 민가용 제기는 향교보다도 더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 되었습니다. 위의 그림을 통해서도 한민족의 제기는 미학적 파격을 통해 개성미가 강한 것이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위의 사진 속에 있는 그릇들은 제기였기 때문에 망자의 옛 무덤 속에서 출토되지 않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 한 바와 같이“제기가 생명을 다하면 제기만 따로 묻어야 한다”라는 옛 기록이 있습니다. 혹, 출토되었다면 이는 제기만을 따로 묻었을 경우입니다. 결론적으로 제기는 일반무덤에서 출토되지 않습니다.

ㄹ. 면 치기를 한 경우

▲ 면치기를 한 조선의 제기
ⓒ 본문참조
제기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가 면 치기입니다. 면 치기란 표면을 칼로 깎아낸 것을 말합니다. 임진왜란 후에도 제기의 디자인은 일반그릇과는 사뭇 차별화 되고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ㅁ. 물레선을 남겨 놓았다

▲ 청동기의 난해한 요철문양을 물레선으로 단순화 시킨 경우
ⓒ 본문참조
물레선을 일부러 낸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청동기의 난해한 문양을 과감하게 생략하여 단순화시킨 조선사기장의 창조적 정신의 발로로 보여 집니다.

그림(1)은 덤벙분청 제기(16c) 입니다. 후쿠오까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림(2)는 국립박물관에 소장(17c) 되어 있습니다. 그림(3)은 미국 보스턴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금속제기 입니다. 그림(4)는 난해한 문양을 가진 청동으로 된 제기 입니다.

조선은 초기부터 그림(3),(4)처럼 청동기나 금속기에 나타나는 요철문이나 도식화 된 문양을 그림 (1),(2)처럼 단순화 시켜서 점점 우리민족 고유의 제기로 변형시켜서 토착화 시켰습니다. 또한 그림(1)은 임진왜란 전이고, 그림(2)는 임진왜란 후의 것입니다.

위의 그림에 나타나 있는 물레 선은 조선의 도자기로 된 제기가 금속제기와 달리 독특한 개성을 가진 한반도의 제기로 토착화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결론은 민가용 도자기로 된 제기는 금속기의 요철문이나 도식화 된 문양을 과감히 생략 단순화시켜 사용하였습니다.

ㅂ. “제(祭)”를 써 넣은 제기

▲ '祭'를 써넣은 제기
ⓒ 본문참조
임진왜란이 지나고 나서는 제기 차체에 “제(祭)”자를 각인하여 누구든지 제기임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위의 그림은 모두 임진왜란 후의 제기입니다. 이 또한 제기임을 확실하게 밝혀 일반 그릇과는 혼돈이 되지 않도록 배려한 조선 사기장들의 섬세함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다음장에는 일본에서 국보가 된 진주멧사발과 조선시대 제기와의 연관성을 설명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저는 도자기에 묻어 있는 일본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우리 옛그릇 이름 되찾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학자가 왜곡한 우리 도자사를 바로잡을 뿐 아니라 미학자들이 왜곡한 도자기의 본질을 사기장인 제가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며 책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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