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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부터 우리 민족의 곁을 떠났던 차문화는 1970년대부터 억센 커피 문화의 홍수 속에서도 조금씩 재부흥의 걸음마를 시작하여 조금 자리를 잡는 듯 하더니 언제부터인지 같은 차인 중국차에 무수히 두드려 맞고 있다.

사실 중국차는 돼지고기를 많이 먹는 중국인을 위해 만들어진 차이고 우리의 차는 우리 한민족에 맞는다는 사실은 많은 전문가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 이런 말이 있다. “차를 마시는 민족은 흥하고 술을 마시는 민족은 망한다”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말씀이다.

필자도 여기서 한마디 하고 싶다. “차를 마시면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으며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을 수 있다” 자, 이번에는 고려의 옛 기록을 통해 차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고려는 신라의 차문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한반도에 차문화를 가장 꽃피운 나라이다. 왕실 뿐만 아니라 귀족 및 일반 백성들까지 차를 즐겨 마셨다는 기록이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있다.

또한 중국과의 교류에 차를 예물로서 주고받기도 했으며 좋은 차를 직접 수입하기도 했다.
고려인들은 차 모임에 초대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고, 차를 마시는 행위에는 예절이 존재했다. 마치 수행(修行)하는 선승의 모습처럼 차를 통해 도(道)의 길을 가고자 했다.

▲ 차나무
ⓒ 신한균
다방(茶房)과 다군사(茶軍士)

지금의 다방이란 커피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차를 파는 곳이다. 고려시절 다방이란 관(정부)의 여러 행사에서 차에 관한 모든 일을 전담하는 관청을 말한다. 다방은 고려 초부터 존재했으며 때로는 의약과 술, 그리고, 국가의 제사 등 그 직무의 폭이 상당히 넓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방 관리의 계급은 시대에 따라 조금 달랐으나 정3품에 해당되는 다방시랑(茶防詩郞)을 필두로 4품, 5품 그리고, 7품인 다방참외(茶房參外)까지 다양한 계급이 속해 있었으며, 많은 하인도 속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다방이 아주 큰 관청이었음을 의미한다.

또, 다방에는 다군사라 하여 군인이 소속 되어 있었다. 이 다군사 제도는 중국과 일본에도 없는 고려의 특수한 제도라 여겨진다. 다군사는 국가의 차행사때 차를 담당하는 관리의 호위와 여러 다도구의 관리를 담당했다고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차행사에 군인까지 동원하는 것은 차행사가 국가적 중대행사였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 다군사에 대한 폐단이 생겨나면서 이 제도에 개혁을 단행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또 다른 기록에는 고려초의 왕인 문종원년(1047)에는 정4품에 해당되는 다방태감(茶房太監) 김징악(金徵握)이 치사(致仕)할 나이인 69세가 되자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했다.(치사는 지금의 정년퇴직에 해당된다) 그러나 왕이 이사람을 훌륭한 차인이라 하여 수년 더 근무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방의 관리들은 많은 녹을 받았을 뿐 아니라 , 좋은 직책으로 인식되었기에 다방에 선발되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지만,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강산도 변하듯이 고려시절 중요관청이었던 다방은 고려말 군인들이 정부를 좌지우지 하던 무신(武臣)정권에 들어서자 다방의 관리를 용인(庸人) 즉 졸렬한 사람이라 하여 좋은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다방의 관리 즉 차인을 더 이상 높은 관리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조선중기부터 우리 한반도에는 차문화가 쇠퇴하기 시작한 요인 중에 하나라 여겨진다.

다원(茶院), 다점(茶店), 다소(茶所)

고려시대 원(院)이란 왕이나 관리, 스님 즉 귀족들이 여행하다가 쉬는 곳을 말한다. 특히 다원은 차를 마시기에 좋은 샘물이 나오는 곳에 정자를 지어 다원으로 삼았으며 이곳에는 기녀가 속해 있기도 했다. 이 다원은 전국의 여러 곳에 있었으며 신라시절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다점은 일반 백성들이 돈이나 물건으로 값을 치르고 차를 사거나 차를 마시는 집이다. 성종(成宗, 981~997)시절의 기록을 보면 일반 백성들이 처음에는 돈 대신 베를 주고 다점에서 차를 사서 마셨고 그 이후에는 돈을 주고 마셨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당시에는 찻집과 술집이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

고려시대 소(所)란 천민집단이 거주하는 특수 행정구역을 말한다. 소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나 차, 구리, 철, 금, 은등을 제조하여 그것을 공물(貢物)로 나라에 바쳤다. 사실 한반도에서는 도자기를 만드는 사기장(일본식 표현으로 도공)도 조선시대까지도 천민계급에 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의 다소는 조선의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따뜻한 지역에 속하는 경상남도와 전라도의 19지역에 집중배치되어 있다. 이 19지역은 지금도 대부분 차의 산지이다. 다음은 고려시대의 차의 세금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한국사통론> 변태섭 지음, <한국차문화> 정영선 지음, <다도학>     김명배 지음,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도경>, <세종실록지리지>

한국 전통 도예가 신정희옹의 장남이며 양산 통도사 부근에서 작도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사기장 신한균의 <우리사발이야기> <산도둑놈의 산사랑이야기>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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