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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창덕궁 후원 부용지 축대 모퉁이에 새겨진 잉어 조각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 보고 “음, 이 연못엔 잉어가 많이 사는 모양이군!”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좋은 눈썰미도 말짱 헛 것이다.

또 남원의 광한루 연못가에 있는 거북(자라) 석상을 보고 “야, 이 연못엔 자라도 사는 모양이네!”라고 감탄하고 말 뿐이라면 그 역시 광한루의 진면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이다.

창덕궁 후원 부용지의 축대 모퉁이에 새겨놓은 잉어 조각은 등용문(登龍門) 설화와 관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건너편 돌계단 위 어수문(魚水門)의 문설주에 새겨진 용의 조각과 어수문 안쪽 주합루(宙合樓)에 이르는 계단돌에 새겨진 구름 문양들이 이해가 되고, 그 옛날에는 부용지 일대가 과거 시험을 치르던 장소였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잉어들(과거 시험을 치르는 선비들)은 맞은편에 보이는 어수문, 즉 용문을 향해 뛰어오르는데, 그 중의 일부가 용문을 통과하여 용이 되어(장원급제), 구름 위의 누각 주합루에 오르게(입신출세) 되는 것이다.

또 남원 광한루의 거북(자라) 석상은 흔히 ‘별주부전’이라고 알려진 귀토설화(龜兎說話)와 관련된 것이다. '달 속에 있다'는 가상의 궁전 광한전(廣寒殿)에서 이름을 따온 광한루원이 사실은 월궁뿐만 아니라 바다 속의 용궁까지도 염두에 두고 조성된 정원이라는 것을 그 거북 석상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광한루 기둥 곳곳에 장식된 거북 등에 올라 탄 토끼의 조각상들은 바로 그 선명한 증표들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전통정원들에는 건물들뿐만 아니라 사소해 보이는 조각상과 장식 무늬 하나하나까지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어 그것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좋은 눈썰미 못지않게 풍부한 지식을 함께 갖추고 있어야 한다. 사진작가 이갑철의 아름다운 사진들과 함께 엮은 허균의 <한국의 정원, 선비가 거닐던 세계>는 그 좋은 길잡이가 될만한 책이다.

그는 우선 우리나라 전통정원의 특징을 주로 이웃 중국과 일본과 견주어서 개괄한 다음 그 사상적 배경을 논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전통정원은 인공적 경관이 주가 되고 있는 중국 정원이나 구석구석까지 인간의 손길이 미쳐 철저하게 작위적인 느낌을 주는 일본 정원과는 달리, 자연 경관이 주가 되고 인간의 손길은 최소한으로 하여 정원과 자연의 경계를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과 동화되어 있다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정원에서는 유럽이나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분수가 없는 대신 자연스럽게 조성된 폭포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흐름을 거슬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또한 늘 푸른 상록수를 선호하는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정원에서는 계절의 영향을 받는 낙엽활엽수가 더 많이 눈에 띄는데, 이것 역시 계절의 변화를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연친화적 성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원의 가장 큰 특징은 그렇게 정원으로 스며든 자연경관을 연못의 배치, 바위와 조각상과 같은 각종 경물(景物), 수목(樹木), 정자의 편액 또는 암각서 등 정원의 다양한 구성 요소들을 이용하여 인문경관으로 탈바꿈시켰다는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원은 단순한 감상과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그 정원 주인의 욕망과 정신세계를 상징적 수법으로 구현한 또 다른 성격의 생활공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예컨대, 궁궐 정원이나 선비들이 낙향하여 조성한 별서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네모난 연못 한가운데 둥근 섬이 떠 있는 모습의 방지원도(方池圓島)형 연못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유교적 우주론의 반영이며, 그 연못에 주로 연꽃을 심은 것도 연꽃이 유교에서 이상적 인간형으로 삼은 군자를 상징하는 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난 문민정부 시절에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궁궐 안에 있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복궁 경회루 연못의 연꽃들을 뿌리째 뽑아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정원의 연못과 연꽃이 담고 있는 이러한 깊은 뜻을 알지 못한 특정 종교인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런 연못에 3개의 바위들을 심어놓고 삼신산(三神山)으로 부르거나 정원 구석구석에 12개의 크고 작은 자연석을 세워 놓고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이라 이름한 것은 도가 사상의 영향으로서, 당시 사람들이 유한한 인간의 수명과 속세의 현실적 제약을 벗어나 생사의 굴레에 초연한 신선과 같은 삶을 꿈꾸었음을 짐작케 한다.

아울러 정원에 심은 나무들에도 제각기 깊은 뜻이 있어서 은행나무는 공자의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장소를 의미하는 행단(杏壇)의 상징이며 소나무, 대나무, 매화 등의 나무들은 지조와 은일의 상징으로서, 그 나무들에서 옛 사람들은 곧은 선비와 고아한 군자의 모습을 보았다.

정자(亭子)나 당(堂), 각(閣), 헌(軒), 재(齋) 등 건물의 편액과 산수정원의 큰 바위나 대(臺) 등의 암각서에 주자나 굴원 등 옛 성현의 글이나 고사(故事)에서 딴 이름을 붙인 것 역시 그들에 대한 선망과 흠모의 표시임과 동시에 자신도 그들처럼 살고자 하는 욕망과 다짐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편액과 각서는 당대 사람들의 생활철학과 사상 또는 현실적 욕망을 고스란히 함축하고 있는 정신적 가치가 큰 문화유산이라 할 것이다.

<한국의 정원, 선비가 거닐던 세계>는 이러한 우리 전통 정원의 특징을 하나하나 분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대표적인 우리의 전통 정원 28군데를 소개하고 있어, 여행길에 지니고 다닐 책으로도 안성맞춤이다.

이 책을 들고 다니면서 창덕궁과 경복궁 등의 궁원들과 광한루원과 전남 담양의 명옥헌 등의 향원들이 간직한 고아한 아름다움의 배경을 새롭게 이해하는 것도 큰 기쁨이겠지만, 우리나라 전통정원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전남 담양의 소쇄원과 보길도 부용동 정원과 같은 별서정원들과 경남 함양의 농월정과 강원도 삼척의 죽서루와 같은 산수정원들에서 만나게 되는 빼어난 자연미가 사실은 그 풍경을 보는 이의 내면 풍경에 다름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더 큰 기쁨이 될 터이다.

우리 문화유산답사의 길눈이 유홍준 교수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볼 수 있을 뿐이다. <한국의 정원, 선비가 거닐던 세계>는 바로 전통 정원을 바라보는 우리의 안목을 키워줌으로써, 우리의 전통 정원에서 보다 많이 느끼고 보다 많이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이다.

허균은 누구?

이 책의 저자 허균은 회화, 건축, 공예, 불교미술 분야에서 한국인의 미의식을 연구하는 한편, 그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의미와 상징성을 살피는 일에 힘쓰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저자가 새로이 미술 영역이 아닌 정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리의 정원이 다른 전통예술 못지않은 한국적 자연관과 생활철학을 담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한국미술사를 전공했고, 우리문화연구원장, 문화관광부 문화재 전문위원, 문화재 감정위원, 문화재청 심사평가위원을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책임편수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전통문화에 담긴 여러 의식과 철학을 고찰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통미술의 소재와 상징>, <고궁산책>, <전통문양>, <문화재 및 전통문화 관리기능의 효율적 방안 연구>(공저), <뜻으로 풀어본 우리 옛 그림>, <사찰 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등이 있고 <한국인의 기질과 미의식>, <한국인의 미의식과 그 표현의 특질>, <민화에 나타난 서민정서>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책의 사진을 제공한 이갑철은 사진작가로서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한국인의 삶의 한 부분인 정한이나, 신명, 끈질긴 생명력을 사진에 담아 왔다. 이갑철의 사진 속에는 우리의 정체성이 살아 있다. 사진집으로 <충돌과 반동> 등이 있다.

한국의 정원 선비가 거닐던 세계

허균 지음, 이갑철 사진, 다른세상(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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