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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막에 매혹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이다. 당시 알베르 까뮈에 경도되어 있던 내게 그의 마지막 소설집 <적지와 왕국>에 수록된 단편 ‘간부’가 보여준 황폐하고 광막하지만 영혼의 풍경과 닮아 있는 사막의 모습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소년으로 하여금 사막을 꿈꾸게 하였다. 그러나 마흔이 다 된 지금까지도 나는 아직 사막에 가지 못했고 지금도 여전히 꿈을 꾸고 있을 뿐이다.

이희중 시인은 “우리는 더러 사막과 마주친다/ 그때 한 걸음을 내디디면 스스로 사막이 될 수 있다”라고 우리 일상의 삶에 깃들어 있는 징후로서의 불모의 사막에 대해 경고하고 있지만 내가 꿈꾸는 사막은 언제나 새로운 탄생의 땅이었다. 마치 ‘간부’ 속의 여주인공 자닌느가 사막의 광막한 풍경 앞에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발견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처럼 말이다.

백과사전식으로 사막에 관한 지식을 항목별로 담고 있는 창해ABC북 <사막>에서 우리가 바로 잡게 되는 첫 번째 사실도 바로 ‘사막은 죽음과 불모의 땅일 뿐이다’라는 잘못된 생각이다. 이 책에서 글과 사진으로 만나게 되는 사막의 풍경에서 우리는 불모의 황무지에 깃든 죽음과 함께 초월과 영원으로 향하는 신성(神性)을 동시에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막에 간다는 것은 죽음을 무릅쓰는 모험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근본적인 것의 탐구, 즉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려는 탐구이기도 한 것이다. 아브라함을 공통조상으로 하는 세 종교(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서 사막이 명상과 유혹과 계시의 장소로 묘사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모세가 40일 동안의 단식으로 계시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야훼가 모세 앞에 나타난 곳은 사막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도 성령에 이끌려 사막의 야수들 사이에서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며 은둔생활을 했으며, 마호메트 역시 사막에 은둔하여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은 것이다.

이와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오류 중의 하나는 ‘사막은 모래의 바다이다’라는 것인데, 이 또한 잘못된 것임을 <사막>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그레이트샌디 사막, 중앙아시아의 타클라마칸 사막처럼 거대한 모래언덕으로만 이루어진 사막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막은 자갈투성이의 황무지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아프리카 대륙 북부의 10개국에 걸쳐 있는 사하라 사막의 경우에도 모래로 이루어진 지역은 전체의 5분의 1도 채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모래 바다’라는 사막의 이미지가 매우 잘못된 것임을 금방 깨닫게 된다. 이러한 잘못된 이미지의 보급에는 유럽 소설가들의 글들과 화가들의 그림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같은 영화가 큰 몫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진짜 ‘모래 바다’도 있어서 아라비아의 네푸드 사막이나 룹알할리 사막은 거대한 모래 언덕들이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굽이친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막을 바다에 비유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광대한 면적의 이 모래 언덕들이 바다의 파도와는 달리 대부분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르한’이라고 불리는 사구들은 시간에 따라 점점 커지며 아주 느린 속도로 움직이기까지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구들은 일정한 방향에서 바람이 강하게 불어올 때 형성되며 크기에 따라 이동 속도가 다르지만 보통 일 년에 10m 정도 이동한다고 한다.

생각해보라, 여기 있던 모래 언덕 아래에 소중한 것을 묻어 놓았는데 1년 뒤에는 10m 뒤쪽에 물러나 있다면 어떻게 그 보물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사람들은 사막에서 보물을 발견한다. 그 보물이란 다름 아닌 오아시스(oasis)다. 16세기에 아라비아 지역을 지칭하기 위해 후기 라틴어에서 차용한 단어인 오아시스는 ‘꿈의 샘’이란 뜻으로 원래 이집트의 고대 왕조 시대의 지명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오아시스에 대해서도 우리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오아시스는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다’라는 생각이다. 물론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고도 자연적으로 지표면까지 솟아나는 우물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우물들은 인간에 의하여 발견되어 지하에서 끌어올려진 지하수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오아시스는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사실을 쉽게 깨닫게 된다.

오아시스가 인간의 관개사업에 의해 곡물 재배까지 가능해지면 도시로 발전하게 되고 그러면 사막을 떠돌던 유목민들도 그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정착하여 정착민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바다 위의 주민’이라는 아랍의 베두인족처럼 바다와도 같이 광활한 사막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의 생활을 끝까지 고집하는 부족들도 있다.

그러한 사막의 부족들에게 낙타는 사막을 건너가는 배와 같은 것으로써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이다. 그 낙타들은 배의 마스트처럼 혹을 등에 지고 있는데, 단봉낙타는 아라비아나 아프리카처럼 더운 지방에, 쌍봉낙타는 중앙아시아나 중국 대륙 북부의 몽골과 같이 추운지방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낙타들의 등에 솟아있는 혹이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물을 저장하는 물주머니일까?

그렇지 않다. 낙타는 한 번에 엄청난 양(약 120리터)의 물을 마실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등에 불쑥 튀어나온 그 혹을 물주머니로 오해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안에는 지방이 담겨 있고 낙타는 사막을 여행하는 동안 필요한 수분을 그 지방을 분해해서 얻는다고 한다.

이처럼 창해ABC북 <사막>은 우리가 사막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들, 그리고 사막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새롭게 가르쳐 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었다고 해서 우리가 사막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을 터이다. 사막은 실제로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언제나 신비이기 때문이다.

설사 실제로 사막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자갈고원과 모래언덕을 걸어보았다 하더라도 그 풍경 속에서 초월과 영원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여전히 사막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오아시스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사막에 가기 전에 우리는 먼저 바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하리라.

사막

장 로이크 르 클레크 지음, 김보현 옮김, 창해(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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