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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쪽으로 약간 쉬어 있는 듯한 음색이 오히려 애잔한 고운 소리. 그래서 사연이 많을 듯한 아가씨가 지긋이 눈감고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는 듯한 느낌. 내가 플룻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이었다.

내가 꼭 한 번은 플룻을 배워보겠다고 설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였는데, 승용이라는 친구가 플룻을 가지고 있었다. 그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한 구석에서 꺼내 보여준, 두 조각으로 분해된 채 자주색 빌로드 케이스 위에 누워있는 은은한 은빛의 악기. 그것이 플룻이었다.

"야, 너 이거 불 줄 아냐?"
"조금."
"한 번 불어봐."
'빠바밥 빠바, 빠바밥 빠바, 빠 바 바 바 바'

승용이가 연주한 것은 딱 한 소절. 그 몇 해 전에 유행했던 '벗님들'이라는 그룹의 '사랑의 슬픔'이라는 노래 전주 부분이었다.

"우와, 멋있다. 그런데 다 한 거냐?"
"응."

정말 멋진 연주였다. 클래식이건 대중음악이건 뚱땅대는 동네 형들 기타소리 빼고는 악기가 직접 연주되는 것을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코 앞에서 소리를 내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종류의 악기가 울리는 아름다운 음색에 나는 압도되고 있었다. 문제는 곡이 좀 짧다는 것.

"왜, 더 해봐."
"할 줄 아는 게 이게 다야."

사실 승용이는 예체능반도 아니었다. 플룻이라는 것이 그리 흔하게 다루던 악기도 아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악기를 만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왕 다룬다면 멋지게 몇 곡 뽑아봄직도 한데 어쩌자고 달랑 한 소절밖에는 불 줄을 모른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플룻 한 소절 들어놓고 궁금한 게 많아서, 곧장 심각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승용이는 음대에 가고싶다고 했다. 그런데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부모님, 아니 가족 전체가 반대한다는 점, 둘째는 성적이 웬만큼 나오고 있었다는 점, 셋째는, 이것이 어쩌면 가장 중요하겠지만 음악에 관한 어떤 재능이 발견된 적도 없었거니와,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해본 적도 전혀 없었다는 점이었다.

조그만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는 승용이의 아버지도 꽤나 완고한 분이었겠지만, 승용이와 너댓 살 터울이 있는 형은 조금만 삐딱한 모습이 보이면 동생을 지하실로 끌어내려 몽둥이를 휘두를 정도로 팍팍한 사람이었다. 그런 집안의 막내였던 승용이는 애초부터 음악공부를 해보고싶기는 했지만 말 한 번 꺼내보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과반의 반장을 맡고 있었을 만큼 어느 정도 나오는 성적을 가지고 웬만한 대학에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것이 분명한데, 실기 영역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는 예체능계로 옮긴다는 것은 내가 보아도 말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성악이면 성악, 기악이면 기악, 나름대로 전공이 있어야 했을 것인데 승용이는 그렇지도 않았다. 그냥 소리와 노래와 음악. 그 녀석이 빙빙 돌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애매한 꼬투리들의 언저리였다.

그러다가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에서 '사랑의 슬픔' 을 듣고는, 꼭 저 전주곡을 연주해 보고싶다는 생각 하나로 용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년인가 만에 삼십만원짜리 플룻 한 개를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힘들게 손에 넣은 플룻을 입에 물고 아무리 요리조리 불어 보아도 나는 소리는 픽픽 바람 새는 소리뿐이었다. 나도 그 날 당장에 한 번 불어보겠노라고 달려들었지만 소리를 내는 데는 실패했었다. 리코오더를 빼면, 관악기란 대개 완벽한 문외한들의 난잡한 접근을 발성단계에서부터 걸러낼 수 있는 구조로 설계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승용이는 용돈을 조금씩 모아서 한 오륙만 원 모이면 음악학원에 등록을 했고, 또 돈이 떨어지면 끊어야 했다. 그렇게 한두 달 단위로 서너 번 이어지고 끊어지기를 반복했던 승용이의 음악학원 생활. 악기라는 것을 그렇게 몇 달씩 공백을 두어가며 배우다보니 그 동안 소리 내는 법과 손가락 위치 익히기에도 급급했고, 짬짬이 집에 가족들이 없는 틈을 타서 열심히 연습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그나마 '사랑의 슬픔' 한 소절도 그렇게 멀끔하게 연주해내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승용아, 그럼 지금부터는 뭘 하고싶어?"
"글쎄, 음악 공부 말고는 별로 해보고싶은 건 없어."
"야, 그런데 너무 늦었잖아. 내년이면 고 삼인데."
"그렇긴…하지. 그래도 음악을 시켜준다고만 하면 재수나 삼수도 해도 괜찮거든."
"그럼, 예체능계로 옮길거야?"
"일단… 아버지한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말씀을 드려보고. 안된다면 그냥 아무데나 가지 뭐."

물론 그 때도 뻔히 내다볼 수 있던 일이었지만, 부모님의 대답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막판까지도 부여되지 못했던 성취동기 때문이었는지 그 해 승용이가 지원했던 '아무데'서도 합격통보는 오지 않았고 결국 승용이는 다음 해, 음대는 아니지만 문과 계통으로 옮겨 또 다른 어떤 과로 진학했다.

누구나 한 가지는 잘하는 것이 있다고들 한다. 그게 재능이고 신의 선물이니까, 그것을 잘 개발해야 한다고들 한다. 또 비슷한 말로, 누구나 간절히 하고싶은 일도 있다고 한다. 그것이 천직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그 두 가지가 꼭 같으라는 법은 없다. 최고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심지어 그 분야에서 뒤쳐지고 낙오할 것이 거의 분명한데도 한 번 해보고싶은 일이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승용이는 바로 그 닿지 않을 꿈과 완고한 현실의 족쇄 사이에서 얼쩡이고 있었다.

결국 별 볼 일 없이 끝난 거야 별 차이 없겠지만, 그래도 어디서 플룻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승용이를 생각한다. 열등감이라는 단어를 배우던 순간부터 지레 한 풀 꺾여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은 쳐다보지도 않고 살지만, 그래도 가끔은 승용이의 무모한 꿈이 부러워지는 모양이다.

사실 나도 그 플룻을 빌려다가 방학 내내 불어댔었지만, 나는 한 옥타브를 오르내리는 정도 이상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이 플룻 만지기에 물리고, 어설픈 소리에 지레 질려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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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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