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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에 따라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는' 우리나라의 정치행태가 학창시절의 반장이라는 직책을 통해 문화 속으로 자리잡고 전승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반장이란 공식화된 권한은 없으되 반장 개인이 힘이 있다면 선생님 이상의 권력자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그 개인이 무력할 경우에는 반장 아닌 이만도 못한 희생물이 되곤 하는 모호하고 자의적인 자리이기 때문이다. 나 같은 약자는 이런 가변적 변수의 존재가 늘 두렵기 마련이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전학하면서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조금씩 올라가던 나의 성적이 중학교 이학년 때에는 나를 반장후보 자격조건인 전체 10% 이내로까지 간신히 밀어넣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 반 반장 후보는 우선 7명이 되었고 나는 그 중에 7등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 추천을 받은 4명을 대상으로 투표가 시작되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오랜만에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에게 그 선거는 당선되지 못해도 충분히 행복한 사건이었다. 그 선거는 오랜만에, 시골학교에서 서울로 전학 온 이래 한 번도 주목받지 못하다가 그야말로 오랜만에 많은 아이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잘난 척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마침 그때는 <세계사편력>이니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니 하는, 나이를 좀 넘는 책들을 접하면서 앞 뒤 서너 명의 친구들에게 조금 잘난 척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나는 즉석에서 떠오르는 온갖 유머와 함께 네루의 <세계사 편력>의 몇몇 구절까지 인용해가며 명연설을 함으로써 여타 후보들을 압도했다. 아이들이 많이 웃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생각한 건데 그때 중2짜리 아이들이 네루의 문장을 이해했을 리 없다는 점을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부분 비웃음 내지 황당한 웃음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반장에 당선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었다. 왜냐하면 그 선거의 가장 유력한 후보는 공부와 주먹 모두 전교 1,2등을 다투던 동혁이라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공부와 주먹을 모두 가진 동혁이와, 그 두 가지 모두 부실했던 나와의 경쟁은 사실 싱거운 것이었다. 심지어 그 교실에서 나와 말을 나누어 본 아이를 꼽아보더라도 절반이 채 안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선거에 나선 네 명의 후보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제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한 학기 내내 행복해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실제로는 아무런 부담 없이, 다시 말해 겁도 없이 '약자들의 용기와 단합'에 관해 나불거렸던 것이다.

투표 결과는 동혁이가 1등, 내가 2등. 내가 생각한 최상의 행복한 결과였지만 문제는 3, 4등 후보가 필요 이상의 표를 가져갔다는 점이었다. 그 결과 동혁이는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했고 나와 결선투표를 해야만 했다.

익명성만 보장된다면, 그리고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면 꽤 종종 약자들은 반역을 도모하곤 한다. 나 또한 머리에 앞서 골수로부터 그런 분위기를 감지했고 불길한 느낌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선투표를 앞두고 다시 한번 출마의 변을 요구받았고 1위 득표자인 동혁이는 자신만만하게 누가 되든지 학급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협조하자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그런데 나는 조금 전에 '용기 있는 다수 약자의 힘'을 역설했던 것을 뒤집고 이번엔 학급의 발전을 위해 '강한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간곡히 부르짖었다.

이렇게 말하면 모호하지만 그때 연설을 들은 모든 유권자들은 내가 그들에게 혹시 학기 내내 두드려 맞는 한이 있더라도 동혁이를 반장으로 뽑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음을 대략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약자는 자신을 위해 또 다른 약자를 희생물로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드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를 발휘하곤 한다. 투표 결과 동혁이는 1차 때보다도 두 표나 적은 표를 얻었고 나는 2/3에 가까운 열광적인 표를 얻어 반장에 당선되었다. 동혁이의 낯빛이 캄캄해졌고 나의 시야도 캄캄해졌다. 그리고 나의 일년은, 캄캄했다.

악연은 길다더니, 3학년 진급을 할 때에도 그 친구와 나는 같은 반으로 올라갔고, 심지어 고등학교마저도 같은 곳으로 배정되었다. 내가 반장을 맡았던 한 학기 내내 동혁이는 항상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긁어댔지만,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고 했던가. 다만 궁금했던 것은 그것이 무심코 던진 돌이었는지, 아니면 웃는 얼굴 속으로 들끓는 분노를 실어 던진 목적타였는지 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우연히 나와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동혁이가 가까웠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다른 한 친구를 사이에 두고 우연히 학교 뒷산에서 담배를 나눠 피우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 끝에 동혁이는 문득 물었다.

"너 중학교 이학년 때 나랑 반장선거에서 붙었던 거 생각 나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응? 아, 맞다. 너랑 나랑 중학교도 동창이었구나."

그 녀석이나, 나나, 더 이상 말은 없었다. 그래도 그 녀석이 그 해의 반장선거를 기억하는 이유는 서로 알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교복을 입은 채 쭈그려 앉아 '탈선의 경험'을 함께 하면서, 우리는 시선도 마주치지 않은 채 뭔가를 가슴으로 나누고 있었다. 기껏 삼사 년, 길지 않은 시간에도 잘나지도 못한 주제에 반장자리를 찬탈당한 못마땅함과 짓밟힌 약자의 앙심을 모두 삭이며 둘은 소리 없이 화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1.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안된다고 난리를 치는데도 기어이 학살극을 벌이는 미국이나, 국익 운운하며 한 손 거들려는 대통령 때문에 밥맛이 떨어져서 글을 자주 못쓰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국익을 변명삼아 나쁜 짓에 동참하고 나면, 왕따당하지 않기 위해 다른 친구 왕따시킨다는 아이들에게는 뭐라고 훈계한답니까?

2. 사투리 이야기에 나오는 진혁이만 지외하고, 제 글에 등장하는 모든 친구들 이름은 실제 이름과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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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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