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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우리, 밥 먹으러 가지 않을래?"
"은식아, 칠판이 보이지 않아서 그러는데, 조금만 옆으로 앉아줄래?"

대학 신입생 시절, 나는 괴상한 말투를 쓰는 녀석과 붙어다니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올라온 진혁이라는 친구였는데, 만화나 무슨 코미디프로그램 속 '바른생활맨' 같은 말투가 신기하다 못해 신선했다.

"리포트를 아직 쓰지 못해서 그러는데, 네 것좀 보여줄래?"
"음, 진혁아. 사실은 나도 아직 쓰지 않았단다. 미안하구나."

장난 삼아 따라하다가 그 말투는 내 입에도 붙어버렸고, 낯선 대형 교양강의실에라도 같이 앉아있자면 언뜻언뜻 수상한 말투를 주고받으며 붙어다니는 두 남학생에게 던져지는 신기한 눈빛들도 꽤 느껴졌다.

2.

대학 입학은 나에게 엄청나게 생소하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3센티미터가 넘게 길러도 되는 머리칼이나 몇 년만에 교복이 아닌 옷을 입고 등하교하는 것, 그리고 훤한 대낮에도 가끔은 거리를 배회할 자유시간이 주어졌다거나 여학생들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게 되었다는 것도 변화였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생소한 것이 있었다. 대학 신입생 시절 내 정신을 쑥 빼놓은 것은 무엇보다도 전국 각지의 사투리를 쓰는 학생들이 다 모여들어서 재잘대는 강의실의 산만한 공기였다.

TV 연속극의 적당히 정제된 연기자들의 것을 빼고는 처음 들어보는, 그야말로 원어민들의 발음으로 경험하는 원판의 사투리들은 얼핏 들리는 분위기만으로 의미를 파악할 수가 없을만큼 생소한 또하나의 언어였다.

부산에서 손잡고 올라온 두 녀석이 무얼 가지고 저리 박 터지게 싸우나 싶어서 찬찬히 들어보면 수업 끝나고 전자오락실에 갈 것인가 당구장에 갈 것인가 하는 정겨운 토론이었고, 강릉에서 온 녀석이 하도 험상궂게 뭐라고 욕을 하는 듯 하기에 다시 들어보니 노트 좀 빌려달라는 얘기였다. 턱턱 잘라 말하는 해남 출신 친구하고는 주눅이 들어서 같이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말씨는, 생각하는 방식까지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괜찮다 괜찮다, 별거 아이다' 하고 눈까지 깔면서 한심하다는 듯이 말하는 영남 친구들은 대범하고 통이 큰 것 같이 느껴졌고,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여'하며 따박따박 잘라 말하는 호남 친구들은 또 논리적이고 냉철한 것 같았다. 꼭 이북사람들 비슷한 말씨의 영동에서 온 친구들은 좀 거칠고 험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지금이야 거칠건 부드럽건 말씨 속에 들어앉은 생각과 성정이 들여다보이지만, 난생 처음 그런 억센 사투리를 경험한 그 때는 그랬었다.

선생님을 아버지로 둔 덕에 전학을 다섯 번이나 다녔지만, 초등학교 입학 전에 고향 충주를 떠난 이후로는 서울 언저리에서만 맴돌았기 때문에 나는 사투리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간혹 지방 어느 도시에서 전학 오는 친구를 만나기도 했지만, 말씨의 차이로 인한 충격과 스트레스는 그 친구의 것이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고 보니 내가 긴장 푼 상태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서울과 충북 말씨 쓰는 사람이 대략 삼분의 일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그 밖의 지방 출신이었다. 그나마 서울 왕래도 좀 있는 지방 대도시 출신은 몇 안되고, 태어나 처음 서울 구경한다는 어느 섬, 어느 산골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지하철 검표기의 승차권 투입구에 오백원 짜리 동전을 넣었다가 역무원이 기겁을 하게 만든 목포 앞바다 어느 섬 출신도 있었고, MT라도 가서 삼겹살을 구울 때면 죽창으로 멧돼지 잡아먹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강원도 어느 산골 출신도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언어 습관과 사고체계를 가진 아이들이 모인 강의실에서, 나는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도 항상 어느 만큼은 긴장하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역시 나야 누가 뭐래도 표준어를 쓰는 족속에 속했으니까, 스스로 사투리를 독하게 쓰던 친구들과는 고민의 깊이와 폭이 많이 달랐다. 그나마 배짱있는 놈들이야 또 달랐지만, 소심한 친구들에게 사투리문제는 일생일대의 문제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3.

그렇게 기억되는 친구가 바로 진혁이다. 대구도 작지 않은 도시인지라 스무해 남짓 스스로 충분히 넓은 땅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진혁이는, 대학 합격통지를 받고서야 '서울 가서 사투리 쓰면 촌놈 취급 받는다 아이가'는 선배들 말에 겁을 집어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성실하고 착하다는 칭찬이 떨어질 줄 모르는 친구. 그래서 뒤집어 생각해보면, 아마도 남들보다 손발 한 번 더 놀리는 것이 따돌림당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것이 생활신조였을 지도 모를 이 착한 친구. 서울로 올라왔던 수학여행 때를 빼고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대구를 벗어나본 적이 없었던 그 진혁이가 서울 유학이라는 일생일대의 도전을 앞두고 '촌놈'으로 찍혀 따돌림당하거나 무시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했던 마음을, 지금에야 이해하고도 남는다. 나와 붙어다니길 꽤 몇 달 지난 다음에야 털어놓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진혁이는 상경 전에 서울 유학 경험이 있는 동네 '형님'을 찾아가 '서울말 교습'을 받았다고 한다.

"일단, 우리 대구 아∼들은 뭐뭐 안한다, 뭐뭐 못한다. 그런 말 많이 쓰제? 이거 해라 카믄 '안한다' 카고, 이거 묵으라 카믄, 안묵는다 카고. 그제? 그런데 서울서는 '안'자가 앞에 붙으면, '아 일마 촌놈이구나' 하는기라."
"그람 우짜는데요?"
"'안한다'가 아니고 '하지 않는다', '안먹는다'가 아니고 '먹지 않는다'. 이래야지"
"아, 예"

"다른 단어들은 어떤게 사투리고 어떤게 표준말인지 다 알끼고, 요것만 조심하면 크게 촌놈 소리는 안듣는다. 아니 듣지 않는다. 아, 그리고, 우리 대구말씨가 기집애같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거덩. 그러니까 가급적이면 또박 또박 뿐질러서 발음해야 된다."
"아, 예. 행님."

다시 말하자면, '안', '못' 같은 접두어는 '않는다', '못한다' 같이 서술형으로 풀어서 말하고, 가급적 또박또박 끊어서 발음하려는 '촌놈 티 벗기' 노력이 바로 '바른생활맨 말투'의 정체였던 것이다.

4.

"진혁아. 그 형님 말도 맞긴 한데 말이야, 서울에서도 '안한다', '못한다' 같은 말 많이 쓴다."
"맞나?"
"그래. 물론 누가 뭘 시켰는데 하기 싫으면, 그냥 '안한다'고 그러지 말고 '싫어', 요렇게 말해야 더 자연스럽지."
"아, 그렇구나."

서울말 원어민에 비교적 가까웠을 나의 재교육을 받고서, 이번에는 예의 '바른생활말투'를 고치느라 말 한마디를 뱉을 때마다 눈알을 서너번씩은 굴려야 했던 진혁이. 그 친구는 객지생활 적응이 쉽지 않았던지 한 학기를 마치자마자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한 십년 지나 얼마전 다시 연락이 닿기 전까지는 나와의 인연도 더 이어지지 못했다.

대화란, 나와 다른 것이 결코 이상하거나 나쁜 것이 아님을 발견하고, 동시에 그 생소한 모양 속에서 친숙한 것을 찾아내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눈에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고, 겉모양만 가지고 판단하기 좋아하는 보통사람들에게 언제나 쉽지 않은 것이 대화이리라.

지난 늦가을에 결혼한 진혁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들이를 할테니 빠지지 말라는, 물론 둥글둥글한 대구말씨가 살아있는 선한 목소리. 그 목소리와 말씨를 느끼면서 생각했다. 이 친구는 스스로 좀 낮추더라도 묻어 살면서 맞추고 이해하며 살려는 둥글둥글한 마음만으로도 누구와든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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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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