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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세뱃돈이라도 받거나 해서 빳빳한 새 종이돈이 생겼을 때, 그냥 척척 접어서 지갑이나 주머니에 집어넣을 만큼 나는 대범한 축이 못되었다. 맡겨두면 그대로 보관했다가 언제든지 필요할 때 주겠노라는 엄마의 묵직한 압력성 유혹을 빗겨났다면, 그저 어떻게 하면 이놈을 이 말끔하고 빳빳한 모양 그대로 보관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대개는 성경책이나 사전 같은 큼직한 책갈피에 몰래 꽂아놓는 걸로 결론을 내곤 했었다.

ⓒ 김은식
그런데 그렇게 애지중지 포개놓은 것을 꺼내어 무언가를 사느라고 마음고생한 기억도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어쩌면 그중 꽤 여러번은 꽂아놓은 다음 영영 잊어버렸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엄마나, 눈치 빠른 다른 형제, 그도 아니면 어찌어찌 그 책을 물려받은 사촌동생이나 동네 누군가가 횡재를 했을 수도 있겠다.

대학시절, 변변한 아르바이트 한 번 못했던, 혹은 기껏 몇 푼 벌어봤자 소문도 없이 엉뚱한 데 들이붓던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용돈은 월 15만원이었다. 집이 시계 밖 신도시에 있었던 탓에 매일 왕복 차비가 최소한 이천원 정도 들었고, 나머지 돈으로 점심 한 끼 정도씩은 해결을 해야 했으니 아쉬운 것은 술값과 책값이었다. 그런데도 한 달 살고보면 몇십 권씩 책을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만큼 뜯어먹힌 선배들의 공로 외에도 내가 시간날 때마다 청계천 헌책방을 일삼아 헤집고 다닌 덕분이었다.

그것이 벌써 십여년 가까이 되어간다. 이래저래 용처에 따라 돈을 갈라둔 다음, 마음대로 써도 되는 한 이삼만원 '실탄'이 마련되면 나는 청계천으로 갔다. 우선 훑게 되는 쪽은 동평화시장이 있는 쪽 거리의 헌책방들이었는데, 이 쪽은 산더미처럼 책을 쌓아놓고 무조건 천 원에 골라가라는 식의 책방들이 많았다. 따라서 책방의 공간도 비교적 넓은 편이었는데, 영화나 드라마에 가끔 나오는 곳이 대개 이쪽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좀 괜찮은 책을 건지는 것은 큰 길 건너 평화시장 쪽이었다. 이쪽에는 책꽂이에 빼곡이 꽂힌 책 사이로 한 사람정도 드나들 통로만 만들어놓은 집이 대부분이었는데, 바닥에 엎어놓은 책이 없는 만큼 책의 질도 높았고, 그만큼 가격도 높았다. 흔히 주인과 가격흥정을 해야 했던 곳도, 그래서 주인아저씨와 되도록 안면을 트고 인사말이라도 주고받으려고 노력했던 곳도 바로 이쪽 길가였다.

그 어느날, 평화시장쪽 어느 헌책방에서 내가 무심코 집어든 책이 <영화에 대하여 알고싶은 두세가지 것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집어드는 순간까지만 해도 '사야겠다'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우선 나는 그때만 하더라도 영화라면 주말의 극장과, <킬링필드>나 <람보> 따위, 중고등학생시절 시험 끝난 날 몰려가서 보는 단체관람 반공영화뿐이었을 정도로 영화에 문외한일 뿐 아니라 무관심층이었고, 또한 책 상태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거의 새 책 상태에 가까운데다가 사진까지 꽤 많이 들어있던 이 책을 사려면 만만한 일이천원짜리 사회과학책 너댓 권은 포기해야만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을 집어들었던 것은, 물론 그런 사소한 손길에까지 그럴듯한 이유를 붙일 만큼 내가 치밀한 사람은 아니거니와, 아마도 이렇게 멀쩡한 책이 이곳 헌책더미까지 밀려나온 이유가 뭘까 하는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마침 그 며칠 전 어느 잡지에서 책광고를 본 기억이 떠올랐을 수도 있고, 아니면 강의실에서 누군가 그 책을 읽고있던 장면이 떠올랐을 수도 있다. 어쨌든 전혀 내 책이 될 것이라는 생각 없이 한 번 집어올려 펼쳐본 것뿐이었다. 그리고 첫장부터 대충 훑으며 책장을 주르르 넘겼었다.

그런데 그 때 정말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책 중간 쯤에서 '틱'하고 책장이 둔탁하게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고, 순간이었지만 그 사이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분명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이었다. 누군가 세뱃돈이라도 되는지, 곱게 모셔둔 것이 분명하게 책장만큼이나 꼿꼿이 서있는 만원짜리 지폐 한 장.

예상치 못한 순간에 사람은 오히려 민첩해진다더니, 나는 그 짧은 순간에 지폐의 종류와 상태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 페이지를 열지 않았다. 바로 어깨 넘어 고개를 기웃거리며 나름대로 책을 찾고 있는 다른 손님들도 서너명은 되었지만, 그 서너명의 행동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피고 있는 주인아저씨의 눈이 마음에 딱 걸렸다. 일반서점이면 모르되, 누가 그냥 한 권 들고 나가도 도저히 알 수 없는 부산한 헌책방인지라 주인아저씨도 긴장을 놓지 못하고 있던 것이리라.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목소리들이 웅웅거리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아저씨, 여기 만 원이 있네요'하고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어차피 주인아저씨 돈일 리도 없는데 냉큼 책값을 치르고는 들고 나갈 것인가. 그도 아니면 그냥 모른척 다시 얹어놓고 나가버릴 것인가. 돈 만원이 탐났지만, 또 지나치게 소심한 마음에 돈 만원이 들어있는 줄 다 알면서 사려고 했던 것이 들통나면 민망해서 어쩌나 하는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

어쨌건 길지 않은 고민 끝에, 나는 책을 주인에게 내밀었다.
"아저씨, 이 책 얼마예요?"

주인아저씨는 책을 넘겨받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리고 사이사이 내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헌책이란 딱 얼마라고 값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니다보니 이렇게 어느 만큼은 즉흥적으로 거래된다. 물론 대략적인 값이야 피차 알고 있다지만, 평소 삼천 원짜리로 통하는 책도 표지가 찢어져 있다면 오백 원이나 천 원쯤 깎을 수도 있고, 반대로 상태가 유별나게 좋으면 한 오백 원 붙여 받을 수도 있었다. 더구나 '꼭 사지 않아도 상관없는' 손님과 '꼭 사고싶어하는' 손님의 눈빛도 또 얼마간 값의 차이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이미 그 순간 나에게는 아저씨 입에서 불려나올 책값이 문제가 아니었다. 만일 아저씨가 책 상태를 자세히 따져보느라 새삼 책 속을 슬쩍이라도 훑어보려고 한다면, 그래서 아까 나처럼 주욱 책장을 넘겨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혹시 그러다가 그 만원짜리 한 장을 아저씨도 발견한다면, '에라 이 간사한 놈아'하는 눈빛이 날아올텐데. 그러면 민망해서 어째야 할까. 그냥 몰랐다는 듯이 돈은 빼고 책이나 달라고 해서 나와야 하나.

애초에 별 이유도 없이 내 손에 잡힐 만큼, 추레한 책더미 속에서 단연 눈에 띌 만큼 깔끔했던 책 상태. 게다가 모르긴 해도 적극적이다 못해 절박할 지경이었을 내 표정값을 얹어 주인아저씨는 넉넉한 값을 불렀다.
"오천…원은 줘야겠는데"
책 정가가 팔천원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아무리 상태가 좋다고 해도 헌책에 붙인 오천원은 좀 높은 값이었다.

물론 나는 두 말 없이 책값을 치르고 나왔다. 그리고 아저씨의 시야와, 그보다 한참 넓었을 내 마음 속 찜찜한 범위를 훌쩍 벗어나서야 책갈피를 다시 폈다. 그리고 역시 틀림없었던 그 파릇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지갑으로 고이 옮겨 넣었다.

덧붙이는 글 | 김은식 기자는

"솔직해지기 위해서, 모른 체 눈감고 살기를 좋아하는 제 머리와 싸운 흔적을 글로 남기고 있으며, 그렇게 쓴 글은 개인홈페이지 '솔직해지기 위한 투쟁'(www.kes.pe.kr)에 모으고 있습니다. 2002년 5월부터 11월까지 '맛있는 추억'을 연재해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에 선정되었으며, 그 글은 동명의 산문집으로 엮여지기도 했습니다. ("맛있는 추억", 자인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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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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