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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7일 타계한 고 이주일씨
ⓒ 연합뉴스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일단 한번 와보시라니깐요"
"콩나물 팍팍 무쳤냐?"

수많은 유행어를 남기며 지난 30년 동안 대한민국 사람들을 울리고 웃겼던 '코미디 황제' 이주일씨(본명 정주일, 이하 존칭 생략)가 지난 8월 27일 결국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세.

'황제'가 붕어(?)하시던 그 날, 한반도 남단의 '백성'은 울었다. 그리고 각 방송사가 중계차를 '황제'의 빈소에 연결하고 추모특집 프로그램을 앞다퉈 방영하는 가운데 전두환씨 등 전직 대통령과 대선 후보들까지 그의 빈소를 찾아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가 떠난 지 어느덧 일주일이 됐지만, 언론은 아직도 슬픔에 잠긴 채 그를 추모하느라 경황이 없다.

그런데 방송이나 신문에서 소개하는 내용이 천편일률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황제의 유훈(?)을 생산적으로 계승하기 위하여' 뭔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인물파일의 화두를 '이주일과 한국정치'로 잡아봤다. 이주일을 통해 한국정치의 웃기고 한심한 '자화상(自畵像)'을 그려보는 것이 보다 개선된 한국정치의 '청사진(靑寫眞)'을 구상하기 위한 '보약'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믿음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업의 주제를 '코미디 황제와 한국정치' 혹은 '코미디 황제를 웃긴 한국정치'라고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사실 여기서 '황제'의 인생 역정을 상세히 정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한 거의 모든 '백성'들의 추억 속에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시시콜콜한 것까지 자세하게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주제에 걸맞게 한국정치와의 인연을 중심으로 이주일의 인생을 되돌아보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이주일과 한국정치의 인연은 끈질기고도 운명적이다.

우선 '이주일의 사후(死後)'는 국민에게 철저히 불신과 외면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한국정치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비쳐주는 거울, 즉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고 있다.

보라! '코미디 황제'의 마지막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정부는 금연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 훈장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그에 대한 국민들의 극진하고도 진심 어린 '송별식'이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보면 역설적으로 이주일의 죽음은 '행복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보았다. '정치권 황제'들의 '불행한 죽음'을!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전 대통령은 독재와 하야와 망명 끝에 외국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아야 했다. '근대화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은 또 어떠한가. 궁정동 안가에서 미희(美姬)가 따라주는 시바스 리갈을 마시다 심복의 총격을 받고 술상에 머리를 박은 채 횡사하지 않았던가! 하나 같이 '아름답지 못한 죽음'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대통령이 타계했을 때 진심으로 슬퍼하고 그와의 아름다운 인연을 추억하며 기쁜 마음으로 송별할 수 있을까. 그것은 '죽은 이주일'이 '산 한국정치'에 남겨놓은 첫 번째 숙제이기도 하다.

'이주일의 생전(生前)' 역시 한국정치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주일은 19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정주영의 통일국민당 공천을 받아 경기도 구리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예끼, 여보시오들! 당신들 그렇게 코미디 같은 정치 계속할 거요? 그런 정치라면 나라도 하겠다." 이주일의 출마 선언은 어찌 보면 그런 민심의 속내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유권자들이 '바보 연기'로 자신들을 웃겼던 이주일을 여의도로 보내는 '웃기는 선택'을 한 것은 어찌 보면 직업 정치인들의 자업자득이자 그들에게 보내는 국민의 '경고장'인 셈이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못했고, 정신을 차리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4년 뒤 '코미디 황제'로부터 '부끄러운 선물'을 받았다. 1996년 이주일이 정치권을 떠나며 다음과 같은 촌철살인의 '명언'을 남긴 것이다.

"정치인 여러분, 4년 동안 코미디 공부 잘 하고 갑니다."

그것은 한국정치를 향한 일대 야유와 조롱이었다. 그리고 '코미디언 출신' 이주일 의원의 그 '매서운 독설'은 '정치 깡패' 김두한 의원의 '화끈한 액션'과 더불어 한국정치사의 '전설적 해프닝'으로 아직도 길이 기억되고 있다.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시끄럽던 1966년 9월 22일 김두한은 정일권과 장기영 등 당시 국무위원들에게 똥물(언론은 '오물'이라고 보도)을 뒤집어씌웠지만, 정작 그 똥물 세례를 받아야 할 장본인들은 따로 있었다.

밀수사건을 암묵적으로 모의하고 인정했던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경제정의를 유린한 이 엄청난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기에 바빴던 홍진기 <중앙일보> 사장(이병철의 사돈)이 바로 그들이었음은 물론이다(그나마 이러한 사실조차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의 회고록을 통해서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그날 회의을 주관했던 국회의장이 이효상이었다는 사실도 매우 운명적이다. 그 이유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이주일과 한국정치의 인연을 말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이와 관련 1980년 당시 시중에 떠돌던 유명한 우스개 소리가 있다. 술자리에서 대통령을 욕하다 걸리기만 해도 '유언비어 유포죄'로 전과자가 되던 시절에, 사람들은 은밀하게 '이주일과 전두환의 7가지 닮은 점'에 대해 얘기하며 낄낄댔다. 그 7가지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데뷔 시기가 같다(1980년 벽두에 연예계와 정치권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2) 대머리다(설명이 달리 필요 없다).
(3) 축구를 좋아한다(이주일은 춘천고 공격수, 전두환은 육사 골키퍼 출신이다).
(4) TV에 자주 나온다(이주일은 혼자 나오지만 전두환은 마누라하고 같이 나온다).
(5) 푸른 집에 산다(전두환은 청와대에 살고 이주일은 밤무대 '초원의 집'에 나간다).
(6) 웃긴다(이주일은 밤에만 웃기는데 전두환은 밤낮을 안 가리고 웃긴다).
(7) 매일 "뭔가 보여주겠다"면서 정작 아무 것도 보여 주지 못한다.


▲ 지난 7월 1일 국군수도병원에서 열린 서해교전 희생자 영결식에 참석한 전두환 전대통령.
ⓒ 오마이뉴스 권우성
독재정권의 정보기관원들이 국민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던 시절에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이주일과 전두환의 닮은 점'을 말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리고 절대권력의 위선과 권위를 한순간에 해체시켜 버리는 이 우스개 소리의 '단골 메뉴'로 등장한 것이 바로 코미디언 이주일이었다. 이와 관련 당시에 유행하던 또 하나의 우스개 소리가 있다.

전두환 대통령이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있었다는 설화 같은 이야기다.

미국에 도착하자 공항에서 한 교민이 달려오더니 전두환에게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권력을 잡기 위해 수백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원죄 때문에 정통성이 없었던 전두환은 내심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악수를 청한 교민이 고개를 들어 전두환의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실망스런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어, 이주일이 아니잖아."

절대권력은 국민들의 '은밀한 웃음'까지 못마땅했던 것일까. 15년 무명의 설움을 끝내고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이주일은 6개월만에 방송가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배삼룡, 나훈아 등과 함께 '저질 연예인'으로 찍혀 강제로 방송출연을 금지 당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1950년대 매카시 광풍이 불던 시절에 미국 영화계에서 쫓겨난 찰리 채플린을 연상케 한다.

그나마 이주일은 이듬해 다시 방송가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밤무대의 황제로 군림하면서 부와 명예를 얻었다. 당시 이주일은 밤무대에서 자신의 방송출연 금지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해학 넘치는 해명'을 한 바 있다.

"제가 방송출연이 금지된 것은 다 중계방송을 잘못해서 그런 겁니다. 연 날리기 대회가 있었는데 나는 이렇게 중계방송을 했습니다. '네 많은 연들이 날고 있습니다. 휘황찬란한 연들입니다. 한 년, 두 년, 세 년, 참으로 많은 년들입니다. 온갖 잡년들이 다 모였습니다. 턱 나온 년도 있고, 까진 년놈도 있습니다.'"

여기서 "턱 나온 년"과 "까진 년놈"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참고로 당시 국민들은 그게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코미디 황제'라고 해서 이주일이 정치를 소재로 한 코미디를 맘껏 선보였던 것은 아니다. 대통령을 소재로 '마음놓고' 코미디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나 가능했다.

이와 관련 이주일은 생전에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한국의 밥 호프'가 되고 싶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밥 호프는 정치와 섹스를 코미디 소재로 삼으며 인기를 누렸던 영국 출신 희극배우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크로즈비와 콤비가 되어 명성을 날렸으며 나이 70이 넘어서도 무대에 선 것으로 유명하다.

"정치와 섹스 이야기야말로 가장 짜릿한 코미디 소재"라고 확신했던 이주일이 그런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코미디언으로서의 철저한 직업정신을 보여줬던 에피소드가 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게 만드는' 그 일화는 이주일이 그저 단순하게 웃기기만 했던 코미디언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주일은 1991년 교통사고로 외동아들을 잃었다. 장례를 치르고 사흘 후인 그해 11월 30일 그는 한 방송국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은퇴선언을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마이크를 잡자마자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들에게 깊은 사과의 말씀 하나 드리겠습니다."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침묵을 깨고 이주일이 말했다.
"그 동안 김영삼씨와 박철언씨의 관계 개선을 해내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당시 김영삼과 박철언이 권력다툼을 벌이던 6공화국 말기의 정국을 겨냥한 '정치 코미디'였다.

그렇다면 정치인으로서 이주일의 의정활동 성적은 어땠을까. 그는 <신동아> 2002년 1월호에 실린 육성철 기자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솔직히 고백한 바 있다.

"나는 정치인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서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많은 정치인들은 나를 코미디언으로만 대했다. 정책을 연구하기보다 정치인들의 상가집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 더 많았다. 그들이 그것을 원했다.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도 정치라는 생각이 들어 그 자리를 열심히 지켰다."

지금까지 이주일의 코미디 인생을 한국정치와의 인연이라는 틀을 가지고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필자는 다음과 같은 명제로 잠정적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코미디 황제' 이주일은 30년 동안 대한민국 사람들을 울리고 웃겼다. 그리고 그 '코미디 황제'를 울리고 웃긴 장본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정치다.

'코미디 황제'에게 4년 동안 '코미디 과외공부'까지 시켜준 한국정치, '코미디 황제'보다 더 화끈하고, 더 오랫동안 국민들을 울리고 웃겼던 한국정치. 그런 점에서 한국정치가 지난 50년 동안 선보였던 '코미디보다 더 웃긴 걸작 시리즈 10선'을 뽑아보는 것도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1) 이승만과 대통령과 '울보장관'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자유당 시절 국무회의를 주관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실수로 방귀를 뀌자 한 눈치 빠른 장관이 했던 말이다. 문제는 그렇게 아부를 잘 하는 사람들이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승만 정권에서 한때 요직을 차지했지만 그에게 쓴소리를 했다가 미움을 받고 야당으로 발길을 돌린 신익희, 조병옥 등은 각종 '정치공작'과 '테러행위'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반면에 이승만의 총애를 받은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승만 앞에만 가면 눈물부터 흘려 '울보장관'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렇게 눈물을 잘 흘렸던 신성모가 거창양민학살사건과 백범김구암살사건 등 무시무시한 범죄행위를 저지른 의혹의 책임자로 지목 받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2) 기상천외한 '반올림' 개헌

1954년 11월 27일.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철폐하자는 자유당의 헌법개정안이 국회에서 표결에 부쳐졌다. 투표 결과 재적 203명 중 가(可) 135표, 부(不) 60표, 기권 7표가 나왔다.

개헌을 위한 의결정족수는 136표. 1표가 부족해 개헌안은 부결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이틀 후 자유당은 기상천외한 주장을 들고 나와 부결 선언을 번복하고 개헌안 가결을 선포했다.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명인데, 소수점 이하의 숫자는 1인의 인간이 될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반올림)하면 203명의 3분의 2는 135명이 된다. 그러므로 개헌안은 가결된 것이다."

당시 그런 엉뚱한 '수학 논리'를 제공한 당사자들이 다름 아닌 서울대 수학과 교수들이라는 소문이 떠돌면서 국민들은 더욱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3) 테러에 대한 새로운 개념

1955년 9월 14일 오후 4시 25분. <대구매일신문>이 곤봉과 해머로 무장한 20여 명의 극우단체 청년들의 습격을 받았다. 신문사에 난입한 그들은 닥치는 대로 기물을 때려부수고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는 한편 이를 제지하는 신문사 간부를 곤봉으로 내리쳐 얼굴을 피범벅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승만 정권의 경찰은 벌건 대낮에 도심에서 펼쳐진 이 야만적인 테러사건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놀라지 마시라! 이 사건으로 먼저 구속된 것은 엉뚱하게도 신문사 주필이었다. 그리고 경찰 간부는 이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들에게 이런 명언(?)을 남겼다.

"백주(白晝)에 행해진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

(4) 4·19혁명 배후에는 김일성이 있다?

4·19혁명 당시 실제로 있었지만 지금까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이다. 부정선거에 반대하며 데모를 벌이던 학생들이 경찰에게 학살되자 국민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권은 이를 만회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꼼수'를 썼다.

우선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학생의 호주머니에 '이승만을 죽여라'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쓴 삐라를 집어넣었다. 신문은 이를 검증 없이 보도해 학생시위에 북한이 개입한 것처럼 여론을 호도했다. 경찰은 사람을 매수해서 데모 학생들이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는 거짓 증언을 하도록 조작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데모대가 파출소에 던진 돌이 북한에서 가져온 돌이라는 '기발한 의견'을 보고서로 제출하기까지 했다.

이 '믿어지지 않지만 사실로 밝혀진 이야기'는 <월간조선> 1983년 4월호 297쪽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5) 친일은 3대가 흥하고, 항일은 3대가 망한다

▲ 박정희 전 대통령
대한민국 제헌의회가 출범하자마자 '반민특위'를 구성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것이 친일반민족 행위자를 역사의 법정에 세우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 위한 조치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승만과 그가 비호하던 친일세력의 강력한 태클에 걸려 반민특위는 깨지고 만다. 특히 반민특위의 수배를 받고 있던 친일파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면서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끊기기는커녕 더욱 악화되었다. 우선 다카키 마사오(古木正雄)로 창씨개명을 했던 대통령 자신이 독립군을 사냥하던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 그런 출신성분을 가진 박정희의 비호 속에서 일제시대 조선사편수회에서 한국사를 왜곡하던 장본인이 문교부장관과 국사편찬위원장이 되고(이병도, 신석호), 친일인사들이 독립유공자가 되거나 그 심사위원이 되었다(조연현, 모윤숙, 유진오).

이로써 "친일(親日)을 하면 3대가 흥하고, 항일(抗日)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블랙 코미디' 같은 이야기가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현실로 굳어지게 됐다. 최근 한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부친이 조선총독부 검사국 서기 겸 통역생으로 부역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친일논란에 휩싸인 것도 이런 '유구한 전통'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6) 지역감정 조장하니 출세가도 달리네

1963년 대선과 1971년 대선에서 잇따라 '망국적 지역감정'을 조장한 인물이 있다. 앞에서 소개했던 김두한 의원의 똥물세례사건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이효상이 바로 그 장본인이다. 양대 선거에서 그가 했던 발언 요지를 보면 각각 다음과 같다.

"대구는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지만 임금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고장 출신의 박정희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 임금님으로 모시자."(1963년) "호남에서는 이번 선거에 야당을 뽑을 것이므로 영남에서는 몽땅 여당을 뽑아야 한다."(1971년)

더욱 가관인 것은 이 발언 이후 도리어 이효상이 출세가도를 달렸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1963년 선거 당시 교육자 출신이던 그는 입당한 지 얼마 안 되던 무명의 정치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얼마 후 국회의장에 오르는 등 박정희 정권 하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이념'으로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된 것도 모자라 또다시 '감정'으로 동서를 반 토막 낸 공적(?)을 높이 평가받은 것이다.

(7) 김 기자, 장군님의 뒤통수를 때리다

1980년 전두환 장군이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틀어쥐기 시작하자 수많은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들이 그에게 줄을 서기 시작했다. 당시 <경향신문> 기자였던 김길홍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4회에 걸쳐 '새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 시리즈'를 연재했는데, 이 '신판 용비어천가'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위 상임위원장의 고향은 물의 흐름과는 달리 남에서 북으로 역곡하는 지세의 한복판이라 해서 예로부터 큰 인물이 난다고 전해오고 있다…30년간 땀이 밴 정든 영예의 군복을 벗고 이제 용약 구국의 최전선에 뛰어들었다…정의감에 투철한 이념집단과 새시대 주도세력의 뒷받침을 받고 있으며 또 스스로 청렴결백한 천성을 지녔다."

그 기사 덕분이었을까. 김길홍 기자는 1982년 청와대 언론담당 2급 비서관, 2년 후엔 1급 비서관이 된다. '장군님의 은총'에 힘입어 그는 이후 전국구와 지역구 국회의원(민정당)에 당선되는 등 정계에서 승승장구한다.

그러다가 1990년 민정, 민주, 공화 3당합당에 동참하면서 김영삼의 신한국당에까지 몸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날이 왔다. 1995년 말 김영삼이 전두환을 법정에 세우기 위해 신한국당 의원들에게 5·18특별법을 의원입법으로 제정하도록 지시한다. 물론 김길홍 의원도 이 법안에 서명한다.

그로써 '장군님이 손을 봐야 할' 배은망덕한 인물은 하나 더 늘어났다.

(8) 누가 '맹구'고 누가 '영구'인가?

▲ 지난 3월 19일 자택에서 박근혜 의원을 만나 파안대소하고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
ⓒ 오마이뉴스 이종호
김영삼 전 대통령은 4년을 사이에 두고 한 인물에 대해 극단적인 평가를 한 적이 있다. 전두환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부산에서 잇따라 총선에 출마한 허삼수 후보에 대한 평가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마치 냉탕과 열탕을, 지옥과 천당을, 악마와 천사를 아무런 고민도 없이 하나로 보는 것과 같았다.

우선 그는 1988년 총선 당시 민정당 후보로 출마한 허삼수를 가리켜 "광주학살과 5공비리 등을 저지른 부정적 인물이니 절대 찍어서는 안 된다"고 부산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그 덕분이었을까. 고졸 학력이 전부인 무명의 인권변호사 노무현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노무현이 김영삼의 '3당야합'에 동참하지 않자 1992년 총선에선 전혀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노무현과 맞선 민자당 후보인 허삼수를 가리키며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해온 훌륭한 분이니 꼭 찍어달라"고 호소했던 것이다.

더욱 웃기는 것은 4년 전과 전혀 상반된 주장에도 불구하고 부산 시민들이 이번에는 허삼수를 당선시켰다는 사실이다. 그 정치인에 그 유권자라고나 할까. 아니면 '영구'와 '맹구'가 '봉숭아학당'에서 조우한 것으로 봐야 할까. 한국정치의 적나라한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놀라운 궁합(宮合)의 현장이 아닐 수 없었다.

(9) '준비된 대통령'인가 '멍청한 대통령'인가

▲ 2001년 2월 19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
ⓒ 오마이뉴스 이종호
김대중 대통령은 색깔논쟁과 지역감정의 덫에 걸려 세 번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진 불운한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1997년 그는 정권교체를 염원하는 민심에 힘입어 마침내 3전4기에 성공한다.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역대 정권의 잘못을 '반면교사'로 삼아 그들과 정반대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것도 물론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대선 직전에 가신(家臣)들이 임명직 공직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김대중은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상대적 장점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김영삼 정권의 전철을 밟지만 않아도 성공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세간의 전망도 있었다. 더욱이 본인 스스로 '준비된 대통령'임을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임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현재 김대중 정권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물론 남북문제나 경제문제에서 그가 상대적 우위를 보인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국정농단으로 무너진 김영삼 정권을 반면교사로 삼겠다던 그가 두 아들의 비리로 도덕적 권위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정말이지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철이도 해 먹더니, 홍삼트리오는 또 뭔고."

지난 40년 동안 양김(兩金)과 함께 울고 웃던 국민들은 고소(苦笑)를 금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허탈한 웃음'이었다.

(10) 한나라당이 발간한 <2002년판 버전 홍길동전>?

▲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 부자.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현재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인 이회창 후보를 둘러싼 각종 논란도 '초절정 하이 코미디'의 진수라 아니할 수 없다.

이회창이 누구인가? 대법관, 선관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 등 고관대작으로 활약하던 시절 엄격한 '법치주의'와 '원칙주의'를 주장하며 대통령의 권위에까지 도전함으로써 '대쪽'으로 불렸던 인물이 아닌가. 그러나 최근 속속 드러나고 있는 두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은 그가 평소 주장했던 '법치주의'를 무색하게 만들고도 남는다.

이회창이 대통령과 정당 총재들을 향해 작은 오류와 실수라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맞장을 뜨면서 국민들로부터 "오빠 멋있어"라는 칭송을 받던 바로 그 무렵, 그의 두 아들은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56가지의 의혹을 양산해내며 병역을 면제받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특히 '이회창 후보의 장남' 이정연이 보유한 키 179cm와 몸무게 45kg의 '환상적 조합'이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록은 과거 세계 코미디계를 석권했던 '홀쭉이와 뚱뚱이'를 연상케 한다.

더욱이 한나라당이 방송국에 공문을 보내 이정연이라는 이름 앞에 '이회창 후보의 장남'이라는 관형어를 넣지 말라고 압력을 행사한 것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홍길동군을 생각나게 한다.

따라서 한나라당이 야심차게 발간한 <2002년판 버전 홍길동전>(?)은 한국정치가 마침내 이룩해낸 코미디의 정수이자 압권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금까지 '코미디보다 더 웃긴 한국정치 걸작시리즈 10선'을 살펴봤거니와,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물론 "웃으면 복이 온다." 그러나 한국정치가 선사한 웃음이 주로 '불쾌한 웃음'이었고 '저질 코미디'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코미디언 이주일의 타계를 계기로 한국정치가 보다 양질의 웃음, 생산적 웃음, 행복한 웃음을 국민에게 선사하기 위해 배전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마지막으로 이주일 선생의 명복을 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필자가 지난 8월 30일 CBS '변상욱의 시사터치'에 출연해서 방송했던 '정지환의 인물파일'을 정리한 것입니다. 방송내용은 CBS 인터넷 홈페이지 AOD에서 다시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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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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