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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펀한 싸움이 붙는 흥정에는 손톱만큼의 미움도 없다.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새록새록 돋아나는 정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 김해등
새벽빛을 헤치며 오일장이 서는 마량(馬良)을 향해 가고 있다. 굽이굽이 산길인지, 바닷길인지 모를 길을 따라 가노라면 점점이 노란 불들이 차창을 스쳐간다. 아직도 바다는 새벽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지 산너머에서 시작되는 빛은 얼굴을 내밀지 못하고 있다.

어스름이 깨어나지 않는 마량 가는 길은 참으로 아름답다. 차창 밖으로는 바닷물결이 싸르락거리며 몸을 굴리는 소리는 실루엣처럼 흐르고, 어쩌다 창문을 열어놓으면 해초잎 익어가는 냄새가 물씬 풍겨 온다.

광주에서 강진까지 버스로 한 시간 반, 강진에서 바닷길을 따라 마량까지 가는 시간만도 삼십 분이나 걸린다. 지형이 말의 형국을 닮은 데서 유래한 마량이라는 마을이 실제로는 임진왜란 당시 뱃길로 제주말을 실고 와서 이곳에서 살찌워 한양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새벽 다섯 시,
포구가 아름드리 감싸안고 있는 듯한 마량 장터는 아직도 어스름의 옷을 벗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선잠에서 깨어 뒤척이고 있을 시간인데 장터는 벌써부터 비릿한 땀방울로 젖어가고 있다. 어느 오일장터를 가보아도 지금 이 시간은 수런거리는 시간일텐데 유독 마량 장터는 바닷가와 바로 접해 있는 장터라 그런지 훨씬 일찍부터 술렁거리고 있는 것 같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장터 가옥들은 백열등 불빛을 환하게 내걸고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며 갯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섣부른 봄마중 하느라 옷단도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얇은 옷 속으로 스며드는 한기는 온 몸을 으슬으슬 떨게 한다.

▲ 햇살 졸리는 파장에 떨이하지 못한 생선을 앞에 두고 비린내 묻은 지폐를 꽃잎 따서 접듯 세고 있는 할머니의 표정이 안쓰럽다. ⓒ 김해등
벌써부터 장터 사람들은 설렁설렁 짐을 펼쳐 놓고 하나 둘 선술집에 모여들기 시작한다. 간밤의 안부를 묻기도 전에 막걸리 잔이 먼저 돌아가고 혀 시린 술잔에 찡그리는 얼굴을 보고 하루의 장사 운을 서로서로 점을 쳐주고 있다. 저마다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아마도 장사를 시작하기 전의 신성한 마음을 가다듬기라도 하듯이 모두다 묵묵히 술잔만 비워내고 있다. 한 낮에 거나한 술판으로 나뒹굴 것을 염려해 마수걸이를 아주 점잖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밥 부치고 사는 곳이 장터인 사람들은 새벽의 싸늘한 한기를 마땅히 데울 곳이 없다. 단지 서로 군데군데 모여서 장작불 지펴 놓고 타오르는 불씨에 몸을 눅히는 일 뿐이다. 불빛의 흔들림 속에 고단한 일상을 묻어두고 솟아오르는 불꽃처럼 희망이 피어오르기를 바라면서 서로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을 뿐이다.

날이 밝아온다.
막 바다에서 올라온 빛살이 거뭇거뭇한 어스름을 벗겨내고 있다. 마량의 오일장은 바다가 열어주고 바다가 거두어 간다.

어느 오일장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가장 먼저 어물이 전을 펼친다. 특히 마량장은 바다를 끼고 열리는 장터이기에 어느 장터보다도 어물이 풍성하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물 좋은 고기를 선보이려고 섬 아낙들이 우르르 담박질을 하고 있다. 바닷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싱싱한 고기들이 퍼덕거리고 있다. 망둥어, 전어, 갯장어, 우럭, 문어, 꽃게, 간재미, 물메기, 돔 등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어물이 다양하다.

마량은 인근 도서를 끼고 있기 때문에 약산도나 고금도의 어부들이 어물을 많이 팔러 나온다. 통발로 잡은 고기들을 살려 놓았다가 가져오기 때문에 무척 싱싱하다. 바닷바람에 살이 터질 정도로 고생을 하며 잡은 고기들이라 더러는 손님들과 가격 실랑이로 걸판지게 싸움도 하지만 이런 것이 새벽 어물전에 나오는 참 맛이 아니겠는가.

▲ 대장간이 사라진 대신 톱날을 슬고 있는 아저씨의 손끝이 시리기만 하다. ⓒ 김해등
마량 인근에 개펄이 많이 있다. 그 개펄에서 나오는 낙지와 반지락이 일품이다. 작은 세발 낙지도 있고 통발에나 들어 잡을 수 있는 큰 낙지들도 있다. 반지락은 어느 고장의 것 보다 진한 국물을 우려내므로 인기가 아주 높다. 파래나 감태, 미역 같은 해산물도 주요 특산물에 속한다.

특히 인상 깊은 점은 어물전에 막 들어서면 생굴 향기가 무척이나 향기롭다. 물론 양식굴도 있겠지만 바위에 도란도란 달라붙어 있는 자연산 석화(굴)를 쪼아와서 양푼에 풀어놓으면 그 향기가 그렇게 향기로울 수가 없다. 시큼한 초와 고춧가루를 버무려 놓으면 아침밥 서너 공기를 뚝딱 해치울 정도로 입맛을 돋구고도 남을 것이다.

장터에는 장꾼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나이가 많은 분들은 20년에서 30년 이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물론 사는 것이 힘들어서 여태 장터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집안 살림이 넉넉하고 자식들도 훌륭히 키웠는데도 무작정 장터가 좋아서 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분들은 장터에서 잔뼈가 굵고 발이 부르트도록 장터를 돌아다녔기에 장터가 없는 생활은 상상도 못하는 것이다. 정으로 얽히고 설킨 삶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점심때가 되자 여기저기서 밥 한 숟갈 하라고 소매를 끌어당긴다. 찬합의 식은 밥이지만 된장에 배추쌈 한 볼때기 하면 입안에 단내가 절로 생겨난다. 아마도 넘치는 정을 한 볼때기 하여 마음속에서 단내가 넘쳐 나는 것일 것이다. 어느 누가 손가락질 하건 말건 먼지 나는 땅 바닥에서 먹는 밥이 이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다.

나른한 햇살이 장터에 쏟아지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펼쳐 놓은 전에 자는 사람이 늘어난다. 이쯤이면 장터 구경 삼아 돌아 다녀볼 시간인데 그리 구경할만한 풍경들이 없다. 옛날 아버지 손을 잡고 장 구경 나왔던 그 재미있었던 풍경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말았다.

▲ 꼬막이며 반지락, 그리고 석화(굴)를 손님이 달라기도 전에 비닐봉지에 무작정 싸는 할머니의 옹색한 표정이 발길을 차마 떼지 못하게 한다. ⓒ 김해등


'꽝'하는 굉음과 함께 터지는 튀밥기계 앞에는 '개점휴업'인 듯 주인은 꾸벅꾸벅 졸고, 달콤한 인스턴트 식품에 길들여진 꼬마들은 더 이상 튀밥기계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귀 틀어막고 사방으로 튀는 흰쌀 튀밥을 주어 먹지 않는다.

붉은 쇳물이 튀기고 쇠 담금질하는 망치질 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대장간이 있던 자리에는 대량생산으로 똑같은 모양으로 쏟아져 나온 연장들만이 일렬 횡대로 줄을 서 있을 뿐이다. 대장장이의 근육과 삶을 빼어 닮은 연장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오일장의 얼굴이 바뀌어가고 있는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들의 마음의 고향 오일장의 서정은 하나 둘 변해가고 있었다.

오후 세 시가 넘어서자 장터는 힘이 빠지고 축 늘어지고 있다. 바리바리 싸들고 온 물건들을 떨이하지 못한 장꾼들은 몇 푼 안 되는 구겨진 지폐를 꽃잎 펼치듯 펴가며 옹색한 눈빛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다.

그나마 한산하게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길이 약속이라도 한 듯 뚝 끊기고 나면 장터에 남아 있는 것은 팔다 남은 뼈시린 물건들과, 그 물건을 품고 있는 장꾼들, 그리고 그 사이를 휘도는 바람뿐이다. 이제 고이 펼쳐 놓았던 희망을 싸들고 다시 떠나왔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기분이 좋든 싫든 새벽에 시작했던 쓴 술 한 잔 다시 들이키고 한 사람 두 사람 다시 떠나가야 한다.

사람들이 모두다 빠져 나가버린 장터에서 남아 있는 발자국만 바람이 핥고 지나가고 있다. 그 바람은 바다를 돌고 돌다 5일 뒤에 또 다시 이 장터를 찾을 것이다. 장꾼들이 정이 넘친 마량장을 다시 찾아오는 것처럼 바람도, 바다도 장터 사람들을 잊지 못해 다시 찾아올 것이다. 양철 지붕 위에 누운 햇살만이 시리도록 차가운 오후다.

덧붙이는 글 | 여행 쪽지

마량장은 오일마다 한 번씩 서는데 3일과 8일에 해당하는 날에 장이 선다. 강진에서 마량가는 시간은 자동차로 삼십여 분 걸린다. 리아시스식 해변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한 편의 풍경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중간 중간에 오리떼처럼 잠방거리고 있는 조그만 섬들을 구경하는 것도 큰 재미이다. 가우도, 죽도, 비라도, 그리고 마량포구 앞에 잡힐 듯이 서 있는 두 개의 섬 가막섬은 마량의 제 일로 치는 풍경이다.

마량은 바다낚시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방파제에서 낚시하는 사람도 많고, 인근 섬들로 향하는 낚시꾼의 행렬들이 이어진다. 특히 수협 위판장이 있어 싱싱한 횟감이나 해산물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가 있고 인근 횟집에서 전라도 개펄맛이 우러난 차진 회를 먹을 수 있다. 구하기 힘든 자연산이 대부분인지라 연일 관광객이 끊이질 않는다.

장터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600년 동안의 단절을 딛고 재현에 성공한 고려청자 박물관과 도요지를 구경하는 것도 또 다른 여행의 진미를 맛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흙, 불, 인간의 조화로 인해 만들어진 천상의 조형물인 고려청자의 신비로움 속으로 흠뻑 빠져들고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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