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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도 6살 경하의 집을 찾아주지 않았다

[TV 리뷰]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3.08.25 16:50최종업데이트23.08.25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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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우는 놀라운 성장 신화를 이뤄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성공과 성장이라는 명분에 가려진 여러 가지 어두운 명암들도 공존한다. 인권침해가 만연하던 그 시절, 당시 한국 정부와 입양기관들이 친부모가 살아있는 아이를 호적상 고아로 조작해 해외로 입양을 보내는 사실상의 '국가적 인신매매'를 자행-묵인한 것도 그중 하나다.
 
1950년대 이후 지난 60여 년간 해외로 입양된 아동은 약 16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들 중 부모가 있는데도 고아로 조작되어 강제로 입양된 아이들의 규모는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2023년 현재도 해외입양을 담당하는 국내 입양기관들은 여전히 수수료로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여기 '나쁜 어른들'의 손에 아이를 빼앗기고 44년간이나 생이별을 해야 했던 한 가족의 가슴 아픈 실화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갑자기 사라진 아이... 그 뒤 44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8월 24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92회에서는 '미씽, 사라진 소녀와 꽃신'편을 통하여 한 가족의 비극을 불러온 강제 해외 입양의 어두운 그림자를 조명했다.
 
1975년 5월, 충청북도 청주에서 거주하던 신중호-한태순씨 부부는 삼남매를 키우고 있었고 장녀인 신경하양은 당시 6살이었다. 유난히 꽃신을 좋아했던 경하양은 엄마를 졸라서 선물받은 꽃신을 항상 아껴 신으며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어느날 태순씨가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장을 보고 돌아왔는데, 혼자 남아 친구들과 놀고 있던 경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태순씨는 처음엔 경하가 인근에 있던 할머니 댁에 간 줄 알고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어 삼촌으로부터 경하가 할머니 댁에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태순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비로소 경하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가족들은 경찰에 신고하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아이를 찾았다.
 
하지만 경하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경찰서에서는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고, 태순씨는 갑갑한 마음에 용하다는 점쟁이까지 찾아가보기도 했지만 "없는 자식인셈 쳐라. 한 16년을 지나야 찾을 수 있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만 돌아왔다. 상심에 빠진 태순씨 가족의 일상은 한순간에 엉망이 됐다.
 
태순씨는 남은 두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일단 마음을 다잡기로 결심했다. 태순씨는 미용기술을 배워서 미용실을 오픈했고, 거울 한편에는 경하 사진을 붙여놨다. 가끔 손님들이 누구냐 물으면, "6살 때 잃어버린 딸아이"라고 설명하며 혹시라도 비슷한 애를 보면 꼭 연락을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1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경하가 살아있다면 어엿한 10대 후반의 청소년이 되었을 나이였다. 여전히 태순씨는 혹시 경하일지도 모른다는 연락을 받을 때마다 어디든 달려갔지만 경하의 행적은 묘연했다. 태순씨는 실종 전단지를 만들고 어린 시절 기억하고 있던 경하의 신체 특징을 꼼꼼하게 적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신문 광고와 전단지 등을 통하여 '미아 찾기 범국민 캠페인'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거기에 경하의 얼굴도 포함됐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부산의 한 고아원에 경하양과 나이,얼굴, 이름까지 모두 비슷한 인물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경하가 실종된 지 15년 만에 들어온 가장 구체적인 제보였다. 태순씨는 곧장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혹시 경하일지도 모르는 '신모양'이라는 인물의 행적을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연락이 닿았다.
 
태순씨는 한 사무실에서 21살의 젊은 처녀 한 명을 만났다. 태순씨가 아빠의 직업이 무엇인지 기억나느냐고 묻자, 처녀는 조심스럽게 "택시 운전... 엄마, 나 경하 맞아요"라고 답했다. 이에 태순씨는 "찾았다. 내 딸 경하야!"라고 소리치며 처녀를 끌어안았다. 무려 15년 만에 극적으로 딸을 찾은 기적같은 소식은 당시 신문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화제를 모았다.
 
태순씨는 경하를 집으로 데려왔다. 태순씨와 가족들은 지난 15년의 못다한 한을 풀듯 경하를 아끼며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경하가 태순씨 가족과 재회한 지 약 3년이 흘렀다. 하지만 경하는 집에 좀처럼 마음을 붙지지 못하고 연락도 없이 부산으로 내려가기 일쑤였다. 걱정이 된 태순씨는 "집이 불편하니?"라고 물어봤다. 그러자 경하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엄마 미안한데, 나는 엄마가 찾는 경하가 아니에요." 15년 만에 찾았다고 믿었던 경하는 사실 진짜가 아니었다. 가짜 경하는 "죄송해요. 엄마를 보는 순간 저 사람이 내 엄마였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 거짓말 했어요"라고 뒤늦게 자백했다. 가짜 경하는 5살 때 보육원에 맡겨졌는데, 딸을 찾는 태순씨를 만나자 자기도 엄마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태순씨는 억장이 무너졌지만 한편으로 다시 '진짜 경하'가 떠올랐다. 태순씨는 "우리 경하도 이렇게, 엄마를 그리워하며 살고 있겠구나"라는 마음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가짜 경하가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남편 신중호씨는 이미 그녀가 가짜 경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호씨는 가짜 경하를 처음 봤을 때부터 생김새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태순씨는 진짜 경하가 맞다고 계속 우겼다고 한다. 딸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눈물 짓던 아내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중호씨는 "그냥 딸로 생각하고, 같이 살자"고 결심하며 모른 척 연극을 받아들인 것.
 
태순씨 부부는 가짜 경하를 용서했고, 심지어 훗날 그녀의 결혼식에도 혼주로 참석해줬다. 그녀는 이후에도 가끔씩 전화로 안부를 걸어오곤 했다고 한다. 비록 가짜였지만 부모를 그리워했던 그녀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한편 태순씨는 다시 진짜 경하를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태순씨는 유명 제과회사의 도움을 얻어 과자 봉지에 경하의 얼굴이 담긴 실종 아동 광고를 내기도 했고, 미아 찾기 관련 각종 행사에도 꾸준히 참석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20대 새댁이었던 태순씨는 어느덧 60대가 됐다. 꽃신을 신고 사라진 경하도 어느덧 40대의 중년이 되었을 나이였다.
 
경하가 사라진 44년 만인 2019년 10월 4일 오전, 태순씨의 휴대폰에 모르는 번호로 한 통의 이상한 전화가 걸려온다. '325캄라'라는 단체의 직원이라고 신분을 밝힌 제보자는, 태순씨가 '신경하의 엄마'인지 확인한 뒤 "경하가 미국에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325캄라는 국제 공조를 통하여 해외 입양아들의 가족을 찾아주는 일을 하는 미국의 입양인 단체였다. 태순씨는 몇 년 전 혹시나 하는 심경에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주는 국내의 한 단체에 본인의 DNA 정보를 등록한 일이 있었다. 그 DNA 정보를 325캄라에 등록된 DNA 정보와 대조한 결과 90% 일치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 경하가 미국에 입양되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태순씨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태순씨는 경하로 추정되는 인물의 이메일을 알아내 영어에 능한 아들을 통해서 연락을 취했다. 그리도 돌아온 답장에는 첨부파일로 사진 한 장이 있었고, 어린 시절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태순씨는 어릴 때의 경하와 꼭 닮은 외모보다도, 발에 신고 있는 '꽃신'에 시선이 갔다. 바로 실종되기 얼마 전 태순씨가 경하에게 사줘서 아이가 애지중지하던 그 꽃신이었다.
 
비로소 상대가 경하라는 것을 확신한 태순씨는 통화로 연락을 취했다. 당시 6살이었던 딸은 50살이 되었다. 태순씨는 통화가 연결되자 "경하야... 어떻게 거기까지 갔어"라며 울먹였다. 엄마는 영어를 못했고, 한국말을 못하는 딸은 영어로만 이야기했다. 의사소통은 되지 않았지만 마음이 통한 모녀는 수화기를 사이에 놓고 펑펑 울었다. 상의 끝에 경하가 한국으로 와서 가족들과 만나기로 했고 태순씨는 그날부터 처음으로 딸을 만날 그날을 기다리며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얼마 후 드디어 경하를 만나는 날이 찾아왔다. 태순씨와 가족들은 꽃다발을 준비하여 공항으로 일찍 마중을 나갔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태순씨는 드디어 경하가 게이트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 얼싸안았다. 모녀는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모두가 그토록 기다렸던 44년 만의 재회였다.
 
태순씨는 경하를 만나자 "아임 쏘 쏘리(I'm so sorry). 미안해…"라는 말을 반복했다. 엄마가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가장 먼저 경하에게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사실 태순씨가 잘못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엄마로서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죄책감은 평생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고, 그 긴 세월을 죄인 같은 마음으로 살아왔어야했던 것.
 
태순씨는 "이만한(자그마한) 애를 잃어버렸는데, 덩치가 나보다 더 큰 걸 안으니까. 뭐라고 표현을 해야 될까. 그냥 이게 뭔가… 하면서, 너무 흥분돼서 눈물이 나는 거예요. 경하를 안은 순간에…"라고 회상했다.
 
오랜 세월을 떨어져있었지만 막상 다시 만난 두 모녀의 모습은 너무나 닮았다. 두 사람의 비슷한 나이대였을 때의 사진을 보니, 마치 자매를 연상시킬 만큼 똑같은 모습이었다.
 
강제로 해외입양된 경하씨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그런데 경하에게는 지난 44년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6살짜리 소녀는 어쩌다 미국 입양아가 된 걸까. 그 뒤에는 충격적이고 슬픈 비밀이 숨어있었다.
 
사실 경하는 유괴되어 강제로 해외입양되었던 것이다. 경하가 실종되었던 1975년 5월 9일, 한 여인이 친구들과 놀고 있던 경하에게 접근했고 기차에 태워 종점인 충북 제천까지 데려간 이후 어디론가 사라졌다.

경하는 역 앞 경찰서로 가서 집을 찾아달라 부탁했지만, 경찰서에서는 경하를 제천의 한 고아원에 데리고 갔다. 또한 고아원에서는 경하를 미아가 아닌 고아로 등록했고 불과 두 달 만에 해외 입양을 결정했다.
 
당시 경하는 본인의 이름이 '신경하'이고 나이와 가족관계까지 분명히 이야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도 고아원도,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부모를 찾아주려고 노력한 어른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고아원 원장은 경하에게 "넌 엄마 아빠가 버린 아이야. 네 이름은 지금부터 백경화야"라고 세뇌시키며, 자신의 성을 따라 아이의 성과 이름까지 바꾸어 버렸다고 한다. 부모가 아이를 찾지 못하게 하려는 꼼수였다.
 
또한 입양 기관에서는 경하를 고아가 된 사유에서 '버려진 아이'로 분류하고 수원 백씨의 호주인 백경화로 고아 호적을 만들었다. 이에 경하는 완벽하게 공식적인 서류상으로 '고아'가 되었고, 입양 기관장의 동의만으로 미국 입양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 경하는 미국에 입양갈 때 갖고 갔던 '여행증명서'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었는데, 당시에 기재된 경하씨의 신상명세는 모두 실제와 다른 거짓이었다.
 
그나마 외향적인 성격으로 낯선 곳에서도 비교적 잘 적응했던 경하는 고아원에서도 '굿걸'이라고 불릴 만큼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입양이 결정되며 생전 처음 보는 서양인,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으로 입양되면서 한국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자 두려움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 한국에서는 해외 입양이 빈번했다. 그것도 고아가 아니라 미아인데도, 부모를 찾아주지 않고 해외 입양을 보내는 사례가 많았다. 그리고 미아를 의도적으로 해외 입양 보낸 기관은 아동 1명당 입양 수수료 5000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1인당 국민 소득이 4500달러였던 것과 비교해 엄청난 비용이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한 해에만 8000명 이상이 해외 입양으로 보내지기도 했으며 심지어 입양아 수송 전세기까지 운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당시 한국에서는 입양 부모나 기관에 대한 제대로 된 검증 없이 입양을 진행했고, 당사자인 아이들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당시 승무원으로 근무하던 박경진씨는 해외로 입양되던 아이들을 자주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경진씨는 "아이들의 가기 싫은 듯한 걸음이 기억난다. 손을 안 놓고 자꾸만 우리에게 안기더라. 그 모습을 보고 우리 승무원들도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고 회상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경하가 미국으로 입양된 것은 1976년 2월 4일, 실종된 지 약 9개월 만이었다. 7살에 미국에 건너온 경하씨는 어린 시절 가족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 때마다 기억 속의 집과 동네 그림을 그리며 마음에 새기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경하씨는 한국에서 자신이 지내던 고아원 원장에게 연락을 해서 혹시 자신를 찾는 사람이 없는지 물었지만 아무도 없었다는 대답을 들을 때마다 한때는 "진짜 나는 버림받았구나"라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경하씨는 양부모로부터 일찍 독립해서 결혼하고 딸도 낳았다. 경하씨의 딸은 진짜 엄마를 그리워하는 경하씨를 위하여 DNA를 미국의 325캄라 기관에 대신 등록해줬다. 비록 비정한 세상과 시대는, 모녀를 떨어뜨려놓았지만, 그 모진 세월에도 끝내 서로를 찾으려는 노력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마침내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현재 해외입양 문제에 대한 조사를 진행중이다. 1970년에서 1989년 사이 해외 입양을 간 아이는 총 10만 8402명이다. 전 세계 375명의 수많은 또다른 '경하'들이 진실화해위에 해외 입양 실태에 대한 조사를 신청했다. 그들이 한국 정부에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이유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당시의 진실을 밝혀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경하씨 가족이 다시 상봉할 수 있었던 것은 DNA 등록이 결정적이다. 현실적으로 입양 서류의 신빙성이 떨어지는 만큼 DNA가 당사자들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극적으로 딸을 찾은 태순씨는 DNA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부모가 죽지 않는 한, 자식들도 부모를 찾으려고 생각할 거다. 그러니까 양쪽이 모두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하며 또다른 기적을 응원했다.
꼬꼬무 해외입양 진실화해위원회 인권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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