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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8.10 08:05수정 2018.08.10 09:16
"양갈비와 함께 마셨을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리아주를 경험하게 해 준, 그래서 와인과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게 해 준 제 첫사랑 와인이 바로 '아마로네'였습니다."

"마리아주요?"

"하하, 제 첫 와인 경험을 설명해드리느라 제가 너무 흥분해서 저도 모르게 또 외국어를 써버렸군요. 하지만 마리아주(mariage)는 사실 손님도,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잘 아시는 단어에요. 마리아주는 바로 영어의 '매리지(marriage)', 즉, 결혼을 뜻하는 프랑스어입니다."

"아하, 술과 안주의 궁합 같은 거군요?"

"예, 맞습니다. 단순한 궁합이라기보다는 좀 더 깊고 복잡한 의미가 있긴 합니다만, 우선은 그 정도로 생각해두시면 편하죠."

징기스칸 화로 위의 고기는 어느덧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배고픔은 충분히 채워졌지만, 술은 아직 더 마실 수 있을 듯 했다. 그는 내 느낌을 알아챈 듯 '고기를 더 드릴까요, 아니면 다른 안주에 와인을 좀 더 드시겠어요' 하고 물었고 나는 '와인을 좀 더 마시고 싶다'고 했다.

"아마로네는 그럭저럭 다 마신 것 같은데, 재미있는 다른 와인 드릴께요. 어떤 와인인지 한 번 맞춰보세요."

그는 화로를 주방으로 치우더니 작은 나무 도마에 손톱 크기만한 하얀 덩어리들을 담아 다른 와인과 함께 내왔다. 와인의 라벨은 잠시 전 마신 아마로네와 어딘지 모르게 비슷했고, 라벨의 맨 위에 써진 상표명이랄까, 혹은 와이너리 이름은 동일했지만 그 아래 적힌 글은 좀 달랐다.

"발폴리첼라 리빠소(Valpolicella Ripasso)?"

그는 예의 사람좋은 웃음과 함께 아직 아마로네가 조금 남은 잔 대신에 다른 와인 잔에 새로운 와인을 따라 내게 건넸다. 그는 이제는 눈에 익숙한 자세로 와인 잔을 돌리더니 가볍게 잔을 눈 위로 들어 와인의 색을 감상했다. 나도 그를 따라 잔을 들어 불빛에 비쳐보니 붉지만 선홍색이라기보다는 가넷에 가까운 투명한 색의 와인이 잔 안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향을 맡아보자 아마로네와는 어딘지 비슷하면서도 좀 더 상큼한 향이 기분 좋게 콧속을 간지럽혔지만, 알코올 도수는 아마로네보다 높지 않은지 눈물이 날 정도로 따끔거리는 느낌은 없었다.

작황이 좋은 해에 아마로네 와인을 만들고 남은 포도 껍질들을 섞어 와인을 빚음으로써 아마로네의 풍미를 더해준 '발폴리첼라 리빠소(Valpolicella Ripasso)'. 아마로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면서도 아마로네의 맛과 향기를 느낄 수 있어 일명 '빈자의 아마로네'라고 불린다. ⓒ 이건수


천천히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어보자 달달한 체리향과 함께, 자두잼 같은 맛이 나서 절로 맛있다는 감탄이 나왔다.

"아마로네보다 상큼하고 가벼우면서 기분 좋게 맛있는데요."

"뒷맛은 어떠세요? 아마로네처럼 쌉싸름한 여운이 돌지 않나요?"

"예, 맞아요! 정말 처음 마실 때와는 다른 느낌의 묵직하고 쌉싸름한 여운이 있네요."

"이 와인은 일명 '빈자의 아마로네'라고 불리는 발폴리첼라 리빠소, 줄여서 '리빠소'라고 부르는 와인입니다. 베네토 지방에서는 양조용 포도를 수확한 후에 좋은 포도들은 대나무발에서 건조시키는 아파시멘토 기법을 거쳐 아마로네를 만들고, 그보다는 품질이 좀 떨어지는 일반 포도들은 건조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양조를 해서 지역 이름이기도 한 '발폴리첼라(Valpolicella)' 와인을 만드는 데요.

작황이 아주 좋은 해에는 아마로네를 만들고 남은 포도 껍질들을 발폴리첼라 와인에 섞어서 아마로네의 풍미를 가미해주는 거죠. 이렇게 아마로네를 만들고 남은 포도 껍질들에 와인을 다시 통과시켰다고 해서 그걸 가리키는 이태리어 리빠소(ripasso), 영어로 옮기자면 리패스(repass)라고 부르는 겁니다.

아마로네보다는 가볍고 신맛이 있는 발폴리첼라 와인에 묵직하고 쌉싸름한 아마로네의 풍미가 더해지면서 전체적으로 아주 밸런스가 좋으면서도 값은 저렴해서 '빈자의 아마로네', 또는 '베이비 아마로네'라고 불리기도 한답니다. 이제 이 치즈를 드시고 한 모금 다시 드셔보세요."

'아마로네'와 '리빠소', 잘 어울리는 조합

그가 가리키는대로 나무도마 위에 있는 흰 치즈 덩어리를 한 입 물자, 짭쪼름하면서 어딘가 풍부한 맛의 알갱이들이 입 안에서 씹혔다. 그 위에 리빠소를 한 모금 마시자, 치즈의 꼬릿하고 짭짤한 맛에 달달하면서도 쌉싸름한 와인의 맛이 더해지면서 와인만 마셨을 때와는 전혀 다른, 더 풍부하고 긴 여운이 입안 가득 퍼졌다.

"치즈와 함께 먹으니 훨씬 더 풍미가 좋은데요! 이것도 마리아주인가요?"

"하하, 역시 맛에 대한 감각만큼이나 배우시는 속도도 빠르군요. 맞습니다. 보통 치즈들과 와인은  마리아주가 좋은 편인데요. 모든 와인과 치즈가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니고, 이 아마로네와 리빠소, 그리고 바로 이 치즈, 빠르미지아노 레지아노처럼 특히 잘 어울리는 조합이 있죠."

이런! 너무 어렵다! 왠 치즈 이름이 그리도 길단 말인가?
그는 내 표정을 보고 난처한 표정을 읽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치즈 이름이 너무 길죠? 하지만 대량 생산된 이 치즈의 모방품 이름은 어지간한 아이들도 다 알고 있을 겁니다."

"모방품이요?"

"예. 바로 피자가게에서 피자에 뿌려먹으라고 주는 파마산(parmesan) 치즈가 이런 종류 치즈의 영어 이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파마산, 혹은 이탈리아식으로 읽으면 파르미잔(parmizan) 치즈는 이태리 북부의 파르마 지역이 원산지인 경성치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모방품이라고 말씀드린 건 피자가게의 파마산 치즈가 이태리의 파르마 지역과는 아무 상관없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제품이라 그런 거구요.

파르마 지역은 예로부터 품질 좋은 경성치즈로 유명했는데요. 지금 씹었을 때 느낀 것처럼 알갱이가 씹힌다고 해서 알갱이를 가리키는 영어의 그레인(grain)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어를 써서 그라나(grana) 치즈라고도 부르죠.

이런 치즈 중에서도 파르마 지역과 그 옆의 레지오-에밀리아(Reggio-emilia) 지역에서 수제로 생산하는 치즈가 특히 유명한데, 이 두 지역의 이름을 붙여서 파르마-레지오 지역 치즈, 이태리어로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라고 부르는 거랍니다."

술 기운과 함께 과도한 외국어의 향연으로 머리에 슬슬 과부하가 걸리고 있었다.

"하하하, 이름이야 어쨌든 참 맛있는 치즈와 와인이죠?"

"예, 그러네요."

치열한 역사의 현장, 베네치아

그는 나에게 가볍게 건배를 청했고, 나도 배운 대로 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혹시 이탈리아에 가보신 적 있으세요?"

"아뇨, 해외여행이라고는 예전에 사촌형 따라서 중국에 가본 경험이 유일합니다."

"중국이요? 북경이요? 아님 상해?"

"아뇨, 원래는 북경까지 갈 예정이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북경까지는 못 가고 그 옆 하북성까지밖에 못 가봤어요."

"아, 그러셨군요. 다음에는 중국 다녀오신 얘기 좀 해주세요."

"예, 그럴께요. 사장님은 이탈리아에 많이 가보셨죠?"

"그런 셈이죠. 아무래도 무역 일을 하다보면 여기저기 많이 다니게 되니까요. 그런데 저야 일로 다니니 바이어와 친교도 쌓을 겸 지역에 대해 사전에 공부를 하고 가게 되는 편인데, 우리나라 관광객분들은 좀 단편적으로 겉에 보이는 것만 둘러보시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더군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 아마로네 와인의 본고장인 베네토, 그 중에서도 베니스에요. 우리나라 분들을 포함해서 연간 수천만 명이 베니스, 이탈리아어로는 베네치아를 관광하고 갑니다만, 대부분은 낭만적인 운하 도시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갔다가, 의외로 작고 비좁은 도시와 그 주위를 둘러싼 뻘에 적잖이 실망하고 볼 거 없더라는 얘기를 하죠.

그런데 사실 베네치아는 그렇게 간단하게 볼 거 없더라고 깎아 내려도 좋은 곳이 아니랍니다. 그야말로 치열한 역사의 현장이랄까요?"

"저도 베니스라면 방송이나 잡지에서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그렇게까지 대단한 곳인가요?"

"예, 베네치아가 도시국가인 무렵, 그들의 베네치아 공화국은 로마제국이 무너져 유럽이 암흑과도 같았던 중세시대에 무려 천년 가까운 세월을 공화국 체제를 유지하면서 지중해의 패자로 군림했던 곳이었습니다. 대략 5세기 무렵에 게르만족들이 훈족에 밀려 남부 유럽으로 밀려들고, 그들에 의해 로마제국이 무너진 건 아시죠?

베네토 지방은 특히나 이태리 북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이태리 본토에서는 가장 먼저 게르만족들의 침입을 받은 지역에 속했습니다. 육지에서는 도저히 게르만족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 베네토 사람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해안선 너머 길게 펼쳐진 뻘 위로 도피하기로 합니다. 육지 부족의 특성 상 바다나 뻘은 늘 두려움의 대상인 걸 이용한 거죠. 마치 우리나라의 고려 조정이 몽고가 침입했을 때 강화도로 피난간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육지 부족은 잘 알 수가 없었지만, 뻘에도 나름 단단한 곳과 부드러운 곳이 있어서 이를 테면 부드러운 곳은 길이 되고 단단한 곳은 거주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베네토 사람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습득한 토목기술을 이용해서 단단한 뻘 위에는 거주지를 건설하고 부드러운 뻘은 운하를 만들어 교통이 편리하게 만든거죠.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베네치아인데 그들은 귀족이나 왕이 다스리던 다른 도시국가들과는 달리 비록 종신제이긴 하지만 도제(doge)라고 부르는 원수를 국회에서 선출하고 도제와 국회가 함께 통치해나가는 공화제를 채택했습니다.

바다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게르만족은 뻘(raguna, 라구나) 위에 건설된 이 작은 도시국가를 어쩌지 못하고 물러갔지만, 어느새 이탈리아 북부에 터를 잡고 정착을 했기 때문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육지로 세력을 회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는 무엇보다 뻘 위에 자리잡은 입지의 특성 상 인구와 자원이 모두 부족했던 거지요.

생존을 위해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드넓게 열린 바다뿐이었습니다. 다행히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 몇몇 그리스 지역을 제외하고는 해상 무역을 할 수 있는 도시국가가 별로 없었던 것이 그들의 기회였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동쪽으로부터 그리스에 이르는 아드리아해와 그 너머의 중동, 그리고 뒤이어 새롭게 자리잡은 동로마 제국, 이른바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 간의 무역은 수지가 좋은 사업이었고, 일단 그 가능성을 발견한 후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국가 차원에서 전력을 기울여 지중해 무역에 모든 역량을 기울이게 되죠.

10세기 이후에 유럽의 판도를 결정하게 되는 십자군 전쟁이라든가, 동로마 제국의 멸망, 투르크 제국과 유럽 국가들 간의 전쟁 등 그 모든 역사의 중심에는 항상 베네치아 공화국이 있었습니다. 5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천 년의 유럽 역사는 그 자체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죠. 그들의 역사를 읽다 보면 달콤하지만 쌉싸름한 이 와인이 왠지 그들의 삶을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마치 역사 강의를 하는 듯한 그의 유창한 설명에 나는 어느덧 와인 마시는 것도 잊은 채로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멍한 내 눈길을 비로서 알아챈 것일까? 그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하하, 죄송합니다. 역사는 워낙 제가 좋아하는 분야다보니 얘기만 나오면 자제가 안되네요."

현대의 베네치아와 아드리아해. 지금은 일개 관광도시가 돼버린 베네치아지만 원래는 게르만족의 침략을 피해 베네토 사람들이 바다의 뻘(raguna) 위에 건설한 도시이며, 근 천년 동안 동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고 유럽 역사를 이끈 베네치아 공화국이었다. ⓒ 구글 지도


'아니에요, 너무 흥미진진한데요'라고 무마하며 같이 따라 웃었지만, 솔직히 이 와인과 그 장구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가 어떻게 관련이 있는 건지 아직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물론 나도 이런 분야에 대한 흥미는 그 누구 못지 않다고 자부해왔던 터지만, 중국 다녀와서 쓴 보고서 때문에 당시 윗양반한테 쓸데없이 사설만 길다고 잔뜩 혼난 이후로는 기가 죽어서 이런 잡다한 분야에 대한 흥미를 억누르고 살았어야 했다. 그랬는데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궁금증을 못 참는 내 성격이 슬슬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가 와인 한 모금으로 열변을 토한 입술을 축이더니 다시 얘기를 이어 나갔다.

"앞에 사설이 길었는데요. 사실 베네치아 공화국 얘기를 꺼낸 건 중세 유럽의 꽃이라 불렸던 두 라이벌 도시와 아마로네 와인의 관계를 설명 드리려던 거였어요. 베네치아 못지 않게, 아니 사실은 역사 속에서 그보다 더 유명한 이태리의 도시 국가는 바로 꽃의 도시, 그래서 영어로는 아직도 플로렌스라고 불리는 피렌체 공화국입니다.

개인이 튀는 걸 용납하지 않고, 영웅을 바라지 않았던 베네치아 공화국과는 달리, 피렌체는 철저하게 개인의 개성을 중시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지만, 그들 대부분이 이런저런 정쟁에 휘말려 고국에 정착하기 힘들었던 곳도 피렌체였죠. 혹시 신곡을 쓴 단테 알리기에리를 아시나요?"

"예, 잘은 모르지만 신곡의 작가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 단테 알리기에리가 피렌체 출신입니다. 그는 일찍이 피렌체에서 여러 공직을 거쳤지만 결국 정쟁에 휘말려 피렌체를 떠나 망명길에 올라야 했고, 망명객인 단테가 노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난 곳이 베네토 지방이었습니다.

그의 후손들이 베네토 지방에서 포도원을 운영하면서 와인을 빚고 살았는데, 그들 중 한 명인 세레고 알리기에리(Serego Aligheri)가 세운 바이오 아마론(Vaio Amaron)이 최초의 아마로네 와인이라는 것이 정설이죠. 하하하, 그 얘기 해드린다는 게 너무 서론이 길었네요."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그가 신곡을 보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도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사장님 얘기를 듣다 보니 진짜 여기 이름이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사장님 얘기는 천하룻밤이라도 듣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과연 그런 시간이 있을까?

어느새 리빠소 와인 병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사장님, 오늘은 제가 술이 과한 것 같아요. 이만 일어서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저희도 슬슬 문 닫을 시간이네요. 오늘 술벗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들러주실 거죠?"

"그럼요. 일 때문에도 근처에 자주 오는 편이니 꼭 또 올께요. 다음에도 재미있는 얘기 해주세요."

그의 배웅을 받으며 문을 나서자 숨이 막힐 것 같은 더운 공기가 술이 오른 얼굴 위로 훅 덮쳐왔다.

(※ 5화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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