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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8.03 08:26수정 2018.08.03 08:26
때릴 듯이 내리쬐던 햇살과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땀이 뉘엿뉘엿 지는 해와 함께 불어오는 바람에 식으면서 두통이 조금 가라앉는 듯 했다. 거리에서는 아직도 푸석한 먼지 냄새와 사람들의 땀 냄새가 뒤섞여 올라오고 있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러고 살아야 하나... 좀 더 나은 일도 있을 텐데.'

석양 빛과 어둠이 뒤섞인 초저녁 거리에서는 상점들이 하나 둘씩 간판 네온사인을 켜고 있었다. 문득 저 멀리 눈에 익은 간판이 보였다.

'1001 M.U.N'
'밀레 에 우나 노떼... 천하룻밤이라고 했던가.'
풍채 좋고 분위기가 색다른 주인장의 사람 좋은 너털웃음이 떠올라 어느새 그의 발걸음은 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어차피 가봤어야 했지만... 좀 일찍 가볼까.'

왠지 그 주인과 얘기하면서 술이라도 한 잔 하면 종일 답답했던 마음이 좀 나아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마를 스치는 서늘한 바람과 함께 주방에서 뭔가 분주하게 준비하던 주인이 손을 행주에 닦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오세요. 아... 손님이시군요. 어서 오세요."

나는 그가 권하는 대로 주방 앞의 바처럼 생긴 자리에 앉았다.

"사장님, 안녕하셨어요?"

"예, 덕분에요. 날씨가 정말 덥죠?"

"진짜 지치네요. 너무 힘든 하루였거든요."

그는 안 됐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뭘 드시겠냐'고 물었다.

"뭔가 기운날 만한 거 없을까요? 종일 제대로 밥도 못먹었어요."

"그러셨군요. 마침 양고기를 손질하고 있었는데 좀 구워드려 볼까요? 지쳤을 때는 이만한 게 없죠."

"그럼, 그거랑 적당히 술 아무거나 주세요."

"예, 잠시만 기다리세요."

일본 홋카이도 지방의 전통요리 '징기스칸'

그는 주방 뒤로 사라졌다가 잠시 후에 둥그렇고 높은 투구 모양의 작은 화로를 들고 돌아왔다.

하루종일 폭염에 지친 사람에게 다시 뜨거운 화롯불이라니...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의 그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달궈진 화로의 아래 홈에 대파와 양파를 얹었다. 연기와 함께 달큰한 냄새가 올라와 군침을 돌게 했다.

그는 주방에서 몇 가지 고기들을 작은 접시에 들고 왔다.

"양고기 드셔 본 적 있으세요?"

"중국식 양꼬치는 먹어본 적이 있는데, 이렇게 굽는 건 처음인데요."

"이건 일본 홋카이도 지방의 전통요리인 '징기스칸'이라는 거에요. 우선 구워진 대파랑 야채를 먼저 양념 간장에 살짝 찍어 드셔보세요."

그는 구워진 야채들을 내 앞 접시에 덜어주고는, 화로 위에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살코기를 한 점 올렸다. '칙~' 하는 소리와 함께, 소고기와는 전혀 다른 고기의 육향이 피어 올랐다.

일본 삿포로식 양고기 구이인 '징기스칸'. 투구 모양의 화로 위에서 손질된 양고기와 야채를 구워 소스에 찍어먹는다. ⓒ 이치류 주성준


"술은 뭘 드릴까요? 일본에서는 맥주나 일본 소주를 곁들여 많이 먹긴 합니다만..."

사실 내심은 이가 시리도록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간절했는데, 맥주를 달라고 하려는 순간 그의 눈빛을 보고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

"와인은 없나요? 지난 번에 사장님 설명 들으면서 와인을 마시니 너무 맛있었어요."

내 예상이 적중했다. 그는 눈가에 번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하하하' 웃었다.

"역시! 탁월한 선택이세요. 마침 양고기에 환상적으로 어울리는 와인이 있거든요."

한쪽 면이 노릇하게 구워진 양고기를 뒤집은 주인은 주방에서 와인 한 병과 와인 잔을 들고 왔다. 라벨을 읽어봤다. '아마로네(Amarone)'?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빙긋이 웃으며 와인을 소개했다.

"이탈리아 베네토(Veneto) 주의 명주인 아마로네입니다. 원래는 '아마로네 델라 발폴리첼라 클라시코(Amarone della Valpolicella classico)'라는 긴 이름으로 불러야겠지만, 줄여서 그냥 '아마로네'라고만 불러도 다 아는 유명한 와인이죠. 마침 저도 양고기와 함께 마시고 싶어서 한 시간쯤 전에 마개를 열어뒀으니 지금 드시면 아주 맛있을 겁니다. 드셔보세요."

역시나 외우기 힘든 긴 이름에 나는 '이름이 너무 기네요'라고 말하며 일부러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짙은 루비색 와인이 출렁거리는 와인 잔을 들어 그에게 배운대로 가볍게 돌리다가(swirling), 와인 잔 깊숙이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제법 독한 술인지 와인 잔 안에서 훅 치고 올라오는 따끔한 알코올 향에 눈물이 찔금 났지만, 잔을 조금 더 돌리다 다시 맡아보니, 첫 인상은 새로 지은 통나무집에 들어갔을 때처럼 약간 마른 나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는데, 그 뒤로 살짝 톡 쏘는 것 같은 달달한 향기가 이어지는 것 같았다. 내 표정을 읽기라고 한 걸까. 그가 잘 구워진 양고기를 가위로 먹기 좋게 잘라 내 앞에 덜어주고는 다시 야채와 고기를 불판에 얹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나무 냄새랑 달달한 향기가 섞여서 올라오죠? 그건 삼나무 향기랑 감초 향기에요. 아직은 조금 덜 열렸나 봐요. 우선 양고기 좀 드시면서 잠깐 놔뒀다 드셔보세요."

어느새 비어버린 내 앞 접시에 그가 고기 몇 점을 다시 올려줬고, 배가 고팠던 나는 그가 주는대로 허겁지겁 양고기를 넣고 씹었다. 그런데 그 양고기들은 내가 이전에 먹어봤던 어떤 양고기 - 그래봐야 중국식 양꼬치지만 - 와도 달랐다. 마블링은 없어 보이는데 부드러운 육향과 쫄깃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이런 양고기 맛은 처음인데요? 얘기하지 않고 먹으면 소고기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아요."

"하하, 이건 양의 살치살입니다. 양고기 중에서도 가장 담백하면서도 쫄깃한 식감이 일품이죠."

"이제 와인이 충분히 열렸을 겁니다. 다시 드셔 보세요."

나는 그가 권하는 대로 다시 와인잔을 들어 향을 맡고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가 깜짝 놀랐다.

"어? 아까와는 향이 많이 다른데요? 아까는 나무 향도 나고 좀 톡 쏘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꼭... 음..."

"말린 자두 같은 향기가 나죠?"

"예, 예, 맞아요! 말린 자두요! 그리고 맛도 꼭 말린 자두 씹을 때처럼 찐득하면서 굉장히 달달하고... 그런데 살짝 딸기처럼 새콤한 맛도 나고... 와, 진짜 맛있는데요."

"양 살치살 한 점 드시고 입 안에 고기 맛이 남아있을 때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물듯이 천천히 드셔보세요."

그가 시키는 대로 입 안에 양고기 한 점을 물고 천천히 씹다가 와인을 마셔보았다.

그 순간, '와~' 하는 탄성 밖에는 안 나오는, 뭔가 굉장히 다양하고 처음 느껴보는 맛이 입 안으로, 다시 코로 밀려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신음이 나왔다. 이윽고 와인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입 안에는 고기와 와인 맛이 섞인 묵직하면서 달콤한 여운만 남은 것 같았다.

이탈리아 베네토(Vaneto) 주의 명주인 '아마로네(Amarone)'. 수확한 포도를 대나무발 위에서 건조시켜 당분과 응축감을 높인 후에 와인을 빚는 아파시멘토(Appasimento) 기법으로 만든 대표적인 와인이다. 아마로네는 쌉싸름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아마로(amaro)'에서 유래됐다. ⓒ 이건수


내가 뭔가 말을 하려는데, 그가 빙그레 웃으면서 내 말을 막았다.

"잠깐, 입안에 남은 여운을 더 느껴보세요. 전체적으로 달콤한 것 같으면서, 묘하게 쌉싸름한 뒷맛이 느껴지지 않으세요?"

"예! 정말인데요! 꼭..."

"다크 초콜릿 드셨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죠?"

"네, 바로 그런 맛인데요! 쓰긴 한데, 기분 나쁜 쓴 맛은 아니고 무척 고급스러운 쌉싸름한 맛이에요."

그는 자기 잔에도 와인을 따라 천천히 돌리다 한 모금 머금고는, 눈을 감고 와인 맛을 음미하는 듯 했다. 그건 마치 와인을 마시기보다 뭔가 즐거운 추억을 회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 와인의 이름인 아마로네는 바로 그 쌉싸름한 맛에서 유래된 겁니다. 이태리어로 '아마로(amaro)'는 쓰다는 뜻인데, 달콤하다는 뜻인 '돌체(dolce)'의 반댓말이죠. 이 와인의 독특한 쓴 맛은 와인을 만드는 특별한 방식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베니스(베네치아)가 주도인 베네토 지방에서는 포도를 수확한 후에 대나무로 만든 발 위에 포도를 늘어놓고 말리는데요. 

그렇게 말리다 보면 포도의 수분은 날아가고 당도가 올라가다 어느 순간에는 남은 당분이 발효되면서 독특한 쓴맛이 남게 됩니다. 이렇게 포도를 말려서 발효시키는 기법을 '아파시멘토(Appassimento)'라고 부른답니다. 이 기법을 이용해서 만든 가장 대표적인 와인이 바로 이 '아마로네'고요. 저에겐 와인을 제대로 마셔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이를테면 첫사랑 와인이기도 합니다."

"첫사랑 와인이라... 뭔가 로맨틱한데요."

"하하하, 사실 그 사연은 그렇게 로맨틱하진 않습니다. 전 이 술집을 열기 전까진 무역업에 종사했어요. 그래서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다양한 음식과 술을 마셔볼 기회가 많았죠."

처음으로 마리아주를 경험하게 해준 '아마로네'

역시... '평범한 술집 주인은 아닐 것 같다'는 내 예상이 맞았다.

"그런데 와인은 제게는 그렇게 마시기 좋은 술은 아니었어요. 위스키나 브랜디, 아니면 중국의 백주 같은 증류주를 좋아하던 제게 와인은 맛은 시거나 떫고, 숙취는 오래 가는... 이를테면 유럽의 바이어를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시키기는 하지만 굳이 찾아서 마시고 싶은 술은 아니었던 거죠.

그러던 어느 해인가, 늦가을에 스위스로 출장갈 일이 생겼습니다. 하루 정도 머물면서 바이어와 반나절 정도 상담하고 바로 다시 이탈리아로 넘어가야 했기 때문에 특별히 주변을 관광하거나 뭘 찾아 먹기도 애매했어요.

바이어와도 그리 친분이 많던 사이는 아니었던 터라 상담을 마치고 호텔방에서 혼자 저녁을 먹으면서 맥주나 한 잔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바이어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더군요. 저야 혼자 저녁을 먹기보다는 그게 낫고,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친분이라도 쌓아두면 나중에 비즈니스에도 도움이 되겠다 싶어 흔쾌히 따라 나섰습니다.

그가 저를 데리고 간 곳은 천장에 머리가 닿을 듯한 아주 작고 얕으막한 동네 식당이었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자 그 바이어가 제게 지금은 새끼양의 갈비가 아주 맛있는 철이니 먹어보라고 권하더군요. 나름 중국 비즈니스를 하면서 중국식 양 샤브샤브인 훠궈며 북경의 싼양뤄 같은 양고기 요리를 질리도록 먹었던 경험이 있어 속으로는 별로 달갑지 않았지만, 전형적인 비즈니스맨의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좋다고 따라 나섰습니다.

바이어는 양갈비와 함께 무슨 와인인가를 한 병 시켰는데, 솔직히 저는 그때까지 와인이라고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끼안띠 밖에 몰랐고, 그나마도 외국 바이어가 와인을 찾으면 주문은 해야 하니까 억지로 이름을 외워서 오로지 그것만 시켰기 때문에, 와인의 이름이나 종류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이윽고 그 해 봄에 태어나 가을에 잡은 새끼양 갈비가 미디엄 레어 정도로 구워져 투박한 그릇에 담겨져 나오더군요. 그런데 그 냄새가... 이전에 제가 먹었던 양고기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윽하고 부드러운 풍미가 있었습니다.

놀라는 제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던 바이어가 와인을 한 잔 따라주며 같이 마셔보라고 권하더군요. 양갈비의 풍미에 취한 채로 와인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입 안에서 양갈비와 와인의 향기가 폭풍처럼 뒤섞이고 그 달콤 쌉싸름한 향기가 마치 폭포처럼 정수리부터 코, 입, 그리고 가슴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어요. 

그건 정말이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충격적인 맛과 향이었습니다. 어찌나 놀랐던지 허겁지겁 양갈비 한 점과 와인 한 모금을 다시 입에 머금어 봤는데, 역시나 놀라운 여운이 좀처럼 지워지질 않더군요. 와인이란 술을 마셔본 이래 처음으로 와인 병을 다시 들어 그 와인의 이름을 봤습니다. 잘 기억해뒀다가 그 맛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거든요."

"그럼 그때 마신 와인이... ?"

"예, 맞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리아주를 경험하게 해준, 그래서 와인과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게 해준 제 첫사랑 와인, 바로 아마로네였습니다."

이런... 또 생소한 외국어가 튀어 나왔다. 오늘도 나는 수강생 모드인가. 하긴 내가 하는 일보다는 이렇게 앉아 강의를 듣는 심정으로 즐겁게 음식과 술을 마시는 게 훨씬 낫긴 하겠지만.

"마리아주요?"

"하하, 제 첫 와인 경험을 설명해드리느라 제가 너무 흥분해서 저도 모르게 또 외국어를 써버렸군요. 하지만 마리아주는 사실 손님도,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잘 아시는 단어에요. 그건 바로..."

(※ 4화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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