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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8.17 08:22수정 2018.08.17 08:22
입추가 지났지만 온풍기 앞에 선 듯, 뜨거운 바람은 좀처럼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햇빛을 가리기 위해 낮에 쳐놨던 차양을 걷는 그 잠깐 동안에도 목덜미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다시 가게에 들어서자 에어컨의 찬바람에 서늘한 느낌으로 식은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렸다. 간판의 조명을 켜자 '1001 M.U.N'이라는 네온사인이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게 푸른 색으로 빛났다.

목이 말라 탄산수를 한 병 꺼내 마시며 붉게 물든 저녁 노을을 보고 있자니 쌉싸름한 캄파리(주: 비터 오렌지와 캐러웨이 등의 허브가 들어간 이태리의 대표적인 리쿼르. 주로 탄산수나 토닉워터와 섞어 식전주로 마신다) 생각이 간절했지만 아직 좀 이른 시간이라 참아 보기로 했다.

시디 플레이어에 냇 킹 콜(Nat Kong Cole)의 스페인어 노래 앨범인 '칸치오네 엔 에스파뇰(Cancione en Espanol)'을 올리고 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인 '그대의 푸른 눈동자(Aquellos ojos Verdes)'를 틀었다. 영화 '화양연화'에서 남녀 주인공이 레스토랑에 마주 앉아 있을 때 배경음악으로 흐르던 곡이었다.

'이렇게 덥고 지친 날이니 오늘도 손님은 없겠군. 혼자 와인 마시자니 한 병을 열어 마시기엔 너무 많고... 진짜 칵테일이나 한 잔 해야 하나, 아니면 전에 열어둔 셰리와인이나 한 잔 마셔볼까.'

냉장고 문을 열고 뭐가 있나 뒤적이고 있을 때 '딸랑'하는 풍경 소리와 함께 일전에 두어 번인가 찾아와 와인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던 젊은 남자 손님이 들어섰다. 아니, 사실 젊은 지는 잘 모르겠다. 언뜻 보면 젊어 보이는데 자세히 보다 보면 좀 지쳐 보이기도 하고,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그런 느낌의 사내였다.

"어서 오세요! 아, 손님이시군요. 날씨가 많이 덥죠? 이쪽으로 앉으세요. 시원한 물 한 잔 드릴까요?"

스페인식 콜드 스프 '가스파초(gazpacho)'

나는 파란색 물컵에 얼음을 몇 조각 넣어 물 한 잔을 건넸고, 그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그제서야 좀 기운이 도는 듯 내게 인사를 했다.

"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날씨가 정말 덥네요. 이런 더위는 정말 처음 겪어보는 것 같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많이 지쳐 보이시네요. 식사는 하셨어요?"

"아뇨, 입맛도 없고 종일 사람들에 시달리느라 아무 것도 못 먹었어요."

"저런, 그럼 간단히 요기하실 것부터 좀 드릴까요?"

"예, 부탁 드려요."

마침 어제 만들어 냉장고에서 숙성시켜놓은 가스파초(차게 먹는 스페인풍 콜드 스프)가 있었다. 작은 스프볼에 주황색의 가스파초를 담고, 오븐에서 꺼내 식혀놓은 치아바타 빵을 몇 조각 썰어 바구니에 담아 함께 내자, 사내는 몹시 배가 고팠던 듯 허겁지겁 가스파초를 떠먹기 시작했다.

"이건 뭐죠? 처음 먹어보는 맛이에요. 차가운데 좀 얼얼한 맛도 있고, 새콤 매콤한데요?"

"이건 가스파초(gazpacho)라는 스페인식 콜드 스프에요. 토마토, 오이, 피망 같은 채소들에 식초와 올리브오일을 넣고 갈아서 만드는 음식이죠. 원래는 빵도 같이 넣고 갈아서 걸쭉하게 죽처럼 먹는 음식이라 젖은 빵이라는 뜻의 가스파초라고 부르는데요. 

저는 빵 대신 이런저런 채소를 더 많이 넣고 차게 숙성시켜서 먹는 걸 더 좋아해서 빵은 이렇게 따로 드리죠. 채소들을 그대로 간 것이라서 덥고 지치는 여름에 생채소의 비타민은 듬뿍 공급해주면서 살짝 매콤한 맛도 있어서 기분도 상큼하게 만들어주는,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미역 냉국 같은 음식이라고 할까요."

스페인의 콜드 스프인 가스파초(gazpacho). 토마토, 오이, 피망 같은 채소에 식초와 올리브 오일을 넣고 갈아 차갑게 먹는 음식. 가스파초는 '젖은 빵'이란 뜻으로 빵을 같이 넣고 갈아서 죽처럼 걸쭉하게 만들어 먹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 이건수


내가 설명하는 동안, 그는 가스파초 한 그릇과 빵 한 바구니를 다 비우고 볼에 남은 스프를 마지막 빵 조각으로 깨끗이 닦아서 먹고 있었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하하, 확실히 아까보다는 좀 나아 보이시네요. 뭐 다른 것도 좀 더 드릴까요?"

"예, 너무 배 부르거나 거한 메뉴 말고 간단히 먹고 마실 것 추천 좀 해주세요."

"그러면 숙성시킨 생선회에 화이트와인 한 잔 하시면 어떨까요?"

그게 좋겠다는 그의 대답을 들으면서 난 아침에 석장뜨기(주: 포를 뜨고 나면 생선의 양쪽 몸통과 가운데 뼈 부분,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회 뜨기 기술)로 포를 떠 다시마에 싼 채로 숙성시켜 놨던 도미회를 꺼냈다. 손으로 살짝 눌러 보니 적당한 탄력이 느껴지는 것이 숙성이 잘 된 것 같았다.

그냥 회로 먹어도 좋을 것 같았지만 같이 낼 와인과 먹기에는 카르파치오로 내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껍질 부분을 토치로 살짝 그슬리고, 접시에 루꼴라(주: 약간 매운 맛이 있는 이탈리아산 향신 채소)를 깔고 회를 올린 후, 얇게 썬 양파와 레몬, 그리고 적후추를 곁들인 다음에 마지막으로 레몬즙과 올리브 오일을 뿌렸다.

와인은 마침 숙성회에 딱 맞춤인 화이트 와인이 있어 마개를 연 후 잔에 따라 도미 카르파치오와 함께 냈다.

음악은 어느 새 한 바퀴 다 돌아 '마리아 엘레나(Maria Elena)'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냇 킹 콜의 마리아 엘레나는 좀 느려.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이 맞춰서 춤추던 정도의 템포가 딱 좋을 텐데'.

사내는 내가 내미는 와인잔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잔을 들어 불빛에 비춰보았다. '이런! 좋은 징조인데! 허겁지겁 안주부터 먹거나 벌컥벌컥 와인을 마시기부터 하지 않고 빛깔부터 살피다니... 와인 잘 모른다고 했던 것 같은데, 배우는 게 정말 빠른 친구군!'

"색깔이 굉장히 투명하고 상큼해 보이네요. 꼭 레몬즙 같아요."

"그렇죠? 향과 맛도 한 번 보시죠."

그는 천천히 와인잔을 기울여 입안에 와인 한 모금을 물고 음미했는데, 그 모습이 자못 진지해 보였다.

"뭐랄까, 첫 맛은 좀 희미하고 밍밍한 느낌인데 살짝 돌멩이 같은 데서 나는 향이 도는 것 같아요."

"오! 그건 와인에서 미네랄 향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처음에 그 맛 구분해내기 쉽지 않은데, 어떻게 아셨어요?"

나는 정말 놀랐다. 와인의 여러 아로마 중에서도 미네랄 아로마는 경험 없는 초보자는 정말 알기 힘든 맛인데 그는 단번에 그걸 맞춘 것이다.

"하하, 그런가요? 제가 원체 호기심이 많아서 어릴 적에 사람들이 금을 이빨로 씹는 걸 보고 저러면 금인지 알 수 있나 해서 금광석을 씹어본 적이 있거든요. 딱 그 때 느꼈던 그 맛이 나더라구요."

'피노(pinot)'는 마치 솔방울 같다고 해서 붙여진 품종의 이름

이 사람은 대체 뭐지? 일전에도 단박에 처음 마셔보는 와인들의 특징적인 향을 맞추더니 이젠 어릴 적 호기심으로 씹어본 금광석의 맛에 대한 기억으로 미네랄 아로마를 집어 내다니...

놀라는 내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다시 한 모금을 입에 물고 천천히 굴리면서 맛을 보고 있었다.

"음, 조금 전보다 더 향긋해졌어요. 이건 꼭 꽃향기 같네요. 맞아요. 이것도 기억나는 맛이에요. 아카시아 꽃이에요. 하얗게 주렁주렁 핀 아카시아 꽃. 어렸을 적에는 친구들과 들로 산으로 놀러 다니다 아카시아 꽃을 보면 곧잘 따먹곤 했어요."

"정말 와인 처음 드시는 분 맞나요? 일전에도 느꼈지만 감각이 정말 대단하세요."

"하하, 칭찬이시죠? 감사합니다. 원체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 궁금한 게 있으면 꼭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그러다 보니 그런 기억들이 좀 많은 편인가 봐요. 근데 이건 무슨 와인이죠?"

"이 와인은 이탈리아 북부 프리울리 주의 대표적인 화이트 품종인 피노 그리지오(pinot grigio)로 만든 몽그리스(Mongris)라는 와인입니다. 

와인용 포도에는 여러 종류의 품종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피노(pinot)'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는 품종들은 포도알이 작고 조밀하게 붙어 있어서 마치 솔방울 같다 보니 소나무를 가리키는 프랑스어 '핀(pin)', 혹은 이탈리아어 '피노(pino)'에서 이름을 따 온 거구요. 이런 품종들의 대표선수 격인 '피노 누아(pinot noir)'는 포도껍질의 색이 검은 빛(누아, noir)을 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피노 누아 품종은 다시 몇 가지 변종을 파생시켰는데, 껍질의 색이 회색빛을 띤다 해서 프랑스에서는 '피노 그리(pinot gris)', 이탈리아에서는 '피노 그리지오(pinot grigio)'라고 불리는 품종과, 우리가 아는 청포도 같은 색을 띠는 프랑스의 '피노 블랑(pinot blanc)', 이와 같은 품종인 이태리의 '피노 비안코(pinot bianco)' 등이 있죠.

이름이 길고 어렵게 들리지만 뒤에 붙은 단어들은 단순히 색깔을 나타내는 형용사에 불과하니까 연관된 단어들을 생각하시면 기억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피노 그리지오의 그리지오(grigio)는 회색을 가리키는 말로 영어의 그레이(grey)와 어원이 같답니다.

그런데 이 피노 그리지오는 우리나라에서는 같은 화이트 와인인 샤도네이나 소비뇽블랑에 비해서 덜 알려져 있고, 처음 마셨을 때 상대적으로 밍밍한 느낌 때문에 인기가 별로 없는 편인데요, 사실 우리가 좋아하는 생선회, 그 중에서도 흰살 생선회와는 정말 멋지게 어울리는 와인입니다. 이제 이 숙성된 도미 카르파치오를 드시고 와인을 다시 마셔 보세요."

이탈리아 북동부 프리울리 주에서 재배되는 피노 그리지오 품종으로 빚은 화이트 와인 '몽그리스(Mongris)'. 피노 그리지오는 피노 누아의 변종인 포도 품종으로 포도 껍질이 회색을 띠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흰살 생선회와 함께 마시면 음식과 술의 맛이 놀랍도록 동반 상승되는 멋진 마리아주(mariage)를 경험할 수 있다. ⓒ 이건수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설명을 듣고 난 후, 도미 카르파치오 한 점을 입에 물고 천천히 씹었다. 숙성된 도미의 찰진 식감과 달달한 맛이 만족스러웠던지 미소를 지으며 와인 한 모금을 마시던 그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이건 대체 무슨 조화죠? 아까는 은은한 꽃향기가 돌긴 했지만 사실 좀 싱겁다 싶었는데, 지금 회랑 같이 먹으니 마치 완전히 다른 와인 같은데요! 도미회만으로도 감칠 맛이 있고 입안에서 꽉 차는 느낌이었는데, 와인과 섞이니 마치... 마치..."

그는 뭐라고 적당한 표현을 찾기 어려운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조미료라도 뿌린 것 같이 극적으로 맛이 바뀌죠? 와인과 회가 풍성하게 어울리면서 도미회의 감칠 맛은 더해주고 와인은 향이 더 짙어진 것 같지 않나요?"

"예, 예! 맞아요! 정말 그런 느낌이에요."

"바로 그 느낌이 일전에 말씀 드렸던 '마리아주', 즉, 와인과 음식의 조화에요. 피노 그리지오는 그 자체로는 개성이 약한 것 같지만 잘 숙성된 흰 살 생선회와 맛나면 놀랍도록 극적으로 맛의 상승 효과를 내면서 음식과 술이 모두 정말 맛있어지죠. 

그래서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샤도네이 못지 않게 인기가 있고 매니아층이 형성돼 있을 정도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어 있어서 오히려 가성비는 더 훌륭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 피노 그리지오를 생선회에 곁들여 마시다 보면 그 맛의 변화가 마치 마법처럼 느껴져서 곧잘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에 비교하기도 하죠."

"한 여름 밤의 꿈이요?"

"예. 그 희극에서는 한 여름 밤, 즉 낮이 가장 긴 하지의 전날 밤에 서로 엇갈린 사랑을 품은 네 남녀가 마법의 꽃즙을 잘못 바르면서 엉뚱한 상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유쾌한 사건들을 그리고 있는데요. 거기에 나오는 마법의 꽃즙을 잘 때 눈에 바르면 깨어나서 처음 보는 상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답니다. 

이 피노 그리지오는 특징적인 아로마 중 하나로 흰 꽃, 말하자면 아카시아 꽃 같은 향기도 가지고 있고, 생선회와의 극적인 마리아주를 경험하면 그 다음부터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멋진 와인이거든요, 그래서 마치 한 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마법의 꽃즙 같다고 하는 거죠. 물론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합니다만. 하하하."

"정말 그렇네요. 사장님 설명 듣고, 실제로 그런 경험까지 하고 났더니 왠지 이제부터는 이 와인과 사랑에 빠질 것만 같아요. 사실 저도 이런 와인은 아니지만 전에 중국 갔을 때 그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거든요."

"참, 중국 가신 적이 있다고 하셨죠? 어떠셨어요? 저도 중국은 꽤 자주 갔던 편이긴 하거든요."

"말도 마세요. 중국 여행 자체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나름 출장이었던 데다, 첫 해외 여행이라 정말 신기한 것 투성이에 보고 들은 것, 느낀 점도 많아서 다녀온 후에 최대한 자세히, 그리고 재미있게 보고서를 쓴다고 썼는데, 윗분이 읽으시더니 화를 버럭 내시면서 이게 소설이지 무슨 보고서냐, 후배들이 뭘 배우겠냐고 노발대발하시면서 다시 써오라고 얼마나 혼을 내시던지, 정말 눈물콧물 쏙 뺐죠. 그래도 가 있는 동안은 정말 재미있긴 했어요."

"그러셨군요, 정말 우울하셨겠어요."

그는 대답을 않은 채로 가만히 와인잔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던 듯 했다. 계속 묻자니 실례일 듯 하여 나도 말 없이 와인 한 잔을 따라 마셨다.

"아까는 너무 덥고 지쳐서 입맛이 영 없었는데, 멋진 와인에 음식들이 들어가니 오히려 배가 더 고파지네요. 뭔가 좀 배불리 먹을 만한 건 없을까요?"

"그러세요? 그럼 이 음식에 이 와인을 드셔보시는 건 어떨까요?"

(※ 6화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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