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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7.27 09:07수정 2018.07.27 11:53
"사장님은 요리하는 분 같지 않아요."

내 말에 그는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아까 보니 간판이 특이하던데, '1001'은 무슨 뜻이에요? 그 밑에 'M.U.N'이라고 쓰여있던데... 사장님 성이 문씨인가요?"

"그건 천하룻밤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이탈리아어로 '밀레 에 우나 노테(Mille eUna Notte)'라고 읽는데, 그 약자를 따서 'M.U.N'이라고 쓴 거죠. 달을 뜻하는 문(Moon)과 발음이 비슷해서 그렇게 적은 거기도 하구요."

"천하룻밤이요?"

"예. 아라비안 나이트는 아시죠?"

"그럼요, 왕한테 살해 당하지 않으려고 매일밤 왕비가 재미난 얘기를 들려줬다는 그 얘기죠?" 

"맞습니다. 원래 아랍어로 쓰인 설화집 <천하룻밤 이야기>를 영어로 번역한 책이 <아라비안 나이트(Arabian Nights)>이고, 이걸 다시 우리나라에서 번역할 때는 원 제목에 충실하게 '천일야화(千一夜話)'라고 번역한 거죠.

이야기는 이렇죠. 왕비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걸 보고 분노한 페르시아의 샤리아르 왕이 그 다음부터 왕비를 새로 맞을 때마다 첫날밤만 지내고 그 다음날 아침에 죽여버렸어요. 그런데 현명한 재상의 딸 셰헤라자드가 왕비가 되면서 왕에게 매일밤 재미난 얘기를 들려주니까 왕이 그 이야기에 빠져 천하룻밤 동안이나 죽이지 않고 얘기를 들었죠. 결국 왕은 뉘우치고 왕비와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죠.

줄거리도 재미있지만 거기에 등장하는 온갖 이야기들이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신밧드의 모험', '알라딘과 마법의 램프'처럼 지금 읽어도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라 더 유명하죠."

"그럼 아라비안 나이트를 좋아하셔서 상호를 그렇게 붙인 건가요?"

"하하하, 물론 아라비안 나이트를 좋아하긴 하지만, 책 이름에서 따온 것만은 아닙니다."
"네?"

천하룻밤을 뜻하는 '밀레 에 우나 노테(Mille eUna Notte)'

기껏 천하룻밤이 상호라고 얘기하고 아라비안 나이트까지 설명해놓고 거기에서만 따온 이름이 아니라니? 무슨 다른 사연이라도 있다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는 내 표정을 보며, 다시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주방 뒤쪽에서 다시 와인 한 병과 와인 글라스 두 잔을 들고 돌아왔다.

"처음 오신 손님께 괜히 빙빙 돌려 얘기해서 실례를 했네요. 괜찮으면 이 와인은 제가 사과의 의미로 한 잔 대접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익숙하지 않은 와인에 값도 얼마인지 몰라 부담을 느끼는 내 표정을 눈치챘는지,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익숙하게 코르크 마개에 와인 오프너를 꽂았다.

"괜찮으니 부담 갖지말고 드셔보세요. 저도 마침 오늘은 적적하던 터라 그냥 핑계삼아 편하게 와인을 한 잔 마시고 싶네요, 하하하."

이렇게까지 권하는 데야 사양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코르크 마개가 열린 와인 병에서 놀랍도록 신선하고 달콤한 과일 향이 퍼져 나와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았다.

딸기 향인가? 아니, 딸기 향보다는 좀 더 묵직하고, 더 짙은 느낌인데... 아주 오래 전에 먹었던 짙고 검붉은 색 열매의 향에 대한 기억이 코 끝을 통해 밀려왔다.

"아, 이건... 체리 향인가요?"

이번에는 그가 놀랐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셰리주 드실 때 짐작은 했지만, 손님은 감각이 뛰어나시군요. 와인을 따라 드리는 보람이 있는데요. 하하하."

그는 가볍게 와인 병의 아래쪽을 잡고 내 와인 잔에 짙은 보라빛 와인을 천천히 따랐다. 위쪽을 향해 경사진 와인 잔의 벽을 타고 와인이 흘러내리자 체리향이 더 짙게 풍겨왔다. 이렇게 신선하고 검붉은 느낌의 즙이 많은 체리를 먹은 게 언제였을까.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돈나푸가타(DonnaFugata) 와이너리의 대표 와인인 '밀레 에 우나 노테(Mille e UnaNotte)'.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모티브를 따온 '천하룻밤'이란 뜻이다. '돈나푸가타'라는 와이너리 이름은 나폴레옹의 박해를 피해 시칠리아로 피난 온 나폴리 왕국의 왕비 마리아 까롤리나의 피난처가 바로 이 와이너리였던 데서 유래됐다. ⓒ 이건수


그는 두 잔의 바닥에 살짝 깔리는 정도로 와인을 따른 후 잔의 받침 부분에 손을 얹은 채 가볍게 잔을 돌렸다. 그의 손놀림을 따라 잔이 부드럽게 돌아가고, 그 안의 와인도 잔의 벽을 타고 돌아가자 와인의 향이 더욱 짙어졌다.

"이렇게 돌리는 걸 '스월링(swirling)'이라고 합니다. 병 속에서 잠들어 있던 와인이 공기와 더 많이 접촉하도록 해줘서 잠에서 깨어나 그 원래의 향과 맛을 내도록 도와주는 거죠."

이윽고 그는 잔 돌리기를 멈추고 와인 잔을 들어 그 안 깊숙이 코를 댄 채 향을 맡았다. 나 역시 그를 따라 해보았다. 처음 느꼈던 체리 향에 좀더 복잡하고 다양한 향기들이 콧속을 간지럽혔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향을 맡다가 조금씩 입 안에 머금어 맛을 보았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와인을 입 안에 굴려보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마실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참 사랑스런 와인입니다. 아까 체리 향이 난다고 하셨죠? 지금 향을 맡고 드셔보니 어떠세요?"

"음, 처음엔 체리 향만 났는데... 이렇게 잔을 돌리고 향을 맡아보니 꽃 향기도 나는 것 같네요. 무슨 꽃인지는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지만... 뭐랄까, 여자들의 향수 같은 느낌도 좀 있구요. 그런데 막상 맛을 보니 향을 맡을 때보다는 더 묵직한 느낌이에요. 혀를 살짝 조이는 것 같기도 하고. 딱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힘든 복잡한 느낌이지만, 아무튼 굉장히 맛있네요."

그는 말없이 웃으며 내 잔에 와인을 1/4쯤 채우고 자기 잔에도 더 따라서 가볍게 건배하는 시늉을 했다. 나도 급하게 두 손으로 와인 잔을 들어 건배를 하려고 했는데, 그가 손을 내저었다.

"하하, 우리나라 식으로 그렇게 두 손으로 건배할 필요는 없어요. 와인은 그냥 가볍게 한 손에 들고 상대방 눈높이 정도로 들어 건배하는 시늉만 해도 돼요. 실제로 건배할 경우에도 잔을 가볍게 대기만 한다는 생각으로 하면 되구요."

"그나저나 이 와인 이름이 뭐죠? 비싼 와인이죠? 단맛이 아주 살짝 나는데, 설탕같이 단맛은 아니구요. 그냥 고급스런 달달한 느낌이 혀에 남는데요."

"그건 감초의 단맛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그가 와인 병의 푸른색 라벨을 내 쪽으로 돌려 보여줬다. 푸른색 배경은 밤하늘이었나 보다. 별들이 빛나는 밤 하늘 아래에 성으로 보이는 큰 저택, 그리고 야자수와 일렬로 늘어선 나무들 같은 것이 보였고, 그 밤 하늘 위로 한 여인의 얼굴과 금빛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피난처의 여인'을 뜻하는 돈나푸가타(Donna Fugata)

"밀레... 에... 우나... 노테(MILLE e unaNOTTE)? 어? 이게 아까 그...?"

"예, 바로 그 천하룻밤을 이태리어로 옮긴 '밀레 에 우나 노떼'입니다. 저희 가게의 이름은 아라비안 나이트와 이 와인의 천하룻밤에서 따온 겁니다."

그는 잔을 들어 다시 와인 한 모금을 마셨고, 나도 따라 마셨다. 그가 얘기한 감초의 달달한 느낌 뒤로 나무에서 나는 것 같은 향이 났다.

"이젠 참나무 향도 나죠?"
"이게 참나무 향인가요?"
"예, 굳이 와인식 표현법을 빌리자면 오크 향이죠."

그가 라벨 아래쪽을 가리켰다.

"이 와인은 시칠리아 와인 명가인 돈나푸가타(Donna Fugata)의 대표 와인인 '밀레 에 우나 노테'입니다. 천일야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기도 하지만 이 와이너리의 이름에는 또다른 사연이 있어요. 돈나푸가타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피난처의 여인'이란 뜻인데요.

19세기 프랑스 대혁명에 이어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자 대혁명 때 처형당한 루이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언니이자 나폴리 왕국의 왕비였던 마리아 까롤리나가 나폴레옹을 피해 시칠리아로 도피했어요. 그때 그녀가 묵었던 거처가 지금의 돈나푸가타 와이너리랍니다. 라벨에 궁전 그림이 보이죠? 그 곳이 돈나푸가타 와이너리 건물이고, 그 옆에 보이는 나무들이 포도나무예요. 와인 이름 위에 있는 여인의 얼굴이 바로 마리아 까롤리나의 얼굴이랍니다."

"시칠리아요?"

"네. 혹시 마피아 생각하셨나보군요? 하하, 물론 마피아가 시칠리아의 어두운 역사인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사실 시칠리아는 로마시대 이후 이탈리아 역사 속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장소예요. 짧지만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이 공존했던 몇 안 되는 곳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죠."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와인으로, 이제는 시칠리아의 역사라... 나는 갈수록 그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졌지만, 차마 그의 말을 끊지 못했다.

"고대 로마는 지금처럼 밀이 주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이 갈수록 커지고 도시 로마가 제국의 수도로서 인구가 급증하고 행정도시 기능이 늘어나면서 이탈리아 본국의 밀 생산량만 갖고는 식량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거죠. 그래서 전통적으로 밀의 주산지이자 섬이지만 육지에서 가까워 운송이 용이한 시칠리아가 로마의 주요 곡물 공급처가 됐답니다."

이탈리아 지도.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 반도에서 발 앞꿈치 바로 앞에 있는 섬이 시칠리아다. 로마제국 시대부터 밀의 주산지로서 제국의 식량 공급을 책임졌고, 북아프리카와 중동, 그리스에서 모두 가까워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진 문화적 완충지대이기도 했다. ⓒ 두산백과사전


어안이 벙벙해하는 내 얼굴을 보자, 그는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을 돌렸다.

"하하, 제 얘기가 옆으로 샜죠? 죄송해요."
"아뇨, 아뇨. 너무 재미있어요. 이런 얘기들은 별로 들어보질 못해서요."

"제가 원래 이런 얘기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너무 혼자 떠드나 싶어 말해놓고 후회할 때도 많죠. 사실 저희가게 상호도 이렇게 손님들과 잡다한 얘기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 천하룻밤이라도 떠들 것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거든요."

그제서야 '1001 M.U.N'이라는 상호의 의미를 알게 된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요리도 그 쪽에서 배우셨나 봐요."

그는 어느새 비워버린 내 와인 잔에 다시 '밀레 에 우나 노테'를 채워줬다. 와인의 유래를 들어서일까? 조금 더 깊어진 것 같은 향에 여인의 향기같은 느낌이 더해지고 있었다. 관능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남자들끼리 마시기에는 뭐랄까, 좀 아깝죠? 그래도 이 와인을 마시다보면 정말 여러가지 기억들이 떠올라서 참좋습니다."

"요리도 그 쪽에서 배우셨나보죠?"

그는 또 아무 대답없이 웃기만 했다.

"오늘은 너무 늦어서 요리 대접은 못하겠네요. 이렇게 하시죠. 며칠 뒤에 오시면 그 때는 제가 또 다른 와인과 거기에 어울리는 요리도 맛보여 드릴께요. 화려하진 않지만 나름 드실만할 겁니다."

"그때도 오늘같이 와인 얘기도 해주실 건가요?"

"그럼요. 대신 언제 오실지 미리 말씀만 해주세요. 재료 준비해 놓을께요."

나는 내일 당장이라도 다시 오고 싶었고, 왠지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지만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나도 이런저런 고민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다시 뵙게 될 것 같긴 한데... 아무튼 오기 전에 가급적 연락드리고 올게요. 그런데 전 낮에 오긴 힘들고, 와도 이렇게 밤 늦게나 올텐데 괜찮을까요?"

"미리 연락만 주면 괜찮습니다. 혹시 연락 못 주더라도 오늘처럼 간단한 치즈 정도는 언제든 드릴 수 있으니 술 생각 나면 그냥 편하게 들러주세요."

"예, 오늘 이런 저런 이야기 너무 감사했어요. 술도요. 다음에는 꼭 돈 내고 마실게요."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나는 몇 번씩 인사하는 그의 배웅을 받으며 이미 별빛도 거의 없는 밤거리로 나섰다. 가게의 불빛이 멀어지자 마치 마취라도 깬 듯 머리가 다시 아파왔다.

'밀레 에 우나 노테... 천하룻밤이라...'

어느덧 첫날밤이 새고 있었다.

(※ 3화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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