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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7.20 11:29수정 2018.07.20 13:11
상사맨 출신 파이가게 주인 이건수씨가 모든 지식과 감각을 총동원해 소설처럼 읽다보면 와인과 요리, 그리고 관련된 잡학지식까지 머리에 남겨줄 노블칼럼을 연재합니다. 이 연재는 가상의 술집인 '1001 M.U.N'이 무대입니다. 그러나 와인과 역사에 대한 내용은 실제입니다.

어느 날 이 곳을 찾은 한 손님이 술집 주인으로부터 다양한 술과 음식, 그리고 거기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들을 마치 아라비안나이트 속의 얘기들처럼 듣게 되고 독자들은 그 손님의 눈과 귀로 에피소드들을 따라가며 어렵게만 느껴졌던 와인의 세계, 음식의 역사를 보다 쉽게 접하게 됩니다. [편집자말]
복잡한 생각에 몇 시간이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어딘지도 모를 거리에서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대부분 불 꺼진 가게들 사이로 보이는 작은 가게 한 곳만 불이 켜져 있었다. 자욱한 안개와 먼지 뒤로 희미하게 빛나는 간판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 '1001', 그리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M.U.N'이라는 알파벳만이 깜빡이는 조명을 받고 있었다.

'술집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달랑 2인용 테이블 두 개만 놓여있는 공간에 주인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와인 글라스 한 잔을 돌려가며 책을 읽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일어서며 자리를 권하는 그의 앞에 놓인 책을 흘깃 봤다. '신곡? 단테?' 놀라는 눈치를 챘는지 주인장이 웃었다.

"식당에서 읽을만한 책은 아니죠? 하하, 앉으세요. 뭘 드릴까요?"
"뭐가 있나요?"
"글쎄요… 시간이 늦어 남은 재료가 별로 없네요. 치즈 안주라도 괜찮다면 와인은 있습니다만…"
"예, 그럼 한 잔 주세요."

주인장은 빙긋 웃으며 내 앞에 작은 와인 글라스를 놓고 짙은 호박색의 액체를 따라주었다. 술이 차가웠는지 작지만 날렵하게 경사진 와인 글라스에 금세 서리가 끼었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주정강화 와인이자 식전주인 아페리티프(Aperitif)로 사랑받는 셰리 와인. 그 중에서도 드라이 타입의 쌉싸름한 맛이 나는 '올로로소(Oloroso)'. 셰리는 이 와인의 원산지인 스페인 북부의 헤레즈(Jerez)의 옛 이름인 셰레스(Xeres)가 영국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잘못 전달돼 붙여진 이름이다. ⓒ 이건수


"와인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이건 양주 같은데요?"
"아뇨, 와인 맞습니다. 드셔보세요."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짓는 그의 표정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기에 권하는대로 와인 글라스를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응?' 그가 따라준 술에서는 마치 국간장 종지에서 나는 것 같은 쿰쿰한 냄새가 났고, 이전에 내가 마셔본 몇 안 되는 어떤 와인들과도 다른 씁쓰레하면서 묘한 맛이 났다.

"와인 맞나요? 이런 맛은 처음인데요?"
"너무 빨리 드셔서 향을 제대로 못 느끼셨을 겁니다. 잔을 살짝 돌렸다가 코 밑에 대고 향을 맡아보세요. 그리고 입에 한 모금 정도 머금고 굴려보세요."

그가 시키는대로 천천히 음미했다. 놀랍게도 처음에 간장 냄새라고 느꼈던 향 뒤로 흑설탕같은 달달함이 스쳤다. 한 모금을 입에 넣고 굴려보았다. 마치 소나무향 음료를 마시는 것 같은 씁쓰레함에 혀가 움츠러들었다.

생소한 맛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억지로 목구멍으로 넘기려는 순간, 갑자기 땅콩잼을 먹었을 때 같은 고소한 맛, 아니 향기라고 해야 할까? 분명히 음식을 씹을 때 같은 맛은 아닌데 남은 여운은 마치 땅콩을 먹은 것 같은, 아니 땅콩도 아닌데… 뭐라고 딱히 꼬집기 애매한 고소한 향이 입 안을 온통 채웠다.

"'셰리'라고 하면 혹시 위스키에 써 있는..."

그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아몬드향이 나죠?" 아, 맞다. 아몬드향. 언젠가 생아몬드를 먹었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네, 꼭 볶지 않은 아몬드를 먹었을 때처럼 씁쓰레한데 뒷맛은 고소한 느낌이네요. 이런 맛은 처음인데요. 대체 이게 무슨 와인이죠? 간장 향기도 나고."
"하하하, 이건 '아페리티프(Aperitif)'로 많이 마시는 스페인의 셰리(Sherry)라는 주정강화 와인입니다."

분명 그는 한국어로 얘기하고 있는데, 나는 그의 말을 하나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아페리티프? 셰리? 주정강화 와인?

"'셰리'라면 혹시 위스키에 셰리 어쩌고 저쩌구 써 있는 그 셰리인가요?"
"맞습니다. 바로 그 위스키가 이 셰리 와인을 숙성시킨 오크통에 위스키를 숙성시켰다는 뜻입니다. 한 모금 더 드셔보세요."

'간장 냄새를 또 맡으라니…' 하고 와인 글라스를 코 밑에 대자 처음보다 옅어진 간장 냄새에 섞여 밀크 카라멜같은 달달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어? 향이 변했네요."

입에 와인 한 모금을 물자, 혀 위에서 느껴지는 맛도 처음의 소나무향보다는 좀더 부드러워져 새콤한 맛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입에 머금었던 와인을 목구멍으로 넘기자 아랫배에서 뜨끈한 기운이 가슴을 타고 올라왔다.

"도수가 센가 본데요?"
"예, 도수가 18.5도니까 요즘 마시는 소주보다 약하지 않죠. 사실 이 와인은 브랜디를 첨가해서 더이상 발효되는 걸 막고 오래도록 저장이 가능하게 한 와인입니다. 그래서 주정강화 와인이라고 하는 거죠."

위스키나 브랜디 같은 양주와도 흡사하지만 좀 더 짙은 호박색이 나는 셰리주. 셰리주는 숙성 방법과 당도, 그리고 빛깔 등에 의해서 다시 여러 종류로 분류되는데 사진은 셰리주 중에서도 공기와 접촉시키는 산화숙성을 통해 만드는 '올로로소(Oloroso)'다. ⓒ 이건수


뜨뜻한 술기운이 어느새 머리까지 올라와 기분좋게 퍼지고 있었다.

"처음엔 진짜 이상했는데, 느낌이 의외로 좋은데요?"
"좀 더 드릴까요?"

내가 채 대답도 하기 전에 그는 이미 내 잔에 와인을 더 따라주고 있었다. "서비스입니다." 유쾌하게 웃으며 안주 준비를 하겠다고 주방 쪽으로 들어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가게 내부를 천천히 둘러봤다.

식탁 옆의 작은 책꽂이에는 헤밍웨이의 <무기여잘있거라>, <누구를위하여종은울리나>, 멜빌의 <모비딕> 같은 책 사이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가 보이는가 하면 얼핏 이름을 알 수 없는 외국 서적들도 여러 권 꽂혀 있었다. 여닫이문 하나로 구분되어 있는 주방은 손님 자리보다 몇 배는 더 넓어보였다.

"책을 좋아하시나봐요."

내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그는 몇 가지 치즈들과 녹색 올리브가 담긴 작은 나무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드셔보세요. 이주황색 치즈는 영국의 명품 치즈인 레드 레스터(Red Leicester), 그리고 이건 스페인의 양젖으로 만든 만체고(Manchego) 치즈입니다. 올리브는 속에 씨가 있으니 씹을 때 조심하세요."

"'아페리티프'는 열다는 뜻의 라틴어..."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이름들에 왠지 놀림을 당하는 것 같아 살짝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딱히 놀리는 기색을 찾을 순 없어서 가장 위에 있던 주황색 치즈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부드러운 치즈 맛이 셰리 와인 마신 후 침이 고이기 시작한 혀 위를 크림처럼 덮었다.

"음, 맛있네요. 셰리 와인은 도수는 높은데 마시고 나니 혀에 침이 고이는데요? 치즈는 너무강하지 않아서 좋구요."

기분 탓이었을까.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 살짝 놀라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손님은 술을 좋아하나보군요. 감각 표현이 정확한데요."
"아뇨, 술은 잘 몰라요. 그냥 느껴지는대로 말씀 드린건데요."

그의 눈빛이 조금 더 진지해졌다.

"그런가요. 미각이 좋은가 보네요. 조금 더 드셔보세요."

어느새 내 와인 잔은 살짝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셰리를 '아페리티프', 즉 식전주로 마시는 건 지금 손님이 말씀하신 그런 느낌 때문입니다. 적당한 산미가 혀를 깨워주고 소화기관도 활발하게 해줘서 그 다음에 이어지는 식사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해주는거죠. '아페리티프'는 개시하다, 열다는 뜻의 라틴어 '아페리오(aperio)'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와 반대되는 말로는 소화를 뜻하는 라틴어 '디제스티오(digestio)'에서유래한 '디제스티프(digestif)', 즉 식후주가 있죠. 보통 아페리티프는 쌉싸름하고 좀 산미가 있는 셰리같은 와인이나 칵테일을 마시고, 디제스티프는 같은 주정강화 와인이지만 당도가 있는 포트 와인(port wine)이나 도수가 높은 증류주를 마신답니다."

나는 어느새 그의 얘기를 마치 학생같은 느낌으로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렇군요. 처음 알았어요. 그런데 외국어라 그런가 이름 외우기는 너무 힘들겠네요."
"하하하, 그렇죠? 그래서 보통 전 지인들에게 쉽게 앞에 마시니 '아페리티프', 뒤에 마시니 '디제스티프'… 이렇게 외우라고 한답니다."
"하하, 정말 외우기 쉬운데요. 앞에 마셔서 아페리티프라…"

"그럼 셰리라는 이름은요? 만든 지역 이름인가요?"
"오~ 맞아요! 원래 이 와인의 원산지는 스페인의 헤레즈(Jerez)라는지역인데요. 이 지역의 옛 지명이 셰레스였거든요. 셰레스산 와인이 영국에 전해지면서 셰리로 바뀐 거죠. 술도 음식만큼이나 국제 무역이나 전쟁에 얽힌 사연이 많아요."

그의 얼굴은 어느새 강의하는 강사처럼 진지해져 있었고, 말투도 조금씩 열기를 띠어갔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이 술집과 주인의 내력이 몹시 궁금해졌다.

"사장님은 요리 하는 분 같지 않아요."

내 말에 그는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아까 보니 간판이 특이하던데, '1001'은 무슨 뜻이에요? 그 밑에 'M.U.N'이라고 쓰여 있던데… 사장님 성이 문씨인가요?"

그가 웃으며 답했다. "그건요…"

(※ 2화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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