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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동과 대전에는 애국지사와 전몰장병, 국가유공자들이 안장된 국립묘지가 있다. 북한 역시 평양 인근 신미리와 용미리에 각각 혁명열사릉, 애국열사릉을 조성, 관리해 오고 있다.

한편 6·25 때 북으로 간 민족진영 인사들은 평양 신미리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특설묘지'에 따로 묻혀 있다. 이곳에는 국학자 담원(위당) 정인보 선생을 비롯해 고려대 총장 현상윤,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 독립운동가 박열, 제헌의원 노일환, 미군정 대법원장 이종성 등 23명이 묻혀 있다.

'남북이 함께 하는 잡지' <월간 민족21>은 방북취재를 통해 분단 52년만에 처음으로 특설묘지를 현장답사했다. 북으로 간 이후 그들의 삶과 최후, 그리고 안식처를 관계자의 증언과 사진으로 소개한다.<편집자 주>


정인보 현상윤 백관수 박열 송호성…

▲ 평양 신미리 재북통협 특설묘지에서 묘지에 안장된 인사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흥곤 선생.
<민족21>이 6·25때 북으로 간 민족진영 인사들이 묻혀 있는 평양 신미리 특설묘지를 분단 이후 최초로 현장답사했다.

이는 쉽게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다. 4년에 걸친 요청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그 시작은, 삼균주의를 제창해 이를 임시정부의 주요 이념으로 도입했던 조소앙 선생의 비서로 그와 함께 북으로 갔던 김흥곤 선생(78)과의 인연이었다.

전쟁 중 자의든 타의든 북으로 갔던 김규식, 조소앙 등 많은 민족진영 지도자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다. 그들의 운명에 대해 증언해줄 거의 유일한 생존인물이 바로 김흥곤 선생이다.

1956년 이들 민족진영 인사들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이하 통협)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는 1948년 남에서 그들이 결성했던 통일촉진협의회(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활동을 북에서 계속한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김흥곤 선생은 현재 통협의 고문을 맡고 있다.

기자가 거듭 취재요청한 끝에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999년 9월. 180cm는 될 듯한 큰 키에 무게 있는 면모였다. 전남 광주 출신이라 했는데 50년 세월에도 전혀 변하지 않은 호남 말씨가 인상적이었다.

“개성-사리원-평양으로 온 것 아니다”

남에서 온 젊은 기자를 반갑게 맞아줄 줄 알았는데 김흥곤 선생은 첫 대면부터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들에 대한 그간 남측 언론과 출판물들의 보도가 정확하지 않았다는 항의였다.

“전쟁 때 이미 돌아가신 분이 60년대에 무슨 활동을 했다고 하질 않나, 우리가 온 길도 개성-사리원-평양이 아니야….”
선생은 탁자를 치며 계속 목소리를 높였다.
글쎄, 그게 그런 게 아니고….
“뭐가 아니야? 그럼 우리 통협이 납치창고란 얘기야?…."

어렵게 만난 귀중한 취재원에게 증언은 못 듣고 혼만 나고 가는 것 아닌가 초조해 하던 중 김흥곤 선생이 들고온 검정 서류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깨알같은 글씨로 빽빽히 기록한 문서였다.

“기자가 보낸 인터뷰 질문 요지를 읽어보니 우리 문제에 대해 상당히 연구를 한 사람이야.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왔는데 정확히 해야 하니까 나도 답변을 기록해 왔다구. 돌아가서 정확히 보도하시오.”
살았다 싶었다. 듣던 대로 지모와 담력을 겸비한, ‘조소앙의 오른팔’다웠다.

▲ 애국렬사릉에 모신 민족주의인사들의 묘지 배치도

인터뷰 며칠 후가 추석이었다. 기자는 ‘북녘의 성묘’를 취재하러 나섰다. 먼저 '애국렬사릉'에 갔는데 거기서 뜻밖에 김흥곤 선생과 다시 만났다.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류동열 선생 등 애국렬사릉에 모신 민족주의인사들의 묘에 성묘하러 왔다고 했다.

- 다른 분들은 어디 계십니까.
“우리 통협 특설묘지가 삼석(평양시 삼석구역)과 신미리(평양시 형제산구역)에 있는데 거기 계시오.”

애국렬사릉에 참배한 후 그쪽으로 성묘 간다는 김 선생을 따라가보고 싶었으나 다른 취재 일정들이 잡혀 있어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2000년 4월 김흥곤 선생과 2차로 인터뷰했을 때 특설묘지 답사를 요청했다. 그것이 꼭 2년만인 올해 5월 9일 드디어 실현된 것이다. 이번에 답사한 곳은 신미리 특설묘지. 삼석쪽은 아리랑 공연 참관객들을 위해 도로공사를 벌이고 있어 통행이 어렵다고 했다.


정인보, 50년 9월 7일 황해도 서흥서 폭격으로 사망

▲ 신미리 특별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담원(위당) 정인보 선생의 묘.
평양 고려호텔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애국렬사릉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통협 특설묘지는 자리하고 있었다.

자동차가 산기슭으로 올라간다 했더니 묘지 주차장으로 조성한 듯한 아늑한 공지에 멈춰섰다. 차에서 내려 숲속 오솔길로 10m쯤 걸어 올라가자 특설묘지가 눈에 들어왔다. 경사가 완만한 산기슭에 한 열에 4-5기씩, 총 6열로 조성된 무덤 떼들. 총 23기라 했다. 푸른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묘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무덤마다 서 있는 비석에는 현대사 교과서에서나 보던 낯익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정인보, 현상윤, 백관수, 송호성, 박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혼란스러운 순간이었다. 52년만이었다. ‘이제야 왔다’고 할 것인가 ‘드디어 왔다’고 할 것인가.

정인보 선생의 묘비를 만져 보았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자주 만날 수 있는 익숙한 화강암의 감촉. 묘비 뒤편에는 출생 일자와 사망 일자가 새겨져 있었다. 김흥곤 선생이 다가와 설명했다.

“정인보 선생은 참으로 고매한 인격자지요. 반공주의자였지만 민족주의자로 평화통일을 지지했소. 정인보 선생 묘지를 이곳에 이장해 온 직후 홍명희 부수상이 찾아왔는데 명당자리라고 무척 기뻐했지. 그 분은 비석과 상석을 쓰다듬으며 돌아가신 이와 끝없이 대화를 나누기도 했소. 두 분은 사돈간이지 않소. 정인보 선생의 맏딸 경완이 홍명희 부수상의 둘째아들 홍기무의 아내요.”

- 정인보 선생의 묘지는 원래 어디에 있었습니까?
“1950년 8월 중순에 서울을 출발해 북으로 오던 중 9월 7일 황해도 서흥(신막)에서 폭격으로 애석하게 사망했습니다. 급한 대로 그 지역에 묘를 썼지요.”

- 이 특설묘지가 조성된 것은 언제입니까?
“50년대 전쟁 끝나고는 너무 어려울 때라 못하고 60년대 들어 이 묘지를 조성했지요. 평양에서 멀지 않은 지역 중 풍치 좋은 곳을 찾아 답사 많이 다녔어요. 풍수 보는 사람들이 보면 모두들 명당자리라 할겁니다. 묘터가 수려한 산을 등지고 앉았는데 좌청룡 우백호 다 있고 남쪽으로는 물이 있어. 여기 묘지를 조성해놓고 전시에 돌아가신 분들의 묘를 찾아나섰지요. 황해도 서흥의 정인보 선생 묘를 찾아가 보니 그 일대가 일망무제의 강냉이 밭으로 변해 있어. 할 수 없이 강냉이 가을을 하고 난 후 일대를 샅샅이 탐사하여 평지로 변해버린 무덤을 찾아냈어요.”

- 정인보 선생의 따님은 현재 생존해 있습니까?
“그럼요. 평양 청류동에 살고 있습니다.”

정인보 선생 왼쪽에는 현상윤 선생의 묘가 있었다. 3·1운동에 참여해 2년간 복역했고 중앙고보 교장을 지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예과부장을 거쳐 고려대 총장을 역임했다. 정인보 선생과 마찬가지로 황해도 서흥(신막)에서 폭격으로 부상, 1950년 9월 15일 사망했다는 설명이다.

“그때 서흥에 폭격이 제일 심했습니다. 50년 9월 그곳에서 돌아가신 분들이 많아요. 9월 7일 아니면 9월 15일입니다.”


방응모 사주, 시신 전혀 수습 못해 묘가 없어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 씨가 사망한 곳으로 보도된 곳도 서흥이다. 이를 김흥곤 선생에게 문의했다.

“방응모 사장이 사망한 곳은 서흥이 아니라 개성 송악산 뒤편이요. 임꺽정의 첫 근거지였던 곳이지요. 50년 8월인데 임정요인 김붕준 선생도 그때 함께 사망했소.”

▲ 송호성의 묘
국방경비대 총사령관/1959년 3월 24일 사망
- 방응모 씨의 묘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분의 경우는 워낙 심한 폭격에 희생돼 사망지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어요. 시신을 일부라도 수습할 수 있었으면 가묘라도 썼겠지만 전혀 없었답니다. 그래서 현재도 묘가 없습니다.”

현상윤 선생의 옆은 송호성 선생. 일제시기 신흥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광복군 제2지대장 등으로 항일운동을 펼치다 해방 후 귀국해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김흥곤 선생은 “이름 그대로 호랑이 소리가 나던 분이요. 59년 3월 24일 뇌출혈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전설적 ‘무정부주의자’ 박열. 일제하에서 천황을 암살하려다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로 감형돼 22년을 복역했다.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일본 여성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천황의 사면장을 찢어버렸다가 옥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녀의 무덤은 박열의 고향인 경북 상주에 있다. 그런데 해방 후 귀국한 박열은 전쟁 때 북으로 와 여기 이렇게 누워 있는 것이다. 1974년 1월 17일 72세를 일기로 사망. 김흥곤 선생은 “그 분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야. 민족주의자요” 했다.

▲ 박 열의 묘
독립운동가/1974년 1월 17일 사망
박열의 옆은 백상규 선생.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지냈고 광복 후 민주의원 의원과 2대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서울 최고의 부호로 유명했고 영어를 잘해 여운형 선생이 하지를 만날 때 통역을 맡기도 했다. 1957년 12월 26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백상규 선생 옆은 김용무 선생. 변호사로서 일제하에서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냈고 미군정시 대법원장, 한민당 문교부장, 2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전쟁 중인 1951년 9월 12일 사망.

백관수 선생 옆에 묻힌 김경배 선생은 제헌의원과 2대국회의원, 반민족행위처벌 특별조사위원을 역임했다. 1965년 4월 17일 사망.

이문원, 이구수, 김옥주, 노일환, 김병회, 황윤호, 배중혁 등 이른바 ‘소장파의원’들의 묘 앞에 서자 김흥곤 선생의 설명이 빨라졌다. 입북 당시 30~40대로 선생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었던 동세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구수는 경남 고성 출신으로 일제 때는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고학을 했지요. 제헌국회에서 대통령 선거할 때 자기 이름을 자기가 쓴 인물이요. 그래서 별명이 대통령이지. 부인과 아들이 묘소에 자주 찾아옵니다. 이문원은 올 때 아들 동호를 같이 데리고 왔지요. 김병회는 이 곳에서 아들딸을 두었는데 다들 잘 있습니다. 배중혁은 소장파 중에서 가장 젊은 사람입니다. 당시 나이가 서른이 안되었으니까.”


안재홍, 조헌영, 이광수 등은 삼석 특설묘지에 안장

▲ 평양시 삼석 특설묘지에 있는 민세 안재홍 선생의 묘.
- 민세 안재홍 선생 등 이 곳에 안 계신 분들은 삼석쪽에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안재홍, 김경배, 송호성, 황윤호, 조헌영, 김의한, 백상규, 박열, 김약수, 김병회, 박윤원 등 42명의 통협 성원들과 통협 결성 전에 사망한 정인보, 백관수, 리종성, 현상윤, 리춘호, 허영호, 김상덕, 김동원, 이광수 등 20명의 인사들이 양 특설묘지에 안장되어 있는데 이 곳에 23분, 삼석에 39분이 계십니다. 애국렬사릉에는 지도부 8분이 계시고요. 안재홍 선생은 1965년 3월 1일 75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는데 자신이 남긴 원고들을 출판해 가족 친척 친구들에게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래서 1965년 12월 25일 <안재홍 유고집>을 출판했습니다.”

- 지난 91년, 미국에 있는 이광수의 아들이 북녘의 자기 아버지 묘에 다녀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친일파로 분류되는 인물이 항일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묻혀 있다는 것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데요?
“당시 우리도 그런 논의를 했습니다만 그가 말년에 진심으로 과거를 뉘우치고 참된 문학인으로 거듭나겠다는 각오를 다진 것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우리 특설묘지에 받아들여 묘를 훌륭히 조성했습니다. 이광수는 전쟁 시기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됐는데 만포병원으로 가던 중 1950년 10월 25일 자강도 만포군 고개리 중턱에 이르렀을 때 차 안에서 임종했습니다. 그의 묘를 찾아 이장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 평양시 삼석 특설묘지에 있는 춘원 이광수의 묘.
김흥곤 선생의 설명이 이어졌다.

“사망 당시 그의 묘를 썼던 자리가 계속적인 폭격으로 평지가 되어버렸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 곳에 농촌문화주택(저층아파트)들이 들어섰습니다. 이광수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는 주택을 허물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농민들에게 새 집을 지어 이주하게 하고 묘 자리 위의 집을 허물었지요.”


30년째 특설묘지 벌초 성묘하고 있는 오청수 부국장

약속된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묘지에서 내려오면서 김흥곤 선생과 함께 온 통협 서기국 오청수 부국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명절이면 며칠 전에 미리 와서 할아버지들 수염도 깎아드리고 인사를 올리지요. ‘내일모레 오겠습니다. 그때 많이 잡수십시오.’ 여기 누운 할아버지들은 누워도 남쪽하늘만 보신답니다. 자기 친지들 생각에. 그러나 죽어도 영생하는 분들이 아닙니까? 통일 뒤 할아버지 가족들 만나면 30년 동안 묘지 관리해준 대가로 밥 한 끼는 톡톡히 받아먹을 겁니다.”

취재를 마치고 묘지를 떠나야 할 시간. 50년간 이 곳에 누워 남쪽하늘을 보며 그들은 무엇을 염원했을까. 그것은 염원이 아니라 통곡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생을 걸었던 자주독립과 통일민족국가. 온몸을 던져 막으려 했던 분단. 그러나 그들이 예견했던 것 이상으로 분단체제는 길었고 잔인했다. 그들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무덤에 술 한 잔 부어올릴 날이 빨리 도래하기를 기대해본다.

▲ 백관수의 묘
동아일보 사장/1951년 10월 25일 사망
▲ 이종성의 묘
미군정 대법원장/1956년 2월 19일 사망
▲ 이춘호의 묘
서울대 총장/1950년 10월 9일 사망
▲ 현상윤의 묘
고려대 총장/1950년 9월 15일 사망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남북이 함께 하는 잡지' <월간 민족21>(www.minjog21.com)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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