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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반쪽', 엄마·아빠도 힘내고 싶다
오마이뉴스 - 비정규직 공대위 공동기획

비정규직 800만 시대. 이들은 경제활동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항상 해고의 위험 앞에 서있습니다. 정규직과 똑같이 일하거나 더 힘들게 일하지만 월급은 '반쪽'입니다. 그러나 불만도 이의제기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언제든 고용계약이 파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마이뉴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비정규노동법 개악저지와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workfair.or.kr)와 함께 '월급 '반쪽', 엄마·아빠도 힘내고 싶다'는 제목으로 공동기획을 진행합니다.

이번 기사는 <오마이뉴스>의 '비정규직 체험수기' 응모 글입니다.


"여보 오늘은 몇 시에 퇴근해요?"
"글쎄…."

남편의 대답은 언제나 '글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녁밥을 지어놓고도 남편이 오지 않아 두 번 세 번 데우는 것이 저의 일이었고, 아빠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그 지리한 기다림에 행복의 마침표를 찍어보지도 못한 채 잠이 들기 일쑤였습니다.

아홉 시가 훌쩍 넘은 시간, 남편은 저녁도 못 얻어먹은 초췌한 얼굴로 집으로 들어와서는 씻지도 못한 채 저녁밥상을 마주 대합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할 일이 그렇게 많아요?"
"아니…."
"그럼 왜 이렇게 늦었어요, 애들이 아빠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러게 말이다… 그렇지 뭐…."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봤다가 남편의 가슴만 쓰라리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남편과 저는 결혼 전까지 청바지 장사를 했었습니다. 물건을 주문하고, 가격을 책정하고, 거래처를 정하는 일은 남편의 몫이었고, 사람을 상대해서 물건을 파는 일은 저의 몫이었습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목이 좋은 자리를 정해 하던 장사였기에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부터는 장사를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9개월 동안은 장사를 했습니다.

통풍도 잘 되지 않는 지하나 백화점에서 장사를 하다보면 다리가 퉁퉁 부어올라 신고 있던 신발이 안 벗겨질 정도였지만 그래도 참 열심히 했습니다. 그때가 외환위기가 극에 달할 때였습니다.

외환위기의 한파는 우리에게도 여지없이 불어왔고, 우리들은 겨우 빚만 면한 상태로 장사를 접어야 했습니다.

한 동안은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출산예정일은 화살 끝에 매달린 듯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기저귀 한 장도 준비 못했습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할 줄 아는 건 장사밖에 없던 남편이지만 경기가 풀릴 줄 모르던 그때 빚까지 내서 장사를 다시 시작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택의 여지없이 뛰어든 곳이 바로 건설현장이었습니다.

눈발이 금방이라도 귓불을 베어버릴 듯 추운 12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남편은 손등에 시퍼런 망치자국을 남긴 채 6만원을 벌어왔습니다. 그날 그 6만원을 앞에 놓고 우린 눈물을 국물삼아 밥을 삼켰습니다.

아기 낳을 병원비만 마련하고 하지 말자던 건설 일. 그러던 다짐이 경기 풀릴 때까지만, 아기 돌 넘길 때까지만…. 먹고 사는 일이 당장 급하다 보니 그렇게 보낸 세월이 어느새 5년입니다.

일용직. 하루하루 일당으로 치면 여느 월급쟁이 못지않게 벌이가 괜찮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오는 날 쉬고, 일거리 없어서 쉬고, 다쳐서 쉬고…. 그러다 보면 한 달에 스무날 일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남편은 새벽마다 일거리를 찾아 인력시장으로 나갔지만 사실 들어오는 수입은 한 달 백여만원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 돈으로 당장 먹고살다보니 남편의 미래, 꿈같은 건 생각해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미안한 일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직장을 구했습니다. 일용직 근로자에서 벗어난 것이죠. 맨 처음 150만원을 월급으로 받아왔는데, 천하가 부럽지 않더군요. 그 달에 처음으로 적금이란 것도 넣었습니다. 없는 살림에 아프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어 아이 보험도 하나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비정규직 근로자의 아픔이 시작됐습니다. 남편은 쉬는 날이 따로 없었습니다. 가족나들이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습니다. 명절이 되어도 소위 말하는 '떡값' 같은 건 남의 나라 얘기였습니다.

또 회사에서 하는 건강검진에서도 남편은 열외였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라 내일이라도 당장 그만두라면 '끽' 소리 못하고 손털고 나가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더 가슴 아픈 건 대한민국의 근로자라면 누구나 받고 있는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의 혜택도 남편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는 것입니다. 세 명 이상의 근로현장이라면, 신청만 해도 혜택을 본다는 그것들조차도요.

남편이 하는 일은 정말 험합니다. 어느 때는 철가루가 눈에 박혀 눈이 동백꽃처럼 빨개져서 들어와 병원에 가야 했습니다. 결국 사비를 들여 철가루를 제거해야 했고요. 철봉 같은 '아시바'를 타다가 미끄러져 정강이를 다 쓸려서 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웬만한 애들보다 무겁다는 '폼'을 나르는 날은 어깨와 등이 핏물을 뿌려놓은 듯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입니다. 또 허리를 접질려서 몇 날을 한의원에 다니며 침을 맞기도 했습니다. 그때도 회사에서는 '월급 주지 않느냐'며 뒷짐지고 구경만 했습니다.

월급! 월급이 족쇄였습니다. 오히려 일용직 근로자는 현장에서 다치면 보상이 나온다고 하더군요. 이래서 세상 일은 일장일단이 있다고 하나 봅니다.

저는 남편에게 자꾸 회사에 얘기를 하라고 했습니다. "우는 아기 젖 주는 법"이라면서요. 그래서 겨우 겨우 얻어낸 것이 두어 달 전에 날아온 '고용보험가입확인서'였습니다. '회사에서 잘리면 당장 다음 달부터는 뭘 먹고 살아야 하나'하는 걱정은 덜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계속해서 산재보험도 요구해 보라고 말할 생각입니다.

산재보험에 든다고 남편의 미래까지 보장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누군가 '보험은 아프지 않게 해주는 부적'이라고 하더군요. 이 부적이라도 붙이고 있어야 남편이 덜 다칠 거라고 믿고 싶은 게 저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남편이 비정규직 노동자이기에, 전 어서 빨리 아이들 키워 놓고 같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아이 키우면서 혼자 공부해 공인중개사 자격증도 따뒀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경매사 공부도 해볼 생각입니다. 남편을 위해서 그리고 제 아이들을 위해서요.

요즘엔 환경이 좋아야 아이들도 똑똑하고 공부도 잘한다고 하더군요. 제 아이들만은 잘 가르쳐서 서러운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고 싶습니다. 제 아이들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이 어미의 마음…, 이해하시겠죠? 아마도 비정규직 노동자 가정이라면 저의 이 마음, 백분 이해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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