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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3 가을소풍 때 동네 친구들과 창원 성주사 입구에서, 오른쪽 첫 번째가 나
ⓒ 이종찬
가을 소풍에 얽힌 기억의 한 장면을 찾으려 빛바랜 앨범을 이리저리 뒤척인다. 그런데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사진이 몇 장 보이지 않는다. 분명 이 앨범 속에 넣어 두었었는데…. 어디로 갔을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그 동무들의 얼굴처럼 기억도 그렇게 서서히 사라져버린 것일까.

그때 문득 중학교 3학년 때, 성주사 곰절로 가을소풍을 가서 찍었던 흑백사진 한 장이 내 눈길을 붙든다. 성주사 곰절 입구를 지키고 있었던 돼지 두 마리를 배경으로 같은 동네 살았던 동무들끼리 나란히 찍은 흑백사진 한 장. 정말 오랜만에 보는 그 흑백사진 한 장이 오래 묵은 기억의 한 자락을 한껏 물고 늘어진다.

사진 뒷면에 파란 잉크를 펜에 찍어 쓴 글씨. '1974년 10월 12일. 중3 가을소풍. 성주사'란 그 글씨가 그리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아마도 까만 잉크보다 파란 잉크를 더 좋아했었나보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볼펜보다 잉크를 찍어 쓰는 펜을 더 많이 사용했다. 한 푼이라도 더 아끼기 위해서….

"올 가을소풍 오데로 간다 카더노?"
"뻔하지 뭐. 국민학교 댕길 때는 수원지 아니면 불곡사였고, 중학교 들어와서는 봄소풍이든 가을소풍이든 무조건 성주사 아이가."
"하긴 별 볼 일 없는 우리들이 특별히 소풍 갈 때가 오데 있것노. 쪼매 멀리 갈라캐도 차비는 또 누가 낼끼고."


내가 3년 동안 다녔던 남면중학교(지금의 남중학교)에서는 '소풍'하면 불모산(802m)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성주사로 갔다. 성주사는 흥덕왕 2년 서기 827년에 왜구의 잦은 침략을 막기 위해 지리산에 있었던 무염(無染)이 창건했다는 절이다. 이 절을 웅신사 혹은 곰절이라고 부르는 것도 곰이 불사를 도와주었다 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1974년 가을, 우리들은 그해에도 어김없이 성주사 곰절로 가을소풍을 갔다. 하지만 중학시절 마지막 소풍이어서 그랬던지 우리들은 특별히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때에는 지금처럼 칼라사진이 없었다. 아니, 흑백사진도 특별한 날이 아니면 아예 찍지 않았다. 사실, 그 흑백사진을 찍고도 돈이 없어서 찾지 못하는 동무들이 더 많았다.

그때 나도 사진을 참 많이 찍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진은 몇 장 없다. 분명 중학시절 마지막 사진이라며 내 얼굴이 나온 사진은 거의 다 찾았던 것 같은데…. 그 사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특히 손수건 돌리기를 할 때 그만 술래에게 붙잡혀 여러 동무들 앞에서 다리를 벌벌 떨며 노래를 부르던 그 사진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야! 요번 소풍 가서 그 가시나 그거 골탕 좀 멕이자(먹이자)"
"그라다가 백수(학생지도 선생님 별명)한테 들키모 우짤라꼬?"
"요번이 마지막 소풍인데…. 그깐 것쯤은 안 봐 주것나."
"니 그 가시나가 그렇게도 좋나."
"니도 어떤 가시나로 좋아해봐라. 맴(마음)이 니 생각처럼 붙들어지지 않을 끼다."


내가 다닌 남면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남녀가 한 교실에서 짝꿍을 하며 공부를 하지 않았다. 학교 중간에 있는 야트막한 야산을 중심으로 북쪽 교실에는 여학생이, 남쪽 교실에는 남학생이 공부를 했다. 교장실과 교무실은 그 야트막한 야산 끝자락 그러니까 북쪽 교실과 남쪽 교실을 마주보는 자리에 있었다.

그런 까닭에 남학생과 여학생들은 같은 중학교에 다녀도 학교 안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등하교를 하는 교문도 서로 달랐다. 하지만 아침조회를 하거나 소풍을 갈 때에는 늘 같이 다녔다. 특히 소풍은 그동안 먼 나라에 사는 것처럼 느껴졌던 같은 학교 여학생들과 서로 가까이서 어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1974년 10월 13일, 성주사로 가을소풍을 갔던 우리들은 여학생들과 조를 나누어 빙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며 손수건 돌리기를 했다. 벌칙은 술래에게 잡힌 학생이 가운데 나가 노래를 부르는 거였다. 그것도 술래가 시키는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 만약 그 노래를 부르지 못하면 여러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엉덩이로 자기 이름을 써야 했다.

"자! 여학생 대표 한 명하고 남학생 대표 한 명 나온나."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와아~ 우리가 이겼다."


선생님께서는 여학생 대표와 남학생 대표를 각각 한 명씩 나오게 하여 서로 등을 마주대고 공중에 손을 올려 가위 바위 보를 하게 했다. 그 가위 바위 보에서 남학생 대표가 보기 좋게 지고 말았다. 여학생 대표가 먼저 술래가 된 것이다. 그 여학생 대표는 손수건을 허리춤에 감춘 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것도 우리들 등 뒤를 천천히 돌면서….

그 동무는 자기가 속으로 좋아하는 그 여학생 대표가 자기 등 뒤에 손수건을 놓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그 동무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계속 양손으로 자기의 등 뒤를 쓸었다. 하지만 그 여학생 대표는 그 동무의 등 뒤에 손수건을 떨구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먼 산을 바라보며 생긋 웃는가 싶더니 갑자기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잡았다."
"어어어~ 이게 머슨 날벼락이고?"
"어기적거리지 말고 빨랑 빨랑 나와!"


순식간의 일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 여학생 대표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때 나는 설마 그 여학생 대표가 내 등 뒤에 손수건을 떨구고 갈 줄을 몰랐다. 게다가 나는 그 동무의 등 뒤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동무도 의외라는 표정으로 당황해 하는 내 얼굴과 그 여학생 대표의 웃는 얼굴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할 수 없었다. 내가 엉거주춤 일어나 선생님께서 서 계시는 커다란 원의 중심에 섰을 때 그 여학생 대표가 마치 오래 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클레멘타인'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여학생들이 한꺼번에 우우우~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따다닥 쳤다. 갑자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하필이면 클레멘타인이라니.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죽어도 여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엉덩이로 내 이름 석 자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음~음~'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특히 '내 사랑아 내 사랑이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이라고 부를 때 여학생들 쪽에서는 '우우우~ 우우우~' '휘익~'하는 소리를 내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마치 그 여학생 대표가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번 더! 한번 더! 한번 더!'하는 소리에 나는 언뜻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술래가 되어 손수건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 여학생 대표 뒤에 손수건을 떨구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나를 굳게 믿고 있는 그 동무의 등 뒤에 손수건을 떨구었다. 나 스스로 우리 편을 잡은 것이었다.

사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동무에게 그 여학생 대표를 골탕 먹일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내게 잡힌 그 동무는 자기편에게 당한 죄로 결국 엉덩이로 자기의 이름 석 자를 써야만 했다. 자기가 무척 좋아하는 그 여학생 대표까지 지켜보는 앞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 동무는 다시 술래가 되어 그 여학생 대표 뒤에 손수건을 슬쩍 떨구었으나 보기 좋게 들키고 말았다.

1974년, 나의 중학시절 마지막 가을소풍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그 여학생 대표로 인해서 정말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손수건 돌리기가 모두 끝났을 때 선생님께서 클레멘타인이란 노래의 유래에 대해서 차근차근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클레멘타인은 1849년 금광을 찾아 일확천금을 꿈꾸며 서부의 캘리포니아로 몰려왔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미국의 민요야. 그때 그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과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면서 수없이 죽어나갔었지. 그리고 자신들이 캐낸 황금이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자본가들의 배만 불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탈감에 빠져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우리나라에 이 노래가 알려진 것은 1919년 3·1운동 때 소설가 박태원에 의해서였다. 박태원은 이 노래의 노랫말을 우리나라 사람 정서에 맞게 고쳐서 부르게 했다고 한다. 클레멘타인의 처음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깊은 계곡 광산마을 동굴집이 있었네
늙은 아빠 어여쁜 딸 사랑으로 살았네
오 내 사랑 오 내 사랑 귀여운 내 클레멘타인
너는 영영 가버리고 나만 홀로 남았네
이젠 다시 볼 수 없네 요정 같던 그 모습
네가 신던 작은 신발 내 마음이 아프다
오 내 사랑 오 내 사랑 귀여운 내 클레멘타인
너의 모습 늘 그리며 나만 슬피 남았네


나는 지금도 간혹 클레멘타인이란 노래를 들으면 그때 그 가을소풍이 떠오른다. 그리고 갈래머리 예쁘게 땋은 그 여학생 대표의 생긋 웃는 미소와 그 미소를 바라보며 금세 얼굴이 하얗게 변하던 그 동무가 생각난다. 그래. 지금 나는 노랫말처럼 그 여학생과 그 동무를 어디론가 떠나보낸 뒤 이제서야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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