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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서울 가리봉동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주변이 구로 공단에 둘러싸인 학교였습니다. '산업역군' 이라는 그럴 듯한(?) 단어가 생각나는 곳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늘 저임금과 열악한 작업환경에 시달리는 부모들을 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자연히 평소 도시락 반찬이나 학교 준비물에는 신경을 깊게 쓸 수 없는 부모님이 많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저는 행복한 경우였습니다. '유복한 환경'까지는 아니었지만 전업 주부로 계신 어머니께서 꽤나 공을 들여 이모저모 잘 챙겨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철이 어지간히 없었던지 저학년 시절에는 소풍 전날이면 식료품 가게에 있는 음료수나 과자 따위를 모두 챙겨 가겠노라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결국 태반은 봉지도 뜯지 못한 채 도로 집에 가져오게 될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그리고 주위의 친구들을 사귀면서 막연하게나마 '이건 무언가 아니다' 하는 생각을 품게 됐습니다. 좋은 반찬과 비싼 학용품이 아니더라도 주눅들지 않고 밝게 웃는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친구들에게 조금씩 호감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잘 사는 아이들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 깨끗하게 빨아 입은 옷을 입고 다니는 일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흙탕물을 묻히고도 이빨이 쏟아지게 웃고, 다방구 놀이를 하다 관악산까지 도망을 치던 어처구니없지만 순박한 시장통 아이들과 노는 게 좋아졌습니다.

그러던 초등학교 5학년 정도 시절. 가을 소풍을 가게 됐습니다. '어디 사립학교는 학교버스를 타고 어린이 대공원으로도 소풍을 간다더라' 하는 소리에 "우와" 하고 부러움을 나타내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결국 그 해에도 늘 그렇듯 소풍을 간 장소는 잿빛 공단을 가로질러 있던, 근처 철산리라는 흙투성이 야산이었습니다. 지금은 천지개벽을 한 광명시 철산동이 그 곳입니다.

소풍 날짜를 하루 앞둔 저는 이번 만큼은 간단하게 소풍 가방을 챙기리라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결심도 잠시, 결국은 저녁에 시장에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가 가방에 넣기에도 무거울 만큼 음료수와 빵, 과자 따위를 챙겨 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을 뜬 저는 어머님이 온갖 재료를 넣어 해주신 김밥을 챙겨 당시 동네에서 자주 만나던 두호라는 친구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구로 시장 입구에서 식당 겸 술집을 하는 집이었습니다. 가게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른 아침의 식당 풍경은 낯설었습니다. 식당이라기보다는 공사장 한 편에 함부로 세워진 함바집(간이식당)처럼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전날 늦게까지 장사를 한 듯 탁자 위에는 먹다 남은 막걸리와 쉬어 빠진 김치 조각이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이미 일어나 있었지만 어머님은 그때서야 피곤한 듯 부스스 눈을 비비고 잠에서 깨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물어 보셨습니다.

"얘, 넌 김밥 싸가니?"
"예? 예."
"저런 내가 장사하느라고 바빠서 재료를 하나도 못 사놨네. 우리 애도 싸줘야 하는데. 이걸 어쩌지."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이시던 친구 어머님은 두호에게 미안하다며 천 원짜리 두어 장을 쥐어 주시며 먹고 싶은 걸 사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식은 찬밥에 장아찌와 어묵 따위로 급하게 도시락을 싸 주셨습니다. 친구는 그래도 아무 불만이 없는 듯 싱글벙글하며 탁자 위에서 짝이 안 맞는 젓가락을 챙겨서는 집을 나섰습니다.

그 때 친구를 보며 솔직히 놀랐습니다. 같은 경우라면 뒤로 발랑 자빠져 앵앵거렸을 자신을 생각하니 친구가 대단한 걸 넘어 어른스러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무언가 배울게 많다는 느낌이 들며 요즘 이 친구와 친하게 지내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에 도착해선 그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만화 영화 주제가를 부르며 소풍 장소로 향했습니다.

수건돌리기와 가벼운 장기 자랑이 끝난 후 식사시간이 됐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반장과 당시 부반장이었던 나, 또 한 명의 부반장이었던 여학생 등 세 사람에게 아이들이 먼 곳으로 가지 못 하도록 하라고 주의를 줬습니다. 투표로 결정하긴 했지만 후보로 올라가는 과정이 그리 투명하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던 부담스런 직책이었습니다.

저는 함께 먹자는 반장과 또 다른 부반장의 이야기를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하고 아침에 함께 온 두호와 마주 앉아 도시락 뚜껑을 열었습니다. 아버지가 동네에서 큰 약국을 운영하신다던 그 여자아이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깜찍하고 예쁜 아이였지만 늘 도도해 보이고 몇몇 아이를 제외하곤 차갑게 대하던 그 아이가 부담스러웠습니다.

막상 친구와 마주 앉으니 왠지 김밥을 펼치기가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밥 사이에 소고기까지 갈아넣은 윤기 나는 깁밥이 친구를 주눅들게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주눅이 들지도 않았고 또래 아이들처럼 허겁지겁 제 김밥에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밥을 먹고 나면 어머니가 주신 돈으로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사 주겠다며 활짝 웃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시장통에서 익히 눈치가 빨랐던 것도 같습니다.

"야, 잠깐만. 쟤도 불러서 같이 먹자."
"어, 누구?"

두호가 밥을 먹다 말고 나무를 등지고 혼자 먹고 있는 친구를 가리켰습니다. 늘 빨지 않은 듯 냄새나는 옷을 입고 다니던 ○○이라는 친구였습니다. 평소 그 친구의 옆을 지나칠 때면 이상한 냄새가 나던 기억이 났지만 혼자 뚝 떨어져 먹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안 되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안 오겠다는 녀석을 억지로 끌어 앉히자 이번에는 도무지 도시락을 열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두호가 물었습니다.

"야, 이 바보야. 나도 김밥 안 싸왔어. 뭐가 어때?"
"아니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고, 뭐?"

눈치를 보는 녀석의 도시락을 빼앗은 두호는 잽싸게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거의 꽁보리에 가까운 새까만 밥에 퍼석한 날 김을 그대로 말아 놓은 내용물이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고기는커녕 허연 단무지 하나 들어있지 않았고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길이로 대충 썰어 놓은, 말 그대로 '김에 말은 밥'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표정을 관리하느라 애썼던 기억이 납니다. 어렵던 이들이 많았던 동네인지라 그런 경우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김치 한 가지와 밥을 먹은 일은 예사였고 그 전에 한 친구의 집에서는 달랑 간장 한 종지와 맨 밥으로 한끼를 때운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소풍날인데…' 하는 마음이 들긴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이 안 계시고 연로한 할머니와 어린 동생들과 살고 있다던 녀석의 처지를 생각하니 그것도 어렵게 싸온 음식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보, 김밥 싸 왔구만. 괜히 난리야."(두호는 실제로 이보다 더 과격한 '어른들'의 표현을 썼던 걸로 기억합니다.)

"뭐야, 안 싸 온 줄 알았잖아. 빨리 먹자."

저도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그때서야 ○○이는 밝게 웃으며 젓가락질을 시작했습니다. 녀석이 싸 온 김밥을 하나 입에 넣자 날 김은 입천장에 들러붙고 까칠한 통보리가 혀에서 맴돌았습니다. 간신히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몇 개를 더 집어먹긴 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긴 했습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어머니가 선생님께 전해 드리라던 피로회복제가 생각나 선생님을 찾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머, 얘 아까 그거 봤니? ○○이 김밥 싸 온 거?"
"어우, 그 냄새나는 애. 걔는 무슨 밥을 그런걸 싸 가지고 다니니. 정말 웃기더라."

풀 숲 뒤쪽에서 나는 소리였습니다. 또 한 명의 부반장 아이가 다른 아이 몇 명을 모아 놓고 깔깔거리고 있었습니다. '저것들이 너무하네'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왠지 함께 먹은 나 자신도 초라해 지는 것 같다는 어린아이다운 자격지심이 들어 참고 지나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였습니다.

"도대체 그런 걸 어떻게 꺼내 놓고 먹을 수가 있지. 난 죽어도 저런 거 못 먹어."
"글쎄 말야. 밥이 새까매서는. 쟤 얼굴 색깔하고 하고 똑같애."
"같이 먹는 애들은 또 뭐야."

아이들은 이를 드러내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 순간 옮기던 발걸음을 멈칫하게 됐습니다. 아무리 어려도 정도가 넘어섰다는 생각이 들며 요즘말로 딸깍하고 '뚜껑이' 열렸던 것 같습니다.

"야, 너 일루와봐."
꽥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왜? 나한테 할 말 있어?"
"니네 지금 뭐라구 그랬어. 다시 한 번 말해 봐."
"뭐, 우리가 뭐랬는데?"

역시 그 아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 목소리가 벌벌 떨리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야, 너 그렇게 함부로 말 할 수 있어? 너네 부모님이 싸 주신 거 가지고 남들이 그렇게 말하면 너는 기분 좋아? 좋냐구?"
"내가 뭐어, 그리구 니가 뭔데 참견이야. 너 왜 그러니?"

그 아이도 슬슬 억울하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이런, 뭘 잘 했다구. 노려봐. 니가 잘했어? 잘 했냐구? 빨리 사과해. 가서 ○○이한테 사과하라구. 너깟게 부반장이야? 아주 우리 반 개판이다. 너 사과 안 하면 나한테 죽어!"

저는 벌컥 소리를 지르며 냉큼 그 아이의 얼굴 앞으로 다가섰습니다. 그리고 잠시 멍해졌습니다. 아이들이 몰려들었고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지원군을 만나듯 그 아이는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오히려 잘 됐다고 모든 걸 고해 바치겠노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아이는 시종일관 제가 자기를 때리려 했다고 눈물을 쏟아 냈고 선생님은 난감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제게 "약한 여자아이에게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억울해서 눈물이 핑 돌 정도였지만 선생님은 제 얘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고 "다 안다"며 사이 좋게 화해하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돌아섰습니다.

결론적으로 그 아이와는 그 해가 지나갈 때까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습니다. 여럿 앞에서 면박을 준 것은 미안하지만 그 외의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잃은 것은 반장과 그 아이 그리고 몇몇 주위 유복한 아이들과의 관계였습니다. 생일이면 돌아가며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하여 깔끔한 파티를 벌이곤 하던, 비싼 장난감과 좋은 가구들이 있던 사회(?)로부터의 초대가 끊어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친구들과의 관계가 돈독해져 오히려 즐거워졌습니다. 어머님은 그리 마음에 안 들어했을지 모르지만 수업이 끝나면 사방팔방을 헤집고 다니던 친구들과의 어울림이 너무도 즐거웠습니다. 돌이켜 보면 톰 소여나 허클베리 핀이 된 듯한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 후 학교 학부모 모임에 다녀 온 어머니는 담임 선생님이 "영준이가 보기 보다 성깔이 있더라"라고 하시며 웃더라고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때도 저는 여전히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 그러니까 걔가 잘못한 게 맞잖아요?"
"그건 그렇지…" 어머니는 다소 말끝을 흐리셨습니다.

"그죠? 부자면 남 무시해도 되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다짐을 받으려는 듯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그래 네가 옳은 거야. 잘했다." 무언가를 생각하던 어머니가 밝게 웃으셨습니다.

그때 옆에서 미소만 짓고 계시던 아버지가 한 말씀 보태셨습니다.

"잘했어. 만약에 담부터 사내자식이 그러면 한 방 쥐어박아 버려."

하지만 우습게도, 그 후 세월이 흐르고 어른이 되면서 오히려 그 '잘 차려진 생일 상'의 유혹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연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세상을 향해 '한 방 쥐어박아' 버릴 만한 용기를 갖고는 있는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 같은 가을날의 소풍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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