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몇 년 전의 일이다. 내가 교실에 들어섰을 때 아이들 행동이 수상했다. 뭔가 하면 안 될 일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감추는 빛이 역력했다. 조회 사항을 전달하면서 머릿속에선 여러가지 생각이 돌아갔다. '얘들이 나한테 숨기는 게 뭘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직선적으로 물어봤다.

"너희들끼리 뭘 했던 거니?"

아이들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분명히 뭔가 냄새가 났다. 아이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 받았다. 난 계속 옆에 지켜서서 한 손을 내민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책상 속에서 연습장을 찢어서 만든 누런 종이 한 장을 내놓았다.

종이의 윗부분에 '도봉산 등산에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써 있었다. 그리고 밑에는 형주(가명)와 같이 잘 어울리는 일당 몇 명의 이름이 쓰여 있었고, 이름 옆에 떡하니 사인까지 되어 있었다.

순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황당하기도 하고 발칙하기도 하고…. 한 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한 뒤 일단 종이를 들고 교무실로 내려갔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 가만히 생각을 해 보았다. 아이들 모두가 이렇게까지 반대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형주를 비롯한 몇명의 아이들이 선동을 하는 것인지부터 가닥을 잡아보았다.

물론 중학교 남자 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타는 갈증을 견뎌야 하는 등산을 좋아할 리 없겠지만, 이것이 모든 아이들의 생각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내가 근무했던 곳은 남학교로, 가끔 오토바이 절도 사건이 발생해 담임이 탄원서를 쓰거나, 소풍이나 어떤 행사들이 일찍 끝나는 날엔 인근 학교 아이들과 패싸움이 붙는 일들이 다른 중학교에 비해 종종 있는 편이었다.

부임한 첫해는 아이들과 적응하느라 힘들었지만 1년 동안 부대끼면서 나름대로 깨달은 게 한 가지 있었다. 남자 아이들의 경우, 에너지를 흠뻑 쏟을 만한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엉뚱한 일들에 에너지를 쏟곤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담임을 맡은 한동안은 아이들이 에너지를 흠뻑 쏟을 수 있는 일을 찾느라 바빴다. 그래서 실행해 본 일들이 한강 고수부지에 가서 축구나 배구, 야구 등을 하거나, 2시간 정도 걸리는 등산 코스를 선택해 산에 올라가 점심을 먹으며 얘기도 좀 하는 일이었다. 간혹 거리를 좀 멀리 잡아 답사를 가기도 했다.

그런 다음날 "어제 뭐했니? 혹시 노래방이나 PC방 안 갔니?"하고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피곤해서 집에 바로 가서 그대로 잤어요"라고 한다.

가끔은 잘 통하는 동료교사 몇 사람의 반과 연합해서 반 대항 운동경기나 등산을 몇 번 했었다. 등산을 간 적이 더 많긴 했지만.

그랬더니 결국 형주를 비롯한 우리 반 몇 명의 터프가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종례시간이 돼 교실에 들어섰다. 아이들은 조용히 내 반응을 기다렸다.

"얘들아, 도봉산만 아니면 정말 괜찮은 거지?"
"네. 도봉산은 정말 지겨워요. 다른 데로 가요. 드림랜드도 괜찮아요(아이들은 드림랜드는 유치원 때부터 워낙 많이 가보기도 한 데다 좁고 놀이기구가 별로 없다고 질색을 했다. 차라리 학교 운동장에서 공차는 게 낫다고 말하는 아이들이었다)."

힘들고 귀찮아서 안 간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알았다. 너희들 의견을 존중하마."

아이들은 환호했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라도 한 듯.

"그래서 이번엔 좀 멀리 가기로 했다. 동두천에 있는 소요산으로 가기로 했다. 단풍도 좋을 테고. 기차도 타 보고. 그러니 내일 아침 늦지 않게 모두 의정부역으로 8시 10분까지 모여라. 늦으면 떼어놓고 간다."

순간 아이들의 표정은? 아이들의 눈초리가 일제히 형주를 비롯한 일당에게 쏠렸다. 난 여유있게 교실을 나왔고, 다음날 아이들은 가파른 바위산 소요산에서 넘치는 에너지를 흠씬 쏟아야만 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