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소풍날에 비가 내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경우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시절까지였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그런 바람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그런 기대가 없이 다소 무덤덤했지만 그래도 소풍을 기다린 것은 용돈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당시 부모님께서는 농사일을 하셨기 때문에 정기적인 현금수입이 없으셨다. 그래서인지 어머니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아침에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면서 돈을 달라는 것이었는데, 이럴 경우 돈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이웃 집에 빌려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사정이 이러니 참고서를 산다든가 할 일이 있으면 꼭 미리 말씀을 드려야 했고,그런 말을 들으면 어머니는 밭의 채소를 시장에 내다 팔아 돈을 마련해 주셨다.

이렇게 현금이 귀하니 다른 아이들처럼 정기적으로 받는 용돈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소풍날이 되면 어머니는 꼭 얼마간의 돈을 챙겨 주셨는데, 나는 이 돈을 쓰지 않고 모아 꼭 사고 싶었으나 살 수 없었던 참고서를 사는데 쓰곤 했다.

소풍가서 담배를 피워?

고등학교 2학년 때의 가을 소풍은 학교에서 제법 떨어진 큰 절로 가게 되었다. 점심을 먹고 학급별 장기자랑이 시작되자 짝궁 녀석이 허리를 쿡쿡 쑤시며 으쓱한 곳을 가리키며 따라 오라는 손짓을 했다.눈치를 보며 뒤로 빠져 갔더니 그 곳에는 반에서 키가 큰 축에 속하는 녀석들 몇이 이미 모여 소주병을 따 놓고 있었다.

이렇게 모인 우리는 어른이나 된 것처럼 애들과 놀 수 있느냐는 등의 이야기를 하며 소주를 한잔씩 마시고 담배 한 개비를 돌아가며 피웠다. 순간 "이 녀석들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 하며 뛰어든 사람은 깐깐하기로 소문난 담임선생님이었다.

현장을 들켰기 때문에 최소한 유기정학 정도의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곳이 소풍현장이란 것이 감안되었는지 선생님께서는 부모님을 학교로 모시고 오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이야 아버지 몰래 어머니를 모셔오고 형을 대신 모셔와서무난히 넘어갔으나 나에게는 이것이 유기정학보다 더 심한 벌이었다.형이라고 해야 매일 한 이불 속에서 싸우는 세 살 위의 형뿐이었고, 어머니께 말씀드린다 해도 외부 출입이 전혀 없으신 분이라 아버지께 말씀드릴 것이 뻔하기 때문에 여간 고민이 아니었다.

아버지께 솔직히 말씀 드릴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아버지는 용서보다는 더 큰 벌을 주라고 하실 게 뻔하기 때문에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자 선생님은 반항한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시간을 끌면 교장선생님께 보고하겠다며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사정이 이렇게 진행되자 다소 억울하게 연루된 것을 아는 공범 녀석들도 괜히 미안해 하는 눈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끌고 갔던 짝궁 녀석이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며 나에게 한가지 제안을 해 왔다.

자기 아버지가 시내에서 전자 대리점을 움영하고 있고, 그 대리점 건물에 일을 하시는 아주머니가 한 분 계신데 그 아주머니를 어머니로 위장하여 학교로 모시고 오자는 것이었다.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그 녀석이 나머지는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하고 달리 방법도 없어서, 코너에 몰려 있던 나도 어쩔 수 없이 친구 의견에 동의하고 말았다.

그 녀석의 코치에 따라 아주머니와 함께 교무실에 갔더니 아주머니는 연신 "잘못했습니다","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제가 교육을 잘못 시킨 탓입니다"라는 말씀만 반복하시는 것이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도 어색한 표정을 지으시며 "뭐 일부러 이렇게까지 오셨습니까?"하시더니 큰일 아니니 조심해서 가시라는 인사로 상황이 다소 싱겁게 마무리 되었다.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지만 그 대가로 참고서 사려고 소풍가서도 쓰지 않고 모아두었던 용돈은 아주머니에게 고스란히 드리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친구 녀석들은 심심하면 "어제 네 새엄마 만났어","너는 엄마가 둘이라 좋겠어"라며 놀렸다.

한때의 호기심은 성장의 디딤돌인 듯

꼭 그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 일이 있은 후 지금까지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 남들은 군대가서 담배를 배웠다고 하지만 나는 담배 대신 별사탕을 먹으면서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 당시 담배 피우다 들켜 유기정학 처벌을 받곤 해서 불량학생으로 인식되었던 동창들도 지금 만나 보면 전부 건전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있다.

특히 나에게 아주머니를 소개시켜줬던 짝궁은 지금 고향 의회의 의장단으로 지역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훌륭한 인사가 되어 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어릴적 잠시 호기심으로 저지른 잘못에 대해 너무 과민한 반응을 보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국 사진작가협회 정회원이었으며, 아름다운 자연과 일반 관광으로 찾기 힘든 관광지, 현지의 풍습과 전통문화 등 여행에 관한 정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생활정보와 현지에서의 사업과 인.허가에 관한 상세 정보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