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얼마 전, 강아지 한 마리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엄청 못 생긴 길 잃은 강아지 한 마리가 뜬금없이 시골 어머니집에 들어와, 마침 휴가를 그곳에서 지내게 된 저와 한바탕 힘겨루기를 하다가 결국 눌러 앉게 된 사연이었지요.

관련
기사
'못난이 퇴출계획' 결국 실패했습니다

글을 올린 다음 날 저는 아래와 같은 쪽지 하나를 받았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한 청년이 보낸 두 개의 쪽지 중에서 두 번째 것입니다.

혹시나 해서 다시 보내봅니다. ○○○이라구 합니다. 나이는 20살이구여. 작년 겨울에 저희 강아지를 잃어버렸는데요 다음 사이트에 기사로 뜬 강아지를 봤는데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그토록 찾던 저희 강아지와 너무나도 똑같이 생겼습니다. 암컷에 강아지가 많이 늙었고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성당에 수녀님께서 주신 강아지입니다. 저희 가족과 8년 정도를 함께 해왔죠.

▲ 못난이 호박과 못난이 뽀삐
ⓒ 최형식

그는 개를 확인을 해보고 싶다는 의사와 함께 연락처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내가 소개한 그 강아지는 도무지 그런 호강을 한 티가 나지 않는 평범한 개였습니다. 더구나 그 작고 못난 강아지가 8살이라니 아무래도 그 청년이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울러 괜한 일로 마음 착한 어느 청년의 마음을 두 번 울리는 것이 아닌가 은근히 걱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청년이 사는 곳과 우리 어머니가 계신 집이 불과 30km 정도이니 그럴 수도 있겠고 못난이 강아지가 암컷이라는 것도 확실하며, 더구나 두 번씩이나 쪽지를 보낸 청년의 정성을 모른 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니터에 메모를 띄워 놓은 채 전화를 하였습니다.

약간 수줍은 듯한 목소리의 청년이었습니다. 나는 간단히 나를 소개하고 '개를 찍을 때 카메라를 바짝 대고 찍어서 원래 생긴 것보다 훨씬 잘 나왔다'고 하며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 봐주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생김새뿐만 아니라 "가슴에 노란 털이 있는 것하고 서 있는 자세가 똑 같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한 마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못 생기게 보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내 글의 원제목이 '세상에서 가장 못 생긴 개'였으니까요. 나는 내일이나 모레쯤 부모님과 함께 방문하겠다는 그를 흔쾌히 맞이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음 날 점심 무렵 전화를 받았습니다. 근처에 왔는데 집을 못 찾아서 어디 어디쯤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작업복을 입은 채 마중을 나가던 내 가슴이 갑자기 쿵쿵 뛰었습니다. 길 가장자리에 세워진 차에서 청년의 부모로 보이는 분들이 내렸습니다. 우리는 간단히 서로를 확인하고 수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차 안에 있던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만 그는 나와 전화를 주고받은 청년이 아니라 친척이었던 것 같습니다. 잃어버린 개에 대한 그 가족들의 열의에 새삼 놀랐지만 궁금하던 청년을 못 본 것은 좀 아쉬웠습니다. 세 분을 모시고 집을 향하던 나는 약간 긴장되었습니다.

그분들도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잃어버린 강아지에 대한 이런 저런 사연을 들려주었습니다. 과연 못난이 강아지가 이분들이 찾던 바로 그 개일까? 그렇다면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나는 '못난이'라 작명했고 6살 조카는 '뽀삐'라고 했는데 이분들은 무어라고 불렀을까?

마침내 대문이 열리고 못난이와의 상면이 시작되었습니다. 청년 아버지가 못난이를 보자마자 탄성을 질렀습니다.

"맞네, 맞아!"

청년의 어머니도 바짝 다가서서 손을 내밀며 말씀했습니다.

"은총이다. 은총이야! 은총아!"

아, '은총'이라고 했습니다. 시커멓고 못생긴 강아지는 못난이도 뽀삐도 아닌 '은총'이었습니다. 나는 미운 정 고운 정 애증이 교차하는 속마음을 숨기며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못난이는 제 주인이 낯선 듯 구석에 몸을 감추며 경계의 눈빛을 보였습니다. 그 모습이 가슴 저미는 듯 부부는 바짝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 은총이냐? 뽀삐냐? 신체검사 중.
ⓒ 최형식
"은총아, 우리 모르겠어? 아이 어쩌나 벌써 잊었나보네."
"그래… 벌써 몇 달인데… 그럴 만도 하지 뭐."

안타까운 상봉이었습니다. 눈먼 심봉사가 심청을 알아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었습니다. 갑자기 콧잔등이 시큰해졌습니다. 그때 같이 오신 친척 분이 '진돗개는 아무리 오래 돼도 쥔을 알아보는데…'라고 농을 치지 않았더라면 눈물이 찔끔 나올 뻔한 장면이었습니다. 부부는 감격에 겨워 야윈 강아지를 구석 구석 어루만졌습니다. '은총'이도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 슬금슬금 옛 주인에게 몸을 맡겼습니다.

하지만 의아한 부분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가슴에 털 색이 약간 변했다는 점과 배에 있던 작은 혹이 있었는데 없어졌다는 점, 그리고 젖꼭지가 아주 작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 분은 아파트에서 호강하며 고이고이 살던 애견이, 지난 겨울 집을 떠나 한겨울을 꼬박 산으로 들로 헤메고 다녔을 터이니 그 모습이 온전할 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되려 못난이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졸지에 '은총이'가 된 못난이와 작별을 해야 했습니다.

"채원아, 뽀삐가 아니고 은총이래.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조카는 뽀삐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뽀삐가 차에 실려 떠나기도 전에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텅 빈 개집과 그 앞에 덩그마니 놓인 개밥그릇을 보니 나도 울적해졌습니다. 때를 놓친 점심을 반도 못 먹고 숟가락을 놓았습니다. '내일 장에 가서 노랗고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 사자!'고 큰소리를 쳤습니다만 어머니와 조카의 반응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섭섭해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와 함께 있었던 짧은 시간은 8년 동안 함께 살던 은총이의 보금자리와 비교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은총이라…. 못난이가 되찾은 이름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참 좋은 이름입니다. 잃었던 주인을, 피붙이처럼 아껴주던 가족을 찾는 행운이 '은총'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다음 날 괜히 맥이 풀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 청년이 감사의 말을 핑계삼아서 전화라도 한 번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선뜻 보내주었으니 그럴 만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정말 그 청년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제 밤 은총이는 잘 자더냐?' '먹는 것을 잘 먹더냐?'하고 질문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청년의 대답소리는 그다지 명쾌하거나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그런데 개가 우리 은총이가 아닌 것 같아서요."

나는 깜짝 놀라 내 귀를 의심했습니다. 부모님이 직접 와서 확인하고 품에 안고 갔는데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내가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무슨 말이지 다시 물었습니다. 청년은 집에 데리고 온 못난이를 요모조모 살펴보니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아마 동물병원까지 가본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개는 8살 성견이 아니라 겨우 1년 남짓 된 강아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닮을 수가.

"그래서 내일 아침에 부모님이 데려다 주시겠답니다."

청년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풀이 픽 죽어 있었습니다. 나는 얼떨떨하면서도 반갑고 미안하면서도 웃음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은총'이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하는 동정심이 슬그머니 꼬리를 올렸습니다. 그래서 참 안됐다고 위로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생각치도 않던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전에 키우던 개랑 꼭 닮았으니 키우고 싶으면 키우세요. 개를 사랑하시니까…. 아무래도 여기보다 좋지 않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부모님과 상의해서 다시 연락 드릴게요."

그러나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후회했습니다. 젠장, 따지고 보면 나는 못난이에 대한 손톱 만큼의 권리도 없는데 어머니와 조카의 의견도 묻지 않고 내 멋대로 인심쓰다니. 참으로 어리석고 뻔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종일 말도 못하고 똥 마려운 강아지 시늉을 하였습니다.

만약 '정말로 고맙다. 우리 강아지를 생각해서 잘 키우겠다'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혹시 자기 집에서 키우면 볼수록 '은총'이와 비교되고 가슴 아플 테니까 딴 집에 줘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염치불구하고 다시 전화를 하였습니다. '만약 댁에서 키우시지 않으려면 이곳으로 다시 보내주면 좋겠다'며 부탁 아닌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날 늦은 오후 아주머니가 못난이를 데리고 오셨습니다. 미안하고 반갑고 고맙고 아무튼 만감이 교차하였습니다. 아파트에서 하루를 묵은 못난이는 제법 산뜻해 보였습니다. 아주머니는 개를 내려놓으며 말하였습니다.

"어지간하면 우리가 키우고 싶은데…."

아파트에서 첫날밤을 보낸 못난이는 밤새 낑낑댔나 봅니다. 나를 처음 대면한 그 날처럼 말입니다. 나는 아주머니 가족들의 고충을 백 번 이해하노라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아주머니는 시끄럽게 짖는 강아지 소리를 아파트 경비실까지 알게 되어 난처했다는 것과 보고 싶으면 지나가는 길에 들러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잠시 '은총이'가 되었던 못난이는 그렇게 거짓말처럼 우리 곁에 돌아온 것입니다. 나는 못난이의 턱을 살살 긁어주며 말했습니다.

"그래 잘 왔어. 답답한 아파트보다 여기가 훨씬 좋지?"

6살 조카도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맞아. 아파트에서는 청소할 때마다 왔다 갔다 해야 되잖아. 그치이?"

그렇습니다. 엄마가 방 청소할 때 앉은 자리를 비키지 않고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더욱이 제 앉을 자리 모르는 철없는 강아지는 방 닦는 엄마를 피해 자꾸만 옮겨다녀야 하니 얼마나 성가시겠습니까. 하지만 마당에서 자라는 못난이는 그럴 필요가 없답니다.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조카와 못난이를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오늘따라 못난이 집 지붕 위에 앉아 있는 호박이 무척 예뻐 보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은 것은 씨앗처럼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초등학교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참으로 귀한 사람들입니다. 그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과 함께 사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이들보다 한걸음 가까이 아이들과 있으니 있는 그대로 찬찬히 쓰고 싶습니다. 글의 종류로 가른다면 생활기록문 정도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아이들 이야기는 밝고 투명하나 극히 작고 감각적 기록이 될 것이고, 어른이야기는 그 곁다리가 될 것 같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