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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전체 모습. 등장 인물이 많게는 7~8명까지 동시에 움직이지만, 이 인형들을 조종하는 사람은 두세 명이다.
ⓒ 염미희

그림자극을 보러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오전 10시 반에 '광더로시위엔'이라는 곳에서 오늘(5월 1일) 첫 공연이 있다는 것, '광더로시위엔'은 동인당 맞은편에 있으며 치엔먼(前門)에서 아주 가깝다는 것이 다였다.

치엔먼까지는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지만 그 다음이 문제. 택시 기사에게 물으면 당연히 알 줄 알았는데, 모두 처음 듣는 곳이란다. 동인당(베이징의 유명한 중의원 이름)으로 가자고 하자 베이징의 동인당은 한두 개가 아니란다. 정말 치엔먼 근처만 해도 동인당이라 이름 붙여진 의원과 약방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본점이 중국어로 뭐지?' 당황한 나는 본점(本店)을 그대로 발음해 '번띠엔'을 외쳤지만,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친절한 택시 기사 아줌마는 신호에 걸릴 때마다(세 번이나!) 차에서 내려 다른 기사들에게 '광더로시위엔'을 아느냐고 물어보았고, 해답을 못 찾자 치엔먼에서 가장 가까우며 베이징에서 가장 큰 동인당(아마도 본점이리라) 근처에 내려주며 미안하다고 돈도 받지 않았다.

어렵사리 광더로시위엔을 찾고 보니, 공연 시간은 15분이나 지나 있었다. 지금 들어가도 되냐고 묻자 곧 시작한다며 얼른 들어가란다. 바쁜 와중에서도 10위안(元, 우리돈 약 1600원)짜리 티켓과 20위안짜리 티켓을 놓고 고심하다가 20위안짜리 티켓을 사서 급히 들어가 보니…… 이럴 수가!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관객이었다.

몇 번씩 전화를 걸어 문의를 했던 우리 두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공연을 미루고 기다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결국, 비싸서 고심조차 하지 않았던 100위안짜리 맨 앞의 좌석을 차지하고 우리만을 위한 그림자극을 감상할 수 있었다.

▲ 왕과 시종들. 다양한 표정은 물론, 머리 모양과 옷의 무늬까지 피잉에 쓰이는 가죽 인형들은 그 정교한 아름다움으로 정평이 나 있다.
ⓒ 염미희

장군들이 하나 둘 나타나 황제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 화려한 머리 장식과 비단 옷의 세밀한 무늬가 색색의 빛을 발한다. 가는 철사로 움직이는 가죽 인형들은 흰색 스크린 뒤에서 걷고, 뛰고, 춤추고, 노래한다.

스크린에서 멀어질수록 옅어지고 바짝 붙을수록 짙어지는 빛과 그림자의 조화는 화려한 속도감과 원근감을 연출한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왕 앞에서 진귀한 묘기와 가무가 선보여진다. 절도 있는 대사와 고음의 노래, 현악기와 타악기의 멋진 연주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때로 깜짝 놀라고, 때로 간드러지며, 때로 우렁차게 호령하는 연기자의 추임새도 빼놓을 수 없다.

대사와 노래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게 크게 아쉬웠다. 묘기를 하던 사람 하나가 앞으로 고꾸라진다. 옆 사람이 일으키려다가 반대 방향으로 또 한번 고꾸라진다. 쿵! 아이요! 악기로 내는 효과음와 연기자의 비명 소리에 나도 모르게 폭소가 터진다. 해학은 만국 공통의 언어이다.

▲ 일렁거리는 가죽 인형의 그림자, 즉 그림자의 그림자는 원근감과 박진감을 더한다.
ⓒ 염미희

▲ 말 위에서 부리는 묘기. 아찔한 순간마다 연기자의 추임새와 악기를 이용한 효과음이 터져나와 재미를 더한다.
ⓒ 염미희

어느새 꼬마 하나가 내 옆자리에 앉아 그림자극을 보고 있다. 연신 쿡쿡 웃어대던 아이는 아예 무대 앞으로 나가 턱을 괴고 극에 몰두하고 있다. 사진을 찍으려다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계속 그러고 있어 달라니까 죽어도 싫단다.

자리로 돌아온 아이와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었다. 7살인 시에윈홍(謝運鴻)은 이 극장 운영자의 아들이다. 피잉(그림자극)을 좋아하지만, 1년에 네 번 정도밖에 볼 수 없다고 했다. 올해 학교에 들어간 윈홍은 나에게 한국이 여기서 얼마나 먼 곳이냐고 물었다.

▲ 피잉에 푹 빠져 있는 꼬마 시에윈홍.
ⓒ 염미희

공연을 5분 정도 남겨두고 우리는 스크린 뒤의 연기와 연주 장면을 촬영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무대 뒤의 모습은 또 하나의 장관이었다. 족히 수십 개는 되는 각양각색의 가죽 인형이 널려 있고, 다섯 명의 연기자가 분주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세 명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두 명은 인형을 움직이면서 목소리 연기를 한다.

손발이 척척 맞는 이들의 노련한 실력은 하루 이틀에 쌓인 것이 아닌 게 분명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모두 노인들이다. 관창뤼(57세)씨는 16살 때부터 그림자극단에서 연기를 배웠다. 인형 조작과 목소리 연기에 능한 그는 여러 가지 인형을 꺼내 보이면서 시범을 보여 주었다.

12살 때부터 그림자극단에 있었던 화홍(68세)씨는 이 극단에서 최고령자이다. 쇠약해진 건강에도 불구하고 매 공연마다 흥을 돋우는 악기를 연주하며 선배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 스크린 뒤의 모습. 분주하게 손을 놀리며 연기하는 모습에서 녹록치 않은 내공이 느껴진다.
ⓒ 염미희

▲ 오른쪽에서 악기를 불고 있는 사람이 단원들 중 최고령자 화홍씨.
ⓒ 염미희

극단의 이름을 묻자, 그냥 '민간피잉연출단'이라며 이름 같은 건 없다고 한다. 이들의 매니저인 우밍쫑(物明忠·32세)씨는 사라져가는 그림자극 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베이징에 얼마 남지 않은 전문 연기자들을 모아 최근에 극단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주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한 공연을 하며, 원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 공연을 한다고 한다. 1회 공연료는 800위안(약 12만원) 내외이며, 교통과 숙박 문제가 해결된다면 한국에서도 공연을 가지고 싶다고 우밍쫑씨는 말했다. 다음 공연 일정을 물었지만, 아직 아무 일정도 잡혀 있지 않다고 한다.

▲ 전체 단원들. 맨앞 인형을 들고 앉아 있는 사람이 관창뤼씨.
ⓒ 염미희

그림자극은 여러 모양으로 오리고 색을 입힌 가죽 인형을 스크린 뒤에서 움직여 연기하는 공연이다. 주로 당나귀 가죽을 이용하는 이 인형들을 그 정교함과 화려함으로 정평이 나 있으며, 인형을 만드는 예술가들이 따로 있다.

1940년 이전부터 시작된 중국의 그림자극은 1970년대에 절정에 달해 중국 전역에서 많은 극단이 생겨났지만,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다시 하향길을 걷게 된다. 현재는 학생들에게 전통문화를 소개하려는 학교 단위로 공연 문의가 많이 오며, 소수의 애호가들과 외국인 여행객들만이 그림자극을 찾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본 잡지 <차이나 투데이>에 실린 '그림자 연기의 최고 달인 장자오빈씨'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나는 그림자극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후베이성 바오캉 현에 무작정 찾아가 그를 만나려고 중국 지도를 사고 이 지역을 수소문하기도 했다.

관심을 가지고 나니, 그림자극에 대한 정보는 생각보다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장이모 감독의 영화 <인생>에 그림자극 연기자가 주인공으로 나온다기에 먼저 영화로 그림자극을 맛보았고, 피잉 가죽 인형을 판다기에 주말 골동품 시장에 갔다가 운좋게도 공연 소식을 접한 것이다.

거기다 무대 뒤 연기 모습도 보고 단원들 인터뷰까지 했으니, 지도에도 나오지 않은 바오캉현의 산악 마을 '마량'으로의 무모한 여행보다는 훨씬 득을 많이 본 셈이다.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를 골라 탔는데, 2층 버스가 대만원이다. 알고 보니 동물원을 거쳐가는 노선. 긴 노동절 휴가의 첫날이라 베이징 사람들이 죄다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문득 텅 빈 극장 관람석이 떠올랐다. '이렇게 재밌는데 왜 아무도 관심을 안 갖는 거지?' 하지만 나 역시 언제 한번이라도 '북청사자놀음' 같은 데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그림자극 배우들은 모두 늙었다. 계승자들이 나타나지 않는 한, 중국의 그림자극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갈 것이다.

▲ 다잘란 거리에 위치한 광더로시위엔 전경. 오일절(노동절) 맞이 피잉 공연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 염미희

여행 정보

우밍쫑씨 극단의 올해 공연 일정은 아직까지 확실히 잡혀진 것이 없다. 더 많은 곳에서 공연하기를 원하지만, 부르는 곳은 별로 없는 실정이다. 우밍쫑씨 연락처는 135-2127-6078(핸드폰). 주로 베이징에 머물지만, 다른 도시로 원정을 가는 일도 많다고.

광더로시위엔(廣獨樓xiyuan, Guangdelou opera house)은 따잘란(大柵欄) 거리 안쪽에 있다. 따잘란 거리는 서울의 명동과 비슷한 곳으로 음식점, 극장, 옷가게를 비롯한 각종 상점, 약방 등이 몰려 있는 거리이다.

치엔먼(前門) 밖에서 남쪽 방향으로 70미터 정도 걸으면 오른쪽으로 거리 입구가 있다. 광더로시위엔을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은 택시를 타고 통런탕(同仁堂)에 가자고 하는 것이다. 물론 따잘란 거리 안에 있는 통런탕이라고 말해야 헤매지 않는다. 광더로시위엔도 정기적인 공연 일정이 잡혀 있지 않지만, 각종 문화예술극단을 섭외해 연중 다채로운 공연을 연다. 미리 연락해 보면 공연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베이징) 6303-2278, 6303-3713.

그림자극을 볼 기회가 생겼다면 영화 <인생>을 꼭 보고 갈 것. 그림자극뿐만 아니라 중국 현대사의 생활사적 단면들을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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