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11 10:39최종 업데이트 24.05.11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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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와 와인 ⓒ 픽사베이


술은 본래 과일이었다. 농익은 과일이 속살을 드러내면 야생 효모는 잔치를 벌였다. 거나한 밥상 뒤에는 알코올이라는 흔적이 남았다. 대부분 생물은 알코올의 강한 향을 견디지 못했다. 하지만 예외는 있는 법. 가장 먼저 날아든 녀석은 초파리였다. 초파리는 알코올이 묻은 과일을 게걸스럽게 먹고 흥건히 취해 빌빌거렸다.

이상한 일이다. 알코올은 독이다. 효모가 다른 미생물의 접근을 막기 위해 만든 물질이다. 어찌 보면 초파리는 자연법칙을 거부한 곤충이다. 그런데 인간도 그렇다. 알코올을 좋아한다. 간에는 비상이 걸리지만 뇌는 계속 갈구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건강에 해로우면 진화를 통해 어떻게든 제거될 텐데, 그렇지도 않다. 초파리와 인간은 효모의 배설물을 여전히 넙죽 받아먹고 있다. 


알코올이 진화 체계를 거스르며 탐닉의 대상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생물학자 로버트 더들리의 '술 취한 원숭이' 가설이 가장 설득력 있다. 발효된 과일에서 나온 알코올은 충분히 익었다는 신호였다. 인간의 조상이었던 영장류는 알코올 향이 도는 과일이 맛있고 영양분도 풍부하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영장류에게 수백만 년 동안 알코올은 칼로리와 영양분을 의미했다. 긍정의 신호였다. 뇌는 알코올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소량의 알코올은 생존에 도움이 됐다. 발효된 과일에 대한 갈망은 자연스럽게 술로 발전했다. 산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포도, 대추야자, 복분자, 머루 같은 베리류와 핵과류가 술이 됐다. 술과 인간의 행복한 동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술이 과일이었다는 주장은 결코 과장이나 과언이 아니다. 

과일, 맥주 속으로 들어가다

8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곡물로 술을 만드는 법을 터득했다. 말린 보리와 밀을 빻아 빵으로 만든 후 자연에서 발효시켰다. 과실주만 마셨던 인류에게 날아든 또 다른 선물이었다. 당시 맥주의 알코올은 2% 정도로 낮았고 단맛이 짙었다. 아마 신맛과 쿰쿰한 향도 끼어 있었을 것이다. 

맥주는 과실주에 비해 영양가가 높았고 많은 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단맛은 음용성을 떨어트렸다. 향도 단조로웠다. 사람들은 맛의 균형감을 잡고 다채로운 향을 내기 위해 향신료나 허브를 넣었다. 모두 집 주변과 뒷산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였다. 로즈메리, 타임, 셰이지, 톱풀, 히더, 엘더 플라워 같은 식물들은 쓴맛과 향긋함을 더했다. 

과일은 맥주 세계에서 부재료였지만 화룡점정, 금상첨화, 일거양득 같은 존재였다. 허브와 향신료보다 더 풍성하고 복합적인 향미를 맥주 속에 풀었다. 심지어 철마다 달라지는 과일들로 맥주는 풍요로워졌다. 

16세기 허브와 향신료는 홉으로 대체되었지만 과일은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20세기 들어 과일은 맥주의 스펙트럼을 더욱 확장시켰다. 전통적으로 과일 첨가에 익숙한 벨기에 맥주들은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과일과 상관없을 것 같은 스타우트도 향미의 폭을 넓혔다. 크래프트 맥주는 과일로 스타가 됐다. 

라즈베리, 체리 같은 전통 스타일뿐만 아니라 망고, 파인애플, 구아바도 이제 맥주와 어색하지 않다. 게다가 기술의 발전은 과일을 농축액이나 퓌레로 바꿔 양조사들에게 넓은 선택지를 주고 있다. 이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멋진 과일 맥주가 태어난다. 

한국 크래프트 맥주에서는 과일이 지역 정체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주목받고 있다. 신토불이 과일이 들어간 맥주는 어떤 술보다 진정성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과일과 맥주의 앙상블에서는 어떤 소리가 들릴까? 그 매력에 빠져보자. 

과일이 연출하는 고전, 람빅
 

람빅에 이태리 투스카니 포도를 넣어 만든 람빅 피아세르 ⓒ 윤한샘


맥주와 과일의 전통적인 조화가 궁금하다면 벨기에를 바라보자. 벨기에 맥주는 과일을 오랫동안 훌륭하게 다뤄왔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맥주와 가장 가까운 람빅은 이 세계의 대장이다. 이 맥주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젖산발효에서 나오는 시큼한 맛과 야생발효에서 남은 꿈꿈한 페놀 향에 움찔한다.  

람빅에게 과일은 향미 조각가다. 뾰족한 모서리를 세심하게 다듬는다. 생과일을 배럴에 넣어 추가 숙성한 프룻 람빅은 오리지널 람빅을 예술 작품으로 바꾼다. 체리, 라즈베리, 살구, 배, 사과, 자두, 포도 같은 과일이 배럴 속에서 람빅과 수개월간 동고동락한 결과는 놀랍다. 농밀하고 우아한 과일 향이 맥주 전체를 감싸고 있다. 장인의 기술과 시간이 빚은 결실이다. 과일에 따라 색도 드라마틱해진다. 맥주는 붉은색부터 푸른색까지 자연이 선물한 옷을 입는다.  

전통적인 프룻 람빅으로 체리를 넣은 람빅 크릭(lambic kriek)과 라즈베리를 넣은 람빅 프람보아즈(lambic framboise)를 들 수 있다. 신맛을 뚫고 나오는 체리와 라즈베리 향은 어떤 과실주보다 상큼하고 기품이 넘친다. 생과일을 오래 품었으니 가격은 다소 높다. 대안은 있다. 과즙을 넣은 프룻 람빅이다. 과일 향은 그대로 배어있지만 가격은 저렴하다. 람빅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과일에 과일을 더하다, 플랜더스 레드 에일
 

로덴바흐 빈티지에 사우어 체리를 넣은 카락테루즈 ⓒ 윈비어 제공


커다란 나무 배럴(푸더)에서 야생발효로 완성되는 플랜더스 레드 에일(Flanders red ale)은 여러모로 람빅과 닮아있다. 맥즙이 직접 미생물에 노출되는 람빅과 달리 플랜더스 레드 에일은 모주를 푸더 속에 넣어 미생물을 만나게 한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섬세한 신맛과 신선한 과일 에스테르는 이 맥주를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벨기에 웨스트 플랜더스에 있는 로덴바흐(Rodenbach)는 이 스타일의 원조다. 로덴바흐에는 무려 300개가 넘는 푸더가 있다. 푸더 속 결과물은 야생발효로 인해 조금씩 다르게 변한다. 로덴바흐에는 서로 다른 맥주의 상태를 판별하는 마스터블랜더가 있다. 마스터는 300개 푸더 중 가장 훌륭한 맥주를 담고 있는 하나를 선정해 빈티지 라벨을 붙인다. 나머지는 모주와 서로 다른 비율로 혼합한 후 그랑크뤼, 푸룻티지, 클래식 같은 이름으로 출시된다. 

과일을 넣은 플랜더스 레드 에일은 프리미엄으로 취급된다. 가장 돋보이는 맥주는 로덴바흐 빈티지에 체리를 넣은 카락테루즈(caractere rouge)다. 카락테루즈는 걸작이다. 농밀한 체리 향이 은하수처럼 맥주를 수놓는다. 우아한 신맛, 신선한 과일 향, 섬세한 오크 향은 우주처럼 체리 향을 감싸고 있다.  

카락테루즈가 부담스럽다면 체리 과즙을 넣은 로덴바흐 알렉산더가 있다. 신맛과 단맛이 좋은 균형감을 이루는 가운데 밝은 체리 향이 반짝인다. 마시기 편하지만 고급스러움도 잃지 않고 있다. 효모와 과일 그리고 인간이 연출하는 최고의 작품 아닐까. 

초콜릿과 라즈베리의 궁극의 만남, 라즈베리 스타우트

알고 있다. 어두운색 맥주, 스타우트는 과일과 거리가 먼 것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런데 과일 초콜릿을 떠올려보자. 과일 스타우트라는 생경함이 다소 사라진다. 그렇다면 라즈베리 스타우트는 어떤가. 조금씩 머릿속에 어떤 향미가 그려지지 않는가.

스타우트는 초콜릿과 커피 향을 품고 있다. 이 스타일에 들어가는 대표적인 부가물은 오트밀과 유당이다. 오트밀 스타우트는 비단 같은 부드러움 속에 뭉근한 단맛을 자랑한다. 유당이 첨가된 밀크 스타우트는 뚜렷한 단맛이 특징이다. 모두 19세기 영국에서 영양음료로 사랑받았다. 요즘은 커피와 바닐라가 오트밀과 유당의 자리를 물려받고 있다. 

사실 과일과 스타우트는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다. 라즈베리가 그나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초콜릿 향과 라즈베리 향은 놀랍도록 어울린다. 과일의 신맛도 스타우트의 단맛과 꽤 좋은 조화를 이룬다. 전혀 어색하지 않다. 단조로운 검정 맥주에 미묘한 복합성을 부여한다. 

라즈베리는 아니지만 체리를 품은 스타우트를 국내에서 맛볼 수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갈매기 브루잉은 오트밀 스타우트에 스위트 체리를 넣었다. 이름도 체리 폭탄을 의미하는 체리 밤이다. 벨벳 같은 질감 위로 짙은 초콜릿과 진득한 체리 향이 가득하다. 향의 레이어는 체리 시럽이 촘촘히 배어있는 초콜릿케이크와 견줄만 하다. 다크 초콜릿 케이크나 아이스크림과 곁들인다면 궁극의 디저트 맥주가 될 수 있다. 과일을 품은 스타우트의 힘을 믿어보시라.  

과일과 맥주가 만드는 혁명적 세계

크래프트 맥주에서 과일은 봉인 해제된다. 이 둘의 만남에 어떠한 구속도 없다. 크래프트 세계에서 과일과 맥주에서 파생되는 경우의 수는 무한에 가깝다. 망고, 파인애플, 블루베리, 포도, 딸기, 복숭아, 레몬, 청귤, 오미자, 유자는 인디아 페일 에일(IPA), 페일에일, 복비어, 콰드루펠, 임페리얼 스타우트, 사우어 에일과 한 몸이 되는데 거침이 없다. 

부산 고릴라 브루잉의 임페리얼 고제 라즈베리 민트는 국내 어떤 맥주보다 신박하다. 고제는 소금이 들어간 맥주다. 이 스타일에서 7.2% 알코올은 크래프트 맥주에서나 가능하다. 과일 씀씀이에도 아낌이 없다. 라즈베리와 블랙 커런트 그리고 민트가 잔뜩 들어갔다. 복합적인 베리 향과 싸한 민트 향 그리고 옅은 짠맛이 미묘하게 어우러진다. 호불호가 있을 수 있지만 그만큼 매력이 차고 넘친다.  

최근 문경 태평양조에서 출시한 망고스파이시는 더 파격적이다. 사우어 에일에 망고와 고추를 넣었다. 직선적인 고추 향과 달큰한 망고 향은 살짝 이질적이다. 그러나 다행히 신맛이 있다. 신맛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향을 붙잡아 부드럽게 다독인다. 이상하다고 느끼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미리 언급했다. 크래프트 세계에서는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는다고. 

향미를 넘어 가치를 만드는 K-과일 맥주
 

바네하임이 남양주 딸기를 넣어 만든 NYJ-스트로베리 ⓒ 바네하임 제공

 
올해 20주년을 맞는 서울 공릉동 터주대감 바네하임은 신토불이 과일을 넣는데 주저함이 없다. 바네하임의 맥주 스펙트럼은 흥미롭다. 꽃잎을 넣은 장미 에일과 벚꽃 라거는 이 양조장의 지향점을 보여준다. 블루베리와 크랜베리를 넣은 복비어(bockbier), 다복이는 벌써 10년째 사랑을 받고 있다. 진한 베리 향에 묵직한 바디감이 매력인 라거다. 고흥 유자로 양조한 유자 퀸은 국산 농산물을 적극적으로 맥주 속에 녹인 케이스다. 직접 짠 유자즙을 넣어 풍성한 유자 향을 느낄 수 있다. 

남양주 특산물 딸기 착즙이 들어간 NYJ-strawberry(남양주-딸기)에서는 신토불이 과일로 지역성을 드러내려고 하는 한국 크래프트 맥주의 방향성을 읽을 수 있다. 맥주 이름, 딸기 그리고 덩달아 느껴지는 향미는 남양주라는 정체성을 뚜렷하게 남긴다. 
 

태평양조 민트사우어 ⓒ 윤한샘


이런 관점에서 태평양조의 민트 사우어도 주목해야 한다. 민트 사우어는 토종 야생 효모로 발효한 맥주에 오미자와 민트를 넣었다. 오미자는 문경의 특산물이다. 쌉쌀한 민트 향과 짜르르한 신맛 뒤로 느껴지는 새콤함이 재미있다.   

조연이 주연만큼 중요한 시대다. 맥주 세계에서 과일은 조연이다. 주연을 빛내고 자신도 빛나는 조연이다. 과일은 맥주 속에서 향미뿐만 아니라 지역 정체성을 빛내는 존재가 되고 있다. 낙과와 못난이로 버려지는 과일도 맥주를 만나면 가치가 될 수 있다. 농민과 소비자 모두에게 득이 되는 방법이다.

사과 값이 전 세계 1등인 나라이기에 둘이 빚어내는 시너지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경험과 실력이 쌓인다면 과일 맥주는 높은 매출을 안겨주는 K-비어가 될 수 있다. 문은 활짝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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