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담소하는 영국인들. 런던 블랙프라이어 펍
윤한샘
맥주가 정치와 연결되기 시작한 시기는 18세기부터다.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은 귀족과 농민으로 구분되던 시대를 노동자와 자본가 시대로 바꿨다. 1848년 자유주의 혁명이 유럽을 휩쓸자 계급을 대표하는 세력들이 정치에 뛰어들었다. 부르주아지들의 전유물로 여겼던 의회 권력이 노동자, 농민, 시민 계급으로 분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야콥 블루메는 <맥주, 세상을 들이켜다>에서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각성을 맥주에서 찾았다. 산업사회 노동자의 술은 싸구려 증류주였다. 고된 노동과 낮은 임금 그리고 참혹한 환경 속에서 노동자들은 빨리 취할 수 있는 증류주를 선호했다. 블루메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이 보드카나 진에 중독되는데 일조했다고 말한다. 술에 취한 노동자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을 수 있었고 불평과 불만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치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이 늘어갈수록 사회문제가 눈덩이처럼 커졌다. 가정은 파괴됐고 공동체 질서는 망가졌으며 노동의 질도 떨어졌다. 19세기 후반 노동자들의 단체가 늘어나고 의회에 진출하면서 절주는 주요한 이슈가 됐다. 노동단체는 노동자들이 알코올 중독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교육과 캠페인을 벌였다. 증류주로 인한 폐해가 심각한 국가 위협으로 다가오자 정부와 기업도 이에 동참했다.
대안은 맥주였다. 싸구려 독주보다 맥주가 장려됐다. 가격이 저렴해 노동자들이 마시기에 부담이 없었고 알코올도 낮았다. 때마침 독일 바이에른을 중심으로 맛과 품질이 뛰어난 라거가 부상했다. 비슷한 시기 유행한 거대 맥주홀도 이 흐름에 한몫했다. 야외 집회가 제한된 노동조합은 맥주홀에 모였고, 임대료가 급했던 맥주홀 또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독일 맥주홀의 역할을 영국에서는 펍이 담당했다. 퍼블릭 하우스(Public house)의 줄임말인 펍(pub)은 일에 지친 노동자들이 유일하게 여가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며 일상을 나눴고 더 나아가 사회와 정치에 대해 토론했다. 자연스럽게 맥주는 공동체를 매개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맥주홀과 펍이 노동자의 놀이터가 되며 맥주는 정치와 손을 잡았다.
비어트랙(beer track)과 와인트랙(wine track)
2023년 미국 정치 분석가 론 브라운슈타인은 공화당 후보를 분석하며 트럼프 지지자를 비어트랙에, 론 디센티스 지지자를 와인트랙에 비유했다. 비어트랙은 블루컬러, 저연봉, 대학 졸업장이 없는 노동자 계층을, 와인트랙은 화이트컬러, 고연봉, 대학 졸업자를 의미한다. 트럼프가 론 디센티스를 지지하는 와인트랙을 어떻게 포섭하느냐가 공화당 경선의 핵심이라는 논평이었다. 21세기 미국 정치에서도 맥주는 노동자, 서민 계층을 대변하는 술을 상징했다.
2024년 1월 와인트랙을 타던 론 디센티스는 트럼프에 무릎을 꿇었다. 경선에서 물러나며 비어트랙을 타고 있던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다. 아직 경선에 남아있는 공화당 후보 니키 헤일리가 어떤 트랙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맥주와 와인을 모두 거머쥔 트럼프를 이길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술을 한 잔도 못 하는 트럼프의 마법이 궁금할 따름이다.
올해 총선을 준비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맥주당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 대선에서 3위를 한 도미닉 블라즈니에 고무된 맥주당은 많은 후보를 내겠다고 공언했다. 그들은 4년 전보다 더 세련되고 정제된 모습으로 선거를 준비하고 있다. 30년 전 폴란드 맥주 애호당과 다른 길을 걷는 방법을 택한 듯하다.
유로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블라즈니는 기후 변화와 연대를 이야기했다. 맥주당원으로 입후보한 카트린 프라프로트니크는 기회의 평등, 보건, 교육을 내걸었다. 맥주문화를 통해 젊은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정치 언더독'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일까. 과거에는 다양한 맥주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 같은 모호한 가치를 이야기했다면 지금은 현실 정치에 어울리는 보편적 가치를 다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스트리아 맥주당이 총선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맥주로 보편적 가치를 매조지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다양성과 취향을 존중하고 자신이 믿는 가치를 당당하게 주장하는 그들의 문화는 부럽다. 만약 대한민국 총선에 도미닉 블라즈니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의사 출신이 맥주당의 대표라는 사실부터 큰 비난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정치적 조리돌림을 당하며 조용히 사라졌을 것이다.
곧 다가올 대한민국 총선, 엄청난 마타도어와 갈등이 넘쳐나겠지만, 격랑의 물결 속에서도 국민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길 바란다. 노동자, 서민 계층의 정치 참여에 맥주가 멋진 파트너였듯, 맥주문화가 지향하는 다양성에 대한 존중, 맥주잔 아래 평등할 수 있는 권리, 침범당하지 않는 자유가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국회의원 선택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결과가 어떻든 승자에게 박수를, 패자에게 위로의 포옹이 함께 하길. 물론 그 순간에 시원한 맥주가 함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