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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 42수 천수관음상을 그렸다. 법당 안에서 펜으로 그리고 채색은 법당 밖으로 나와서 금색 수채 물감으로 했다. 천수관음은 부처님은 어디서든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범부의 염원을 보여준다, ⓒ 오창환
 
천수관음(千手觀音)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모든 중생을 보살피고 구제하는 보살이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숫자 천(千)은 무한대를 나타내므로 신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신의 편재성(遍在性/Ubiquity)을 형상화한 것이 천수관음이며, 부처님은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범부들의 믿음을 나타낸다.

우리나라 불교 회화나 탱화에서는 천수관음도를 종종 볼 수 있지만, 천수관음 불상은 극히 드물어서, 알려진 바로는 국립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불상,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불상, 개인 소장자의 불상, 그리고 서울 돈암동 흥천사 소장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보물 제1891호) 등 총 4점에 불과하다. 다가올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지난 5월 3일 흥천사를 향했다. 

안국역에서 버스를 타고 돈암2동 정류장에서 내려서 언덕길을 10여 분 올라가니 넓은 흥천사 주차장이 나오고 계단 위로 흥천사 대방이 보인다.
 
왼쪽은 흥선 대원군이 쓴 글씨로 대방에 걸린 편액이고 오른쪽은 극락보전 전경이다. 현판 옆에 용머리 조각이 보인다. ⓒ 오창환
 
흥천사(興天寺)는 원래 유서 깊은 절이다. 1396년 조선 태조의 비였던 신덕왕후 강 씨가 돌아가시자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에 정릉을 만들고 그 능을 관리하는 능침사로 흥천사를 창건했다. 한양 천도 후 도성안 최초의 사찰이었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이 왕권을 승계하자 정릉을 도성밖인 지금의 정릉동으로 이전시켰고 흥천사도 점차 위세를 잃기 시작한다.

명맥을 유지하던 흥천사는 1504년과 1510년의 화재로 폐사되고 만다. 참고로 도성 내 정릉이 있었던 중구 정동도 옛 이름은 정릉동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동명 정리를 하면서 정동이 되었다.

그러나 후대에 신덕왕후 강씨의 위상이 재평가되면서 능을 관리하는 사찰의 필요성이 제기되어서 현재의 위치인 성북구 돈암동에 흥천사가 다시 세워졌고 영·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왕실 사찰의 위상을 갖추어 간다. 고종 때 흥천사는 특히 부흥하게 되는데, 고종 2년인 1865년에 흥선 대원군이 회주가 되어 대방을 중창하고 고종 28년 1891년에 천수관음상을 봉안하는 등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찰 경내에 대처승과 그 가족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2010년까지 조계종과 사찰관리를 두고 갈등을 빚는 등, 사찰이 몰라보게 쇠락하게 된다. 2011년 새로운 주지스님이 오시면서 사찰 내 주택을 이주시키고, 오래된 전각을 해제 복원, 이주된 주택 터에 현대적 법당을 짓는 이후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취재를 마친 후에 주변의 스케쳐들이나 지인들에게 흥천사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 흥천사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서 놀랐다. 하지만 수많은 문화재를 갖춘 매력적인 흥천사가 앞으로는 더 많이 알려질 것 같다.

   
흥천사 배치도. 극랍보전 앞에 마당이 있을 만한 자리에 대방이 있다. ⓒ 오창환
   
계단을 올라가면 대방(大房)이 나온다. 대방은 H 자 형태의 평면 구조로 앞에서 보면 양쪽에 누마루가 있고 뒤에서 보면 누마루 반대편이 박공지붕으로 되어 있다. 건물 전면에 대원군이 하사한 편액이 걸려있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던 대원군답게 추사의 글씨체와 굉장히 비슷하다. 오른쪽 누마루에 옥정루(玉井樓)라는 현판이 있어서 지나가는 스님에게 여쭤 봤다.

"스님, 저기 현판에 우물 정자가 있는 것을 보면 이 근처에 우물이 있었나 봐요?" 
"저도 들은 이야기인데, 예전에 큰 우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겨울에도 차갑지 않은 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대방은 염불과 수행을 목적으로 한 공간과, 승방 부엌등의 부속 공간이 함께 있는 복합 건축물이다. 특히 법당과 달리 온돌 난방이 되었다. 대방은 부엌까지 있었으므로 우물이 있었다면 안성맞춤인 자리였을 것 같다.

흔히 여러 사람이 모여 시끄럽고 정신없는 상황을 야단법석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원래 불교에서 나온 말로 '야단(野壇)'이란 '야외에 세운 단'을 뜻하고, '법석(法席)'은 '불법을 펴는 자리'라는 뜻이다. 야외 행사에 사람이 많이 모이면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하게 된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상황을 처음의 뜻과 달리 사용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건축 기술이 발전하고 온돌 난방이 일반화되면서 야단(野壇)을 세울 만한 절 마당에 대방을 건축하게 되었다. 이제 대방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면서 불공을 드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대방이 예쁜 절마당을 가로막아 답답한 느낌도 들지만, 대방 건축이 당시의 실용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왼쪽은 흥천사천수관음상으로 금동으로 된 불상이 화려하다. 오른 쪽은 극락보전 안의 용꼬리 조각. ⓒ 오창환
 

대방을 거쳐 극락보전(極樂寶殿)으로 올라갔다. 1853년(철종 4년)에 건축된 극락보전은 서울시 유형문화재이며 부처님 세 분을 모시고 있다. 법당 안에 들어가니 할머니 불자 두 분이 독경을 하고 계시다. 한 분은 바닥에 앉아 계시고 한 분은 의자에 앉아 계신다. 나도 스케치북을 폈다. 우리나라 보물을 바로 코 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놀랍고 바로 앞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도 놀랍다.

나는 오전에 갔는데 이런 경우는 절대 그림을 서둘러 그리지 않는다. 천천히 하나하나 감상하면서 그린다. 채색은 밖에 나와서 한다. 점심을 먹고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리는데 그 불상만 그리면 색조가 너무 단조로울 것 같아서 법당 기둥에 조각된 용꼬리를 그려 넣었다. 용꼬리는 조선 말기의 불교 건축 양식에서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건물 밖에서 보면 용머리가 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화재 속에 앉아서 우리나라의 보물을 그리면서 서너 시간을 보냈다. 불법(佛法)은 편재하는 것이니 그곳이 법당이든 진흙탕이든 가리지 않겠지만, 나 같은 중생이 그 뜻을 어찌 알랴.
 
극락보전 내부 기둥에 있는 용꼬리를 그렸다. 건물 밖에는 용머리 조각이 있다. ⓒ 오창환
 
태그:#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 #흥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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