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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가 들려주는 동급생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어린이 관점에서 재구성한 글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 ㅇㅇ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입니다. 5월에는 어린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른들이 많으니까 꼭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면 이제 중학교 공부를 준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어른들이 많아요. 그런데 착하고 똑똑한 우리 담임쌤은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고 말해요. 제 친구들은 엄마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너무 많지만 꾹꾹 참아요.

우리는 학교에서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도 배우지만 놀이도 배워요. 인성놀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인성놀이 시간에는 문제집을 풀거나 학원 숙제를 할 수 없어요. 책상을 다 치우고 둘러앉거나 체육관에서 정해진 놀이를 해야 하거든요. 땅따먹기, 수건 돌리기, 얼음땡, 고무줄, 줄다리기, 공기놀이...... 엄마는 제 이야기를 듣고 이상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왜 인성놀이라고 부르냐고요.

쌤이 그러시는데 우린 자라서 지금 어른들보다 더 훌륭한 어른이 될 거래요. 멋진 어른이 되려면 서로를 돕고 아껴주는 다정한 마음이 필요한데, 친구들이랑 싸우지 않고 즐겁게 잘 놀다 보면 그런 마음이 만들어진대요. 그런데 우리가 너무 안 논다는 거예요! 매일 학원 가고, 남는 시간엔 유튜브 보고, 게임하느라 서로를 이해할 시간이 부족해져서 작은 일에도 서로 싸우게 되는 거라고요. 함께 어울려 놀 시간도 없는 우리가 불쌍해서 학교에서 놀이를 가르치기로 결심했대요.
 
서울역사박물관 바닥분수. 2023년 여름의 풍경
▲ 물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어린이들 서울역사박물관 바닥분수. 2023년 여름의 풍경
ⓒ 임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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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반 아이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게 학원숙제거든요? 학원을 다니는 친구들은 많이 힘들어하지만 엄마한테는 말할 수 없대요. 엄마가 '다 너 잘 되라고, 사랑하니까 이런 걸 시키는 거야'라고 말하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대요.

정말로 사랑한다면 괴롭히지 말고 그냥 돈으로 달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을 만큼 힘들어해요. 용기 내서 힘들다고 말하면 '힘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엄마도 있대요. '다른 아이들도 다 하는 건데 징징대지 마'라고 하기도 한대요. 우리는 서로 다른 유전자를 받고 태어난 사람이라서 공장에서 만든 똑같은 모습의 장난감이랑은 다른데 왜 비교할까요. 힘들다고 하면 제발 믿어주세요.

쌤은 착해야 훌륭한 어른이 된다고 말해요. 이태영 변호사를 아세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데 가여운 사람들을 지나치지 못하셔서 독립운동가,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셨대요. 쌤은 서울대를 나온 공부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태영 변호사처럼 훌륭한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하시며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어요. 사람을 미워하고 질투하면서 공부를 잘하면 괴물이 된대요.

우린 사회시간에 훈맹정음을 만드신 박두성 선생님에 대해서도 공부했어요. 춘향전에 나오는 심봉사는 우리나라의 가장 유명한 시각장애인이시잖아요. 그분은 운이 좋아서 시력을 되찾았지만 다른 많은 시각장애인들은 그럴 수가 없대요. 박두성 선생님은 모든 사람들이 글을 읽었으면 하는 예쁜 마음으로 한글점자를 만드셨다고 해요.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포스터. 1923~1927년 사이에 사용된 어린이날 종이기. 1928년 이후에 사용된 어린이날 포스터. 1928년 이후 사용된 종이기. (출처: 방정환전집, 2019)
▲ 어린이날 포스터 및 종이기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포스터. 1923~1927년 사이에 사용된 어린이날 종이기. 1928년 이후에 사용된 어린이날 포스터. 1928년 이후 사용된 종이기. (출처: 방정환전집, 2019)
ⓒ 임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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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어린이란 단어가 없었대요. 그래서 우리를 어린놈, 어린년, 애새끼, 자식이란 단어로 불렀는데 아이들을 불쌍하게 여긴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이란 단어를 만드셨대요. 어린이 잡지도 만들고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동화, 동요, 동시를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주셨대요.

옛날 어린이들은 산드룡의 유리구두(신데렐라) 이야기를 듣고 무서워서 엉엉 울었다는데 우리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요. 산드룡하고는 다르게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살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무서워하는 건 계모가 아니라 학원숙제인걸요?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고, 어두운 속에서 우리처럼, 또, 자라는, 불쌍한 어린 영들을 위하여, 그윽히,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짰습니다.
-신유년(1921) 말에, 일본 동경 백산(일본 하쿠산) 밑에서 소파
<사랑의 선물>(방정환, 1922)
<방정환 전집>(한국방정환재단, 2019)

엄마아빠는 우리가 맨날 놀기만 한다고 하시는데 사실은 맨날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어요. 책을 읽고 독서감상문을 열 줄이나 쓴답니다. 영어 단어도 일주일에 일곱 개나 외우고, 곱셈과 나눗셈도 배운답니다. 이제는 엄마아빠가 불러주지 않는 동요도 배우고요, 훌륭한 어른이 되기 위해 골고루 먹고 바른 자세로 앉아 척추를 보호하는 법도 배워요. 친구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싸웠을 때 예쁘게 화해하고 다시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도 배운답니다. 그러니까 맨날 논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맨날 노는 것처럼 보여도 제발 조금만 더 쉴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학교 끝나고 친구들이랑 놀이터에서 놀고 싶어요. 어린이날이 다가오면 갖고 싶은 것을 물어보시는데 '하고 싶은 것'을 물어봐주실 수 있나요? 갖고 싶은 것은 물건이지만 하고 싶은 것은 엄마아빠나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거예요.

어떤 친구는 혼자 조용히 산책하고 싶어 하고요, 또 다른 친구는 친구들과 팔짱을 끼고 언니오빠들처럼 시내거리를 돌아다니고 싶어 해요. 운동장에서 시간제한 없이 마음대로 놀고 싶어 하는 친구도 있어요. 가족과 공원에서 배드민턴 치며 놀고 싶어 하는 친구들도 많아요! 혼자서 갖고 놀아야 하는 비싼 장난감도 좋지만요. 많은 친구들이 돈으로 살 수 없는 선물을 원해요. 우리는 지쳐있고 외롭거든요.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봐주시면 안 될까요?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친구를 이기는 법은 쉽게 가르쳐주고 학원에서 혼자 공부하며 연습도 충분히 해요. 하지만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을 실천할 시간은 부족하답니다. 열심히 배운 사랑과 우정을 연습할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는 왜 이렇게 바쁜 걸까요. 

우리는 서로를 돕고 싶어요. 착한 사람이 되고 싶고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고 싶어요. 엄마아빠랑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아름답게 자라고 싶어요. 우리를 믿고 사랑해 주세요. 우리는 잘할 수 있어요. 
 
1945년 해방을 맞이하고 우리말을 되찾으며 만들어진 동요들 중 하나이다. 희망적인 분위기를 강조한 밝고 명랑한 분위기의 동요이다. (출처: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윤석중 외 35인)
▲ 어린이 왈츠(1951) 1945년 해방을 맞이하고 우리말을 되찾으며 만들어진 동요들 중 하나이다. 희망적인 분위기를 강조한 밝고 명랑한 분위기의 동요이다. (출처: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윤석중 외 35인)
ⓒ 임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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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에게 드리는 글

일.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봐 주시오.
일. 어린이를 늘 가까이하여 자주 이야기하여 주시오.
일.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시오.
일. 이발이나 목욕, 의복 같은 것을 때맞춰 하도록 하여 주시오.
일.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일. 산보와 나들이 같은 것을 가끔 시켜 주시오.
일.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화만 내지 마시고 자세히 타일러 주시오.
일.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 그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해 주시오. 

2023년 5월 1일 <동아일보>에 실린 어린이해방선언문.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교보문고, 2013) 재인용.

지속가능한 가치로 아이들을 길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육아 이야기를 씁니다.
태그:#어린이, #어린이날, #사랑, #어린이날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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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입니다. 좀 더 나은 세상,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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