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오멘: 저주의 시작>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오멘: 저주의 시작> 스틸컷

영화 <오멘: 저주의 시작> 스틸컷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오멘> 시리즈가 돌아왔다. 1976년 영화 <오멘>으로 시작한 이 프랜차이즈는, 어린아이의 외형을 한 악마 데미안이 자신의 입양 가정에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를 음산하게 그려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원작에서 몇몇 사람들은 데미안의 정체를 의심하며, 그의 생모가 묻힌 무덤을 파헤친다. 그 자리에는 짐승의 뼈만이 남겨져 있었다. 4월 3일 개봉한 <오멘: 저주의 시작>은 바로 그 데미안의 생모에 관한 비밀을 풀어낼 것이라 밝혀져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전반적인 줄거리 요약과 함께 본작을 감상할 때 주목하면 좋을 지점을 몇 개 짚어 보고자 한다.   1971년, 이야기의 주인공 마거릿은 수녀가 되기 위해 로마로 향한다. 어릴 적 자신을 키워 준 추기경과 원장 수녀의 환영을 받으며 수녀원 생활을 시작하지만, 어느 날 브레넌 신부라고 불리는 사람이 교회의 진실을 알려주겠다며 접근해 온다. 종교로부터 등 돌린 사람들을 다시 확보하기 위해, 교회가 자체적으로 적그리스도를 태어나게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 그는 이 계획을 막기 위해 자신이 가진 사진 속의, 악마의 문양 666이 몸에 새겨진 '카를리타 스키아나'라는 아이를 찾아내야 한다고 신신당부한다. 마거릿은 이를 믿지 않지만, 이미 드리운 의심은 가시질 않는다.

마거릿은 확인차 수녀원의 미혼모 출산 지원 시설을 방문한다. 그곳에는 출산을 앞둔 한 여성이 어린 시절의 마거릿처럼 침대에 묶여 있었다. 아이를 낳기 싫다며 거세게 저항하던 여성은 마취 가스를 들이마시자마자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신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낸다. 그의 몸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푸르고 길쭉한 짐승 '자칼'의 손이었다. 이 광경을 본 마거릿은 졸도하고, 신부의 경고를 약간이나마 믿게 된다.

공포의 계보

위 장면은 본작이 1968년 영화 <악마의 씨>처럼 임신과 출산에 대한 공포를 다룰 것이라고 선언한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악마'라는 소재를 사용하던 시리즈가 방향을 급선회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 그렇지 않다.

<오멘> 시리즈는 처음부터 '원했던 아이'와 '원치 않았던 아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불일치성을 공포 소재로 삼았다. 공포의 표면적 원인은 적그리스도 내지는 악마로 일컬어지는 아이이지만, 근본적 원인은 내 몸에서 태어난(혹은 태어났다고 여겨지는) 생명체가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한다는(내 자아와 합일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었다. 외부의 공포로 위장한 바디 호러(body horror)였던 셈이다. <오멘: 저주의 시작>은 이러한 기존 작품들의 특성을 극대화해, 비교적 단단한 여성주의적 메시지를 담아낸 작품으로 탈바꿈했다.

바디 호러를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은 줄곧 있어 왔다. 2020년대에 들어서는 많은 여성 제작자가 이에 도전하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성공 사례 중 하나가 바로 레이철 바이스 주연의 <데드 링거>(2023)다.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감독한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이 6부작 드라마는, 정서적으로 일치하던 쌍둥이가 서서히 어긋나는 원작의 요소를 살림과 동시에 그들의 직업인 산부인과 의사라는 요소를 살려 여성의 재생산권 논의로까지 나아간 바 있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이 자신의 자아와 일치하던 타인의 신체가 어긋나기 시작하는 과정을 다루었다면, <오멘: 저주의 시작>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자신과 타인을 동일시하는 인물을 그린다. 카를리타를 경계하라는 주의를 들은 마거릿이지만, 그는 환각이나 따돌림 등의 공통된 기억에 기반해 "넌 예전의 나와 같다"라며 문제아인 카를리타를 감싸고 돈다. 그러면서 카를리타를 독방에 가두려던 원장 수녀에게 일어서 저항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마거릿이 카를로타를 비호하는 동안, 카를리타의 주변에서는 점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결국 한 수녀가 카를리타를 위해서라는 유언을 남기고 분신자살하기까지 이른다.
 
마거릿과 카를리타. 영화 <오멘: 저주의 시작> 스틸컷

▲ 마거릿과 카를리타. 영화 <오멘: 저주의 시작> 스틸컷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이 시점까지 본작의 악당은 보이지 않는다. 뒤틀린 신앙을 강요하는 수녀원장과 괴물 자칼을 빌런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공포를 조장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 또한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된 악역은 바로 마거릿의 불안이다. 자신의 트라우마,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사이 무언가 부정한 짓을 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마거릿과 관객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해 온다. 마거릿은 어릴 적부터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봐 왔지만, 자라나는 과정에서 그것이 환각에 불과하다고 교육받는다. 자신의 감각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는 작중 현시점까지 이어져,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는 자칼을 분명히 보고도 피곤해서 착각한 거라는 추기경의 말에 설득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료 수녀의 자살 직후, 상황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던 마거릿은 몰래 카를리타의 출생 파일을 찾아 나선다.

카를리타에 관한 진실은 원장실의 성모 마리아 벽화 뒤 감춰진 지하 창고에 봉인되어 있었다. 성녀 신화의 이면에 있던 가톨릭의 여성 착취까지 지적하는 상징적 장면이다. 교회는 인간과 자칼의 교미를 통해 적그리스도를 낳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태어나 버려진 여자아이들이 스키아나라는 이름을 공유했던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태어나기까지 마지막 한 번의 교배만이 남은 상황. 진실을 알아낸 마거릿은 카롤리나와 함께 도망치려고 하지만, 교회 사람들에게 저지당해 혼자서 브레넌 신부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브레넌이 가지고 있던 사진과 카롤리타는 동일 인물이 아니었다. 사진 속의 아이는 이마에 666 문양이 있는 반면, 마거릿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카롤리타의 문양은 입천장에 있었다. 이에 마거릿은 자신이 또다른 스키아나임을 직감한다. 하지만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표식마저도 스스로 볼 수 없는 곳에 있어, 브레넌 신부가 대신 확인하기까지 이른다.

곧 마거릿이 그동안 불안해했던 보이지 않는 원인이 드러난다. 성품성사를 받기 전날 술에 취해 기절했을 때, 의식 불명 상태인 그를 교회 사람들이 끌어가 자칼과의 교미를 이미 진행했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마거릿은 배 속에 있을 아이를 제거하기 위해 신부가 아는 병원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마거릿은 다시 붙잡혀 교회 사람들이 전부 지켜보는 앞에서 배를 갈라 아이를 낳게 된다.

예상과 달리 아들 하나와 딸 하나로 이루어진 쌍둥이가 태어난다. 교회 사람들은 출산 이후에도 마거릿이 살아남자, 큰일을 이룬 거라며 그를 위로하려 든다. 특히 추기경은 마거릿의 '업적'을 찬양하며 그가 신성한 과업을 위해 희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노고를 위로하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느냐는 추기경의 말에, 마거릿은 이렇게 답한다.

"내 목소리밖에 안 들려."

마거릿의 주체성은 이때 완성된다. 그는 아들을 안아보겠다는 핑계로 아이를 손에 넣고, 옆에 있던 수술 도구를 쥐어 추기경의 목을 찔러 버린다.

비로소 짐승에서 사람이 된 여자들

마거릿이 추기경을 죽이는 장면은 일종의 '아버지 죽이기'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오이디푸스가 아버지인 라이오스 왕을 죽일 때부터 시작된 이 서사구조는 남성 캐릭터의 각성이 이루어질 때 줄곧 사용되어 왔다. 아버지를 죽인 아들은 그 직후 비극적으로 퇴장하거나 마지막 승리를 거머쥔다.

하지만 마거릿의 살해는 무언가를 쟁취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추기경을 죽인 시점에서 영화가 장대하게 끝나지도 않는다. 실랑이 끝에 아들도 죽이려던 마거릿은 아들을 빼앗기고, 딸과 함께 방에 남겨져 불타 죽을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문밖에서 엿듣고 있던 오히려 카롤리타가 마거릿을 구하고, 마거릿은 자기 딸을 붙들고 카롤리타와 함께 도망친다. '아버지 죽이기'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피해자의 연대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마거릿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아들을 낳자마자 교회 사람들에게 버려진 쌍둥이 딸에게서 역사적으로 존재해 왔던 선택적인 여아 낙태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살아남은 마거릿과 카롤리타, 그리고 딸이 설원의 한 오두막집에서 삶을 꾸려 가고 있는 모습이다. 악마의 '낙인'을 지닌 세 여자가 담담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짧지만, 그만큼 "어떤 아이들은 그냥 나쁘니까"라는 말로 악의 책임을 개인에게 귀결시키던 교회와 뚜렷하게 대조된다.

그런 최후의 3인에게 브레넌 신부가 다시 찾아오고, 교회가 살아남은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게 분명하다고 말하며 영화가 끝난다. 불길한 경고를 남긴 브레넌 신부에게 던진 마거릿의 마지막 한마디는 그가 추기경 살해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 그리고 <오멘: 저주의 시작>이 던지고자 한 메시지를 축약하기에 충분하다.

"날 좀 내버려 둬."

<오멘: 저주의 시작>은 '애 낳는 짐승' 취급받던 여성을, 원작에서 뼈다귀로만 남아 있던 그 존재를 어엿한 주체적 지위를 가진 인간으로 돌려놓았다. 아카샤 스티븐슨 감독은 오멘 시리즈를 플랫폼 삼아 독자적인 호러 세계관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감독 본인도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 <악마의 씨>가 아동 성범죄자 로만 폴란스키의 작품임을 고려하면, 유사한 소재를 다룬 영화를 직접 만들어 소재를 해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성과에 기반했을 때, <오멘: 저주의 시작>은 1976년작과의 연계나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금시대 공포영화의 새로운 고전이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장르적 재미는 간직하면서도 깊이를 가진 호러 영화가 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관람해 보는 건 어떨까.
 
영화 오멘저주의시작 넬타이거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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