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08 11:22최종 업데이트 24.04.08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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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국회의원 선거 사전투표를 하루 앞둔 4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2동 사전투표소에서 선거사무원이 기표소 앞에서 기표용구를 들어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저는 이번에 투표하러 가면 도장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그려 놓고 나오려고 했어요."

지난 2일 진행된 '페미니스트+퀴어 시사정치 토크쇼 권손징악'의 총선특집 긴급방송에서 한 이야기다. 지금은 아득한 일인 2021년 재보궐 선거 특집방송으로 시작된 권손징악은 비온뒤무지개재단이 운영 중인 퀴어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에서 총 세 개의 시즌이 생중계되었다. '페미니스트+퀴어'라는 소개 문구가 알려주듯 이 방송은 기성 시사정치 토크쇼에서 잘 나타나지 않던 페미니즘과 소수자의 입장에서 시사와 정치를 이야기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권손징악은 방송 시작 이후로 주요 선거 때마다 개표 상황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선거특집 방송'을 진행해 왔다. 4월 10일 총선 날에도 오후 5시부터 총선특집 방송을 진행할 예정이다.

그런데 이번 방송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소소한 문제 하나가 발생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기획자인 내가 방송을 하고 싶은 마음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과로에 지친 나머지 일을 할 기력이 사라진 건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주어진 업무로서의 방송은 너무나 하고 싶었다. 문제는 선거였다.

이번 총선에는 지금까지 이런 선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두드러지는 정책 의제가 없다. 조용한 선거도 아니고 뉴스도 쏟아져 나오긴 하는데 사람들의 관심이 모두 '누가 이기나'에 쏠려 있다. 이게 언론의 잘못인가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닌 게 정치인들조차도 의제를 띄우기보다 구도를 형성하는 데 집중했다. 서로가 서로를 심판하겠다는 것이다. 그래 심판하는 건 좋다. 하지만 그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지도 지금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마이크를 잡고 그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선거를 마주한 소수자들이 겪는 곤란함
 

2022년 4월 26일, 차별금지법제정촉구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소속 활동가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희훈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번 선거에서 의제들이 가려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정당과 인물을 보고 뽑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정당이 지금까지 지나온 길과 지향하는 가치를 살핀다면 이들이 어떤 정치를 할 것인지 가늠할 수 있다. 이건 후보로 나온 인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소수자로 살아가는 입장에선 이게 그리 간단하지 않다. 특히나 표 떨어질까 무서워서 정치인들이 피한다는 나 같은 성소수자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거대 정당들은 지금까지 나 같은 사람들을 대놓고 혐오하거나 무시하기를 반복해 왔다. 그 안에서도 소수의 의원들이 차별금지법 제정 등을 위해 노력했지만 적어도 이번 국회에서 당이 여기에 호응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 의원들은 거의 모두 공천에서 탈락했다.

그러니까 정당이 나 같은 이들에게 차별 없이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직접적으로 약속을 하거나 공보물에 공약으로라도 넣지 않으면 적어도 소수자로서 우리는 사실 약속 받는 게 거의 없다. 가끔 사람들을 만나면 '어차피 소수자들은 거대 양당을 찍지 않는다'는 식의 말을 듣곤 한다.

하지만 그건 오해다. 나도 표를 주고 싶지 않은 건 아니다. 물론 거대 양당이 완벽한 정당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뽑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은 순간도 있다. 하지만 단점과 흠결이야 보완하면 된다. 일단 표를 주고 더 나아질 것을 요구하고 기대할 수도 있다. 다만 그 전에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 소수자인 유권자들이 그들에게 표를 줄 명분을 주는 것이다. 평등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거대 양당에는 그게 없다.

작은 정당에 표를 주는 것이 마음에 걸리시나요? 하지만...
 

4·10 총선 사전투표가 시작된 5일 오전 서울 동작구 상도1동주민센터에서 유권자가 투표함에 용지를 넣고 있다. ⓒ 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 나 같은 유권자가 가진 선택지는 별로 많지 않다. 그중 하나는 나 또한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정당이나 후보자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정당은 소수정당으로 분류되는 진보 정당들이다. 그리고 다시금 딜레마는 찾아온다.

믿고 지지하는 것과 이들이 당선되리라 확신하는 건 다른 문제다. 거대 양당에 비해 자원도 사람도 부족한 이들의 대중적인 지지세는 그리 강하지 않다. 지역구의 경우 특별히 회자되는 몇 곳을 제외한다면 당선 가능성은 시작부터 확연히 낮아 보인다. 그리고 이번 총선에서는 국회에 진입할 비례의원을 배출할 수 있을지도 솔직히 불투명하다. 상황이 이러면 절박함에 표를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일찌감치 실망하고 선거를 포기하는 이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투표를 하러 가는 입장에서도 기대감이 낮아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지금까지 여러 선거를 치르며 표를 준 후보가 당선된 일보다 낙선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이번에도 지는 것일까. 이전보다 더 크게 지는 것일까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지난 2일에 진행한 권손징악 총선특집의 출연진인 권김현영 여성주의연구활동가에게 질문했다. 남은 총선 기간 동안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려면 무엇이 필요하냐고. 그리고 권김현영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소수자들이 소수정당을 찍는 게 효능감이 없다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데, 사실 약한 사람들이 약한 사람을 지지하는 건 정말 강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왜냐하면 약한 사람들이 센 사람들한테 기대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에요. 그래서 센 사람들을 찍고 싶어지는데 그 센 사람들이 결국은 우리를 안 지켜주거든요."

그건 '실패의 경험'이 아니었다
 

2022년 3월 28일 국회 본관 계단 앞에서 소수 정당과 시민단체 대표들이 다당제 정치개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이어 권김현영은 우리말을 들어주는 정당에게 한 석이라도 주는 것이 확실한 보험이 될 것이라고 발언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기분이었던 지난 선거의 경험들이 다른 방식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그 모든 선거들이 무력하고 나약한 실패의 경험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나는 소신을 지키기 위해 실패를 감행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를 지키기 위한 가장 확실한 보험을 선택한 것이구나. 무력하고 약한 것이 아니라 '센 사람'들을 포기하고 나를 위해줄 다른 약자와 함께하는 강한 선택을 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이번 선거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강하고 현명한 선택을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오는 10일 총선을 치르고 늦은 저녁쯤이면 아마 우리는 대략적인 결과를 알게 될 것이다. 전문가들이 예측하는 판세라는 것이 있지만 소수의 득표차로도 당락이 갈리는 총선의 경우 마지막까지 결과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가 있다면 나 하나쯤이라는 생각은 버리고 반드시 투표하길 바란다. 그 정당이 어디고 인물이 누구인지는 크게 상관없다. 서로 다른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이들이 공존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특성이니까. 다만 정당과 후보를 고르는 데에 있어 무엇보다 그들이 나의 삶을 나아지게 할 것인지 그리고 내가 속한 이 사회를 더욱 좋은 곳으로 만들지를 기준으로 놓았으면 한다. 그리고 믿는 방향을 향해 용감하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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