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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는 울퉁불퉁한 용 비늘 모양의 바위가 있고, 아랫 벽에는 용이 피를 흘린 것처럼 붉다. 동굴에서 절벽으로 올라가는 흰 바위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다.
▲ 태안 용난굴의 용 자국 바닥에는 울퉁불퉁한 용 비늘 모양의 바위가 있고, 아랫 벽에는 용이 피를 흘린 것처럼 붉다. 동굴에서 절벽으로 올라가는 흰 바위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다.
ⓒ 이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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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는 용이 있는 것으로 믿었다. 동네 애들이 모이면 지렁이가 뱀이 되고, 뱀은 이무기가 되며, 이무기가 용이 된다고 생각했다. 운동회나 소풍 때마다 비가 자주 왔는데, 학교 터를 닦을 때 구렁이가 죽었다는 얘기가 동네마다 있었다.

황룡사는 원래 궁궐을 짓기 위한 터였는데, 땅을 고르다가 황룡이 나타났기 때문에 절을 세웠다. 이 전설은 시골 학교의 구렁이 얘기와 비슷하다. 심지어 견훤의 출생 신화는 지렁이다. 지렁이는 땅에 사는 지룡(地龍) 혹은 토룡(土龍)으로 불렸다. 고귀한 용이, 밝으면 꿈틀하는 힘 없는 지렁이와도 연결된다.

용난굴은 꾸지나무골에서 만대항까지 10.2km의 서해랑길 72길에 있다. 이 길은 우공이산 정신으로 만든 길이다. 2007년 12월 7일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때, 약 123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길이 없어서 산을 통해 바닷가에 접근하였다. 차윤천씨가 길을 내서 봉사자가 다니도록 도와주었으며, 이후 3년 동안 곡괭이 하나로 길을 연결하였다. 군청에서 중장비로 길을 만들었다면 오르락내리락 길이 좀 더 평평해졌을 것이나 산은 더 많이 훼손되었을 터이다.

모래에 묻혀 있는 용난굴도 1년 동안 맨손으로 되살려냈다. 명주실 한 타래(약 100미터) 깊이라고 전해 내려왔지만, 몇 미터 깊이의 평범한 굴이다. 그러나 굴 이름부터 용굴이 아니고 용이 난 '용난굴'이다. 큰 굴에 있는 용은 승천했고, 작은 굴의 용은 승천하지 못하고 망부석이 되어 지금도 용난굴을 지키고 있다.

용난굴은 용과 관련된 굴 중에서 백미이다. 바닥이 용의 비늘처럼 생겼고, 동굴 아랫부분은 용의 피처럼 바위가 붉다. 동굴 천장에서부터 올라가서 바깥에서 산 절벽으로 올라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서양에서는 지크프리트가 용의 피를 뒤집어쓰고 불사신이 된다. 한국의 용은 동굴을 빠져나가면서 피를 흘리는 약한 면을 보여준다.

서양용은 하늘을 날기 위해 날개가 달렸는데, 동양용은 날개가 없다. 서양 천사는 날개가 있는데, 한국 선녀는 날개가 없는 것과 같다. 날개가 없으니, 사람들은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이 절벽을 타고 올라서 승천하는 것으로 상상했을 것이다. 굴과 바위에 있는 여러 흔적이 상상에 힘을 실어준다. 서해랑길은 그 전에 만들었는지, 용난굴을 들르지 않고 지나치게 되어 있다.

또 태안에는 토끼에게 속는 어수룩한 용이 있다. '삼국사기 김유신조'에 김춘추가 고구려에 갔다가 선도해의 도움으로 탈출한다. 이때 선도해가 말해준 내용이 용왕이 딸의 속병 하나 고치지 못하고 토끼의 간을 구하다가 속는 얘기인 별주부전이다. 이 내용은 토생전과 수궁가 등 다양하게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다. 태안 서해랑길 65길은 별주부전을 자기 마을 얘기로 만들었다.

'삼국유사 거타지조'에는 이보다 더 한심한 용 얘기가 있다. 늙은 용 자손의 간과 창자를 먹어 치웠고, 자신마저 먹으려는 여우를 거타지에게 활로 쏴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여우가 용보다 신통력이 강하다고 생각한 것인데, 거타지가 바다를 무사히 건너도록 도와주는 능력은 있다. 용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한다.

한편으로는 고려속요인 '쌍화점'에 "두레우물에 물을 길으러 갔더니만, 우물 용이 내 손목을 쥐더이다"라는 남녀 간에 희롱하는 얘기가 있다. 수로부인 미모를 탐한 용 얘기도 있다.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남편과 임해정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해룡이 나타나 바닷속으로 납치했다. 경내 백성을 모아 돌려주지 않으면 "그물로 (너를) 잡아 구워 먹고 말리라"라는 '해가'라는 노래를 불렀더니 용이 부인을 돌려줬다.

이처럼 용은 고귀하고 신통한 능력이 있으면서도, 동굴에서 나오면서 피를 흘리거나, 토끼나 여우에게 수모를 당한다. 쌍화점이나 수로부인 설화처럼 애욕으로 엮이는 평범한 감정을 가진 동물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태안 길이 마음에 더 드는 이유는 어리골, 수룽구지, 노루금, 와랑창, 악넘어, 뱃면 등 이름이 정겨운 우리말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태안에는 ‘삼국사기 김유신조’의 용왕이 토끼에게 속는 별주부전을 자기 마을 얘기로 만들었다. 그리고 ‘삼국유사 거타지조’에서 용은 전능하지 않고 늙은 여우에게 욕을 당한다.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애욕에 얽힌 수로부인이나 쌍화점 가요도 전한다.


태그:#태안용난굴, #별주부전, #거타지, #수로부인, #쌍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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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역 해군 제독 정치학 박사 덕파통일안보연구소장 전)서울시안보정책자문위원 전)합동참모본부발전연구위원 저서<관군에서 의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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