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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전쟁으로 기록된다. 6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구 각국은 사회의 '건강성'과 가정의 '정상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서 가정의 정상성이란 부양자이며 공적 영역에서 유급 노동을 하는 아버지와 피부양자이며 사적 영역에서 무급 가사노동과 양육을 담당하는 어머니, 그리고 몇 명의 자녀로 이루어진 가정을 의미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핵가족 모델이 되었고, 20세기 중후반의 사회과학은 근대 핵가족의 정상성과 정당성을 지지하는 지식을 활발하게 생산하고 유포하였다. 미국은 1872년 아이오와 주립대학에 처음으로 가정학과(Domestic Economics)를 설립한 이래 여학생을 대상으로 가정학 교육을 해왔는데, 전후 정상가족 신화가 강화되며 가정학 교육은 더욱 중요해졌다.
 
1950년대 전형적인 미국 핵가족 모습
 1950년대 전형적인 미국 핵가족 모습
ⓒ Pinterest 제공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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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여성, 하나

가정학과가 생긴 이래 다양한 '과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여학생을 대상으로 요리, 세탁, 다림질, 바느질, 육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어머니 되기'(mother craft) 교육을 실시하였다. 심지어 여학생들의 가사 및 육아 교육을 위해 대학은 캠퍼스에 실습용 아파트까지 지었다. 코넬대학의 경우 매 학기 8명의 여학생이 '실습 아파트'에서 지도교수와 함께 생활하면서 과학적이고 비용 효율적인 방식으로 모든 종류의 가사 활동을 '수학'했다.

대학은 육아 실습을 위해 정말 살아 있는 영유아를 고아원을 통해 확보하여 실습용 아파트에 공급했다. 아기들의 이름은 다양했는데 성은 모두 도미콘(Dome-con), 즉 가정학의 약자였다. 코넬대학과 고아원 계약에 따르면, 아기는 "학교가 만족하지 않을 경우 언제나 돌려보낼 수" 있었다.

라이프 매거진에 실린 "데니 도미콘 아기 육아하기" 기사 바로가기 
https://rmc.library.cornell.edu/homeEc/9apartments/life.html

모든 여성이 결혼하고 가사와 육아 담당자가 되기를 기대하는 가운데 결혼은 했으나 자녀가 없는 여성은 '문제적'이었다. "무자녀 부부는 불완전하고 그 삶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완벽한 가족 신화에 대한 믿음 속에, … 자녀가 없는 가족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고, 기혼 여성이 아기가 없으면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윌슨-부터바우 2023: 110-111).

문제적 여성, 둘

한편, 결혼 제도 밖에서는 결혼하지 않았는데 임신과 출산을 한 여자가 '문제'였다. "1940-50년대 심리학 및 정신분석학 행동이론은 정서적 장애가 있는 여성이 혼외 성관계를 갖고 '사생아'를 임신한다고 보고 이들은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같은 책: 232). 그리고 치료는 바로 신경증을 앓고 있는 미혼모에게서 아기를 빨리 분리하여 무자녀로 인해 신경증을 앓게 될지 모르는 기혼 무자녀 여성에게 입양 보내는 것이었다. 정신분석학자 헬렌 도이치(1945)는 이렇게 말했다.

"미혼모 중 가장 성숙하지 못한 미혼모들이 아기를 기르겠다고 싸운다. 대부분의 미혼모를 위한 최선의 해결책은 아기를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다."(같은 책: 235)

1962년 구세군 미혼모 시설 안내 책자에도 "미성숙하고 더 강박적인 미혼모일수록 아기를 독립적 인격체로 보지 않고 양육하려는 욕구가 더 강하다"(같은 책: 234)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이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아기를 키우도록 장려했던 미혼모 시설은 임신한 여성이 출산할 때까지만 머무는 장소가 되었고, 시설 종사자들은 입양을 망설이거나 거부하는 미혼모들에게 한결같이 입양만이 가장 좋은 선택이고 유일한 선택임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Fessler 2006).

"아기를 포기하면, 아기는 미혼 엄마가 줄 수 없는 '정상' 가정생활을 누리게 되고, 엄마들은 임신 전의 '정상'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흔한 설명이었다"(윌슨-부터바우 2023: 131). 1945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이러한 경향이 매우 강했는데 이 시기 보수적으로 추산하여 약 150만 명이 넘는 미혼모가 입양으로 아기를 잃었다. 이 시기를 역사는 '아기 퍼가기 시대'(Baby Scoop Era)라고 부른다.

입양 중심에서 원가족 보호로 전환

하지만 변화는 왔다. 1971년 유엔여성지위위원회는 "미혼모를 돕는 일이 혼외 출산을 장려하는 일로 여겨서는 안 되며 그들을 사회적 악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고 선언했다. 같은 해 미국아동복지연맹은 "미혼모는 부모로서 법에 의해 보장된 모든 권리와 의무를 모든 상황에서 누릴 수 있으며, 미혼모와 자녀 사이의 권리와 의무는 기혼일 때 아기를 낳은 부모와 그 자녀 사이의 권리와 의무는 동일하다. 미혼모는 모든 사회적 지원과 안전을 위한 방안들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더구나 1970년대 중반부터는 미성년 부모의 권리가 강화되어 미성년 미혼모의 의사는 그 부모의 의사에 우선하는 법적 보호를 받게 되었다. 1978년 미국아동복지연맹은 "어떤 아동도 친부모의 돌봄에서 소외되어서는 안 되며, 경제적 이유나 가정을 만들어준다는 이유로 친부모의 보살핌을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했다. '아기 퍼가기 시대'가 끝난 1970년대 중반 이후 미국에서 아기를 포기하는 미혼모 비율은 1% 미만으로 감소했다.

2024년 현재 대한민국은?

아기를 포기하는 한국의 미혼모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은 되지 않지만 2020년 입양아동의 90% 이상이 미혼모의 아기였다. 아동의 원가족 보호를 우선으로 규정하는 헤이그국제아동입양협약에 2013년에 가입했으나 한국은 여전히 협약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여 비준을 받지 못하고 있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정부는 작년 위기 산모가 신분을 감추고 익명으로 출산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허용하는 '보호출산제'를 도입하였다. 이 법은 올해 7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위기 산모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아기가 원가족의 보호를 받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을 하여야 할 정부가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되는 아기를 양산하는데 힘을 실었다.

출생 정보는 제한되고 출생에 관한 서사가 삭제되고 정체성을 상실한 아동들이 얼마나 힘겨운 성장을 하는지 우리는 많은 입양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고 있다. 게다가 대다수의 미혼 산모가 정부 지원만으로는 임신과 출산까지의 비용을 충당하지 못하는 형편인데, 익명 출산을 결정한 산모에게는 의료비 전액을 지원한다.

미국의 '아기 퍼가기 시대'라는 역사의 한 자락을 들춰보며 우리가 가는 방향을 점검하고 바로 잡을 것이 있다면 늦기 전에 시정해야 하지 않을까. 미래의 아기가 익명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고아로, 보육원으로 가는 삶을 살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원가족을 잃고 정체성의 문제를 안고 살아갈 아기가 자라면서 "살려줬으니 고마운 것"이라는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도록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글은 다음을 참조하여 작성하였다. 
캐런 윌슨-부터바우. 2023. 『아기 퍼가기 시대: 미국의 미혼모, 신생아 입양, 강요된 선택』. 안토니아스.
Khazan, Olga . Oct. 19, 2021. “The New Question Haunting Adoption,” The Atlantic.
Fessler Ann. 2006. The Girls Who Went Away. Penguin Books.
코넬대학교 https://rmc.library.cornell.edu/homeEc/cases/apartments.html


태그:#미국역사, #정상가족, #미혼모, #입양, #보호출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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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전공했으며 미혼모/입양 관련 책을 내고 지역민 대상 구술채록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미혼모의 탄생: 추방된 어머니들의 역사>를 썼으며 <아기 퍼가기 시대: 미국의 미혼모, 신생아 입양, 강요된 선택>을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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