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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편집자말]
신안의 팔금도는 암태도와 안좌도 사이에 있다. 암태도에서 중앙대교를 건너면 팔금도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철쭉공원과 옐로우섬 표석이 잇달아 보인다. 봄이 되면 철쭉공원에 철쭉이 피고, 옐로우섬 표석 주변은 유채꽃이 넘쳐난다. 유채꽃 단지에선 매년 4월 유채꽃 축제가 열린다. 올해는 4월 12일부터 21일까지 열린다.
 
매년 4월 열리는 팔금도의 유채꽃 축제.
 매년 4월 열리는 팔금도의 유채꽃 축제.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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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금도에서의 이순신

철쭉공원엔 군영소 표석이 세워졌다. 여기엔 '軍營所 丁酉 十月 李舜臣 一心'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친필을 집자(集字)하여 새긴 것이다. 이순신과 팔금도의 인연은 1597년 정유년 10월(음력)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순신 군영소 표석. 이순신의 글씨를 집자(集字)해 2017년 만들었다.
 이순신 군영소 표석. 이순신의 글씨를 집자(集字)해 2017년 만들었다.
ⓒ 팔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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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9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거의 궤멸한 조선 수군을 재건해 명량대첩을 일궈냈다. 대첩 직후 이순신은 곧바로 명량에서 빠져나와 군선을 수리하고 전투를 준비할 수 있는 새로운 수군 기지를 물색했다. 당사도, 어의도, 칠산 앞바다, 법성포, 홍농, 위도, 고군산도까지 북상했다.

다시 옥구, 변산, 법성포, 어의도로 남하했다. 그리고 10월 11일 발음도(發音島)에 도착해 10월 29일까지 머물렀다. 이어 고하도로 옮겨 108일 동안 머물렀고 다시 고금도로 기지를 옮겼다. 고금도에서 수군 전력을 회복한 이순신은 1598년 11월 노량해전을 승전으로 이끌었다. 당시 발음도에서 쓴 '난중일기'를 보자.
 
안편발음도(安便發音島)에 도착하니 바람이 순하고 날씨도 화창했다. 배에서 내려서 제일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가 배를 감추어 둘만한 곳을 살펴보았다. 동쪽은 앞에 섬이 있어 멀리 바라볼 수 없지만 북쪽으로는 나주와 영암의 월출산까지 터졌고 서쪽으로는 비금도까지 통하여 눈앞이 시원하였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11일)
새벽 두 시쯤 꿈을 꾸었다.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로 가는 데,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로 떨어졌으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막내 아들 면(葂)이 끌어안은 것 같았는데 그러다 잠에서 깨었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안 편지를 전했다. 편지를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둘째 아들)의 편지를 보니, '통곡(慟哭)'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짐작했다.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은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는고. …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이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고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
내일이 막내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된다. 마음 놓고 통곡할 수도 없어, 군영 안에 있는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16일)
 
발음도에 머무는 동안 이순신은 막내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청천벽력 같은 충격이었지만 전쟁터의 지휘관이었기에 마음 놓고 슬퍼할 수 없었다. 와중에 이순신은 발음도에 사는 강막지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난중일기>에는 강막지라는 인물이 4차례 등장한다. 강막지는 발음도 지역의 방위에 참여하는 토착민으로, 소도 많이 길렀다. 이순신이 그이 집에 열흘 정도 기거한 것으로 보아 강막지는 통제사 이순신이 참척의 슬픔을 이겨내는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듯하다.

그런데 발음도가 어느 섬인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장산도, 안창도(안좌도), 소안도라는 견해들이 있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최근에는 팔금도라는 견해가 유력하게 부각했다. <난중일기>의 내용과 지형상 가장 일치하고 실제 전투를 준비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곳이 팔금도라는 견해다.

한 발 더 나아가 강막지가 팔금도의 유력한 토착민 출신이라는 연구 결과(정현창·김병인, 〈발음도와 팔금도·장산도 그리고 강막지〉, 2018)도 나왔다. 연구자들은 발음도 후보로 거론되는 섬 지역에서 강씨의 입도(入島) 내력을 추적했다. 그 결과 정유재란 당시 강씨는 팔금도에서만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러한 연구 등에 힘입어 최근엔 '발음도=팔금도'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신안군 암태도와 팔금도를 잇는 중앙대교 남단(팔금도 북쪽)에는 철쭉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철쭉공원 북쪽의 해안에는 1597년 10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의 군영이 18일 동안 설치되어 있었다.
 신안군 암태도와 팔금도를 잇는 중앙대교 남단(팔금도 북쪽)에는 철쭉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철쭉공원 북쪽의 해안에는 1597년 10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의 군영이 18일 동안 설치되어 있었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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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2017년 팔금도 철쭉공원에 군영소 표석을 설치한 것이다. 팔금도의 주민들 사이에 전해오는 이야기와 여러 고증을 토대로 중앙대교 남단인 팔금도 북쪽 해안(철쭉공원)이 이순신 군영이 위치했던 곳으로 추정했다.

팔금도에 머물렀던 기간은 이순신의 생애에서 가장 슬프고 가장 힘겨운 시기였다. 그러나 비통함은 끝내 무서운 힘이 되어 노량해전의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다. 어쩌면 이순신의 생애와 임진왜란·정유재란의 흐름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김한민 감독의 영화 <노량>(2023년 개봉)에서 이순신이 막내아들 꿈을 꾸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비 이순신을 이해할 수 있는 곳

군영소 표석을 지나고 유채꽃 단지를 지나면 선학산 정상의 채일봉(159m)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채일봉은 팔금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주변 지형을 살피기 위해 이순신이 올랐던 바로 그곳이다.

채일봉 전망대에 오르면 주변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난중일기> 기록 그대로 동쪽은 섬들로 시야가 가리고 서쪽과 북쪽으로는 탁 트였다. 거기 많은 섬들이 어울리면서 멋진 다도해 풍광을 연출한다. 하지만 정유년 팔금도의 이순신을 생각하니 아름다운 섬들이 무겁게 다가온다.
 
팔금도에서 가장 높은 선학산 채일봉의 전망대.
 팔금도에서 가장 높은 선학산 채일봉의 전망대.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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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일봉에서 바라본 소마진도, 안좌도 방면의 남쪽 풍경. 1597년 10월 이순신은 채일봉에 올라 주변 지형을 살펴보면서 앞으로의 전략을 구상했다.
  채일봉에서 바라본 소마진도, 안좌도 방면의 남쪽 풍경. 1597년 10월 이순신은 채일봉에 올라 주변 지형을 살펴보면서 앞으로의 전략을 구상했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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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일봉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면 서근 등대 가는 길로 이어진다. 그 길은 고즈넉하다. 민가가 나오고 논밭이 나온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가면 해변 풍광이 펼쳐지고 철쭉이 핀 해변길을 따라가면 아담한 등대가 나온다.

1969년 세워진 자그마한 무인 등대다. 이곳은 암태도와 추포도 사이의 좁은 해협. 목포~흑산도를 오가는 선박들의 지름길이다. 그래서 더더욱 요긴한 등대라고 할 수 있다. 등대 바로 옆 가파른 해변의 검은 바위들도 매력적이다.
 
팔금도의 서근 등대.
 팔금도의 서근 등대.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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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군영에서 강막지의 집과 채일봉을 오갔다. 그리고 좀 더 들어가 서근 등대쪽 바닷가까지 둘러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군영소 표석~채일봉 전망대~서근 등대 구간은 이순신의 중요한 유적이 아닐 수 없다. '이순신의 길'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우리가 이순신을 기억하는데 승전의 현장도 중요하지만 통곡의 현장도 중요하다. 막내 아들의 비보를 접하고 하늘이 무너지듯 피를 토했던 곳. 어쩌면 인간 이순신, 전장에 나간 아비로서의 이순신을 이해하는 데 이보다 더 의미 있고 감동적인 곳은 없을 것이다.

최하림 시의 태생은 바다

채일봉 등산로 입구와 유채꽃 단지 사이의 원산리에 시인 최하림(1939~2010)의 생가가 있다.

최하림은 20세기 후반 순결하고 투명하게 자유와 정의를 노래한 시인이었다. 최하림은 7권의 시집을 냈지만 팔금도를 소재로 한 시를 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시 정신은 팔금도 원산리의 맑은 풍경과 바다의 원초적 생명력과 아버지의 죽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최하림이 열 살이던 1949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나이 불과 33세. 최하림은 특히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가족들과 함께 목포로 옮겼다.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작인 '빈약한 올페의 회상'의 한 대목을 보아도 최하림 시의 태생은 바다라고 할 수 있다. "아아 무슨 근거로 물결을 출렁이며 아주 끝나거나 싸늘한/바다로 나아가고자 했을까 나아가고자 했을까/기계가 의식의 잠 속을 우는 허다한 허다한 항구여/수없이 작별하고 수없이 만나는 선박들이여"
 
시인 최하림의 팔금도 원산리 생가.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고 수리가 이뤄져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다.
 시인 최하림의 팔금도 원산리 생가.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고 수리가 이뤄져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다.
ⓒ 이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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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이 세상을 떠나고 11년이 지난 2021년, 시인 황지우 박형준 등이 최하림을 기억하기 위해 모였다. 최하림 연구회를 발족하고 '최하림 다시 읽기'를 출간했다. 아울러 신안군과 함께 최하림 문학제를 개최했다.

그 무렵 신안군은 최하림 생가와 주변 공간(농협창고)을 활용해 최하림 시문학관을 조성하고 시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현재 생가 옆 농협창고는 신안군이 매입했지만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그 상태에 머물러 있다.

박상철(76) 원산마을 이장은 최하림 문학공간 조성 사업의 진척이 늦어져 답답하다. "유채꽃 축제가 열리면 최하림의 시를 행사장에 전시하는데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최하림 문학공간을 좀 더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최하림 생가는 원래 모습이 아니다. 최하림 가족이 목포로 떠나고 난 뒤 주인이 바뀌면서 여러 차례 대대적인 수리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팔금 읍리 3층석탑(고려 초).
 고즈넉한 분위기의 팔금 읍리 3층석탑(고려 초).
ⓒ 이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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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금도에서 읍리 3층석탑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고려 초의 석탑으로 원래는 5층이었는데 현재는 3층만 남아 있다. 단정하고 소박한 모습이지만 거기 1000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그 담백함이 팔금도와 잘 어울린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문홍일, 《팔금도 제염문화 100년》, 남흥제염문화연구원, 2019
안영배,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이순신의 고단한 뱃길〉, 《동아일보》 2017년 11월 4일자
정현창·김병인, 〈발음도와 팔금도·장산도 그리고 강막지〉, 《지방사와 지방문화》 21권 2호, 역사문화학회, 2018
최하림연구회 엮음, 《최하림 다시 읽기》, 문학과지성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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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팔금도, #이순신, #강막지, #군영소, #채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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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에서 문화부 기자, 정책사회부장, 오피니언팀장, 논설위원 등으로 일했고 현재 서원대학교 휴머니티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중들이 문화유산과 예술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하고 향유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탐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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