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스탕스(La Résistance)는 프랑스어로 '저항'이라는 뜻이다. 본래 모든 독재와 억압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행위를 일컫는 표현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독일에 항전한 프랑스 시민들의 저항운동 및 해당 단체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유명해졌다. 위기의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레지스탕스의 활약은 나치의 압제로부터 프랑스를 해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이후로도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 된 오늘날의 프랑스를 건설하는 밑거름이 됐다.
 
3월 26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44회에서는 '히틀러로부터 프랑스를 구한 레지스탕스' 편을 통하여 2차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의 활약상을 조명했다.
 
1939년 9월 1일,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것을 시작으로 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오른다. 독일은 파죽지세로 덴마크-노르웨이를 병합하고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하며 유럽을 뒤흔들었다.
 
히틀러의 다음 목표는 프랑스였다. 당시 프랑스는 유럽 최강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던 데다가 독일의 침공을 예상하고 마지노선(Ligne Maginot, Maginot Line)이라는 난공불락의 요새까지 건설할 만큼 만반의 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 여기에 프랑스에는 또다른 강대국인 영국이라는 든든한 아군까지 있어서 전력상 독일보다 우위였다.
 
하지만 독일은 육군 참모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설계한 프랑스 침공계획인 '낫질작전(Sichelschnitt)'으로 연합군의 허를 찔렀다. 1940년 5월, 독일은 주력부대가 벨기에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연합군을 유인했다. 그 사이에 하인츠 구데리안이 이끄는 대규모 기갑부대가 험준한 산악지형이라 침공이 불가능하리라 예상했던 아르덴 지역을 돌파하여 배후에서 연합군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완벽하게 허를 찔린 연합군은 심리적으로 혼란상태에 빠졌다. 독일군은 연합군을 프랑스 북쪽 끝인 됭케르크까지 몰아붙여서 포위망을 완성했다. 이에 영국은 됭케르크 해상 철수작전(Dunkirk evacuation)을 실시하여 약 33만에 이르는 연합군을 무사히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때 보존된 병력들은 훗날 나치 독일을 향한 연합군의 대반격에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프랑스의 패망은 피할 수 없었다. 됭케르크 철수작전에도 불구하고 4만 명이 이르는 프랑스군이 포로로 사로잡혔고, 됭케르크에 남기고 간 연합군의 무기와 물자들은 모두 독일의 전리품이 됐다. 독일은 무주공산이 된 프랑스의 주요도시를 하나하나 점령해나갔다.
 
독일에 맞서 싸울 능력을 상실한 프랑스 정부는 1940년 6월 17일 파리를 무방비도시로 선언하고 사실상의 항복선언이나 다름없는 휴전협정을 제안한다. 독일군은 별다른 피해없이 파리에 입성한다. 독일이 침공을 시작한 지 불과 6주 만에 유럽 최고의 강국으로 꼽히던 프랑스가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이다.
 
당시 프랑스의 항복을 주도한 인물은 총리였던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 1856-1951)이었다. 그는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며 독일에 항복을 선택했다. 페탱은 1차대전 당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 출신이었음에도 항전에 소극적이었고, 당시 국민적인 존경을 받던 페탱이 앞장서서 휴전을 주장한 것은 프랑스 국민들의 항전의지가 흔들리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는 휴전협정 조인식에서 과거 독일이 1차대전 당시 연합국이던 프랑스에 패망하고 맺었던 휴전협정을 역으로 재현하는 퍼포먼스를 통하여 22년 전의 굴욕을 그대로 되갚아줬다. 또한 파리를 방문한 히틀러는 두 시간 동안 시내를 둘러보고 프랑스의 상징인 에펠탑이 보이는 위치에서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양국의 불평등한 휴전협정에 따라 독일은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영토의 60%에 이르는 지역과 물자를 차지하고 점령국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점령군에 드는 유지 비용은 모두 프랑스에 지불해야 했다.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4년간의 점령비용만 1조 1000억 프랑(한화 약 243조 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규모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러한 굴욕적인 조건을 모두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독일은 점령지를 제외한 남프랑스 일대에 비시 프랑스(Régime de Vichy, 1940년 4월-1944년 8월)라는 괴뢰국을 수립했다. 형식적으로는 이전과 같은 국호를 쓰는 프랑스의 정부이자 자유지역을 표방했지만 사실상 독일의 속국이었다.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는 독일과의 휴전협정을 주도했던 페텡이 올랐다.
 
히틀러의 뒤끝있는 복수는 프랑스를 정복한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독일군은 프랑스의 상징인 에펠탑을 폭파하는 것도 고려했으나 히틀러는 오히려 에펠탑이 나치의 선전도구로 유용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프랑스인들은 에펠탑이 독일군에게 유린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승강기 케이블을 자르고 스위치까지 파괴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무려 1500개에 이르는 계단을 직접 걸어올라가 기어코 나치의 깃발을 게양했다. 히틀러는 에펠탑 외에도 베르사유 궁전과 1차대전 승전기념비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곳곳을 나치의 상징으로 도배하며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에 또 한번 깊은 상처를 줬다.
 
또한 히틀러는 '예술품 수집 특수부대'를 조직하여 프랑스의 유명 문화재 수집과 약탈을 일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은 상류층 귀족이나 개인 가정에서 보유하고 있는 미술품까지 찾아내 약탈했다. 미대 지망생 출신이었던 히틀러는 예술품에 대한 욕심이 많았고, 문화예술의 나라였던 프랑스는 히틀러에게 더할 나위 없는 먹잇감이었다. 이 당시 히틀러와 나치 독일이 훔쳐간 예술품만 무려 2만 2000여 점에 달한다.
 
히틀러의 약탈 취향에는 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와인 애호가이기도 했던 히틀러는 세계 최고의 와인 제조국이었던 프랑스부터 약 50만 병에 이르는 와인을 약탈하여 자신의 별장에 저장했다. 이렇게 가져간 와인은 히틀러의 외교행사나 파티 등에 종종 이용되었으며, 전시에는 독일군 장병들에게 지급되어 물과 약을 대체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편으로 여기에는 프랑스의 주요 산업기반 중 하나였던 와인산업을 손에 넣어 프랑스 경제를 장악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독일은 점령지역의 프랑스인을 나이와 직업 등에 따라 8개 등급으로 나누고 식사배급량을 철저히 통제했다. 프랑스의 발전소들은 독일의 점령 이후 가동률이 4분의 1로 급감했다. 추운 겨울에 프랑스인들은 난방을 할 석탄이 부족하여 고통을 받아야 했고 자동차를 운행할 기름도 없어도 인력거와 자전거로 대체해야 했다. 독일군인과 시비가 붙은 자크 봉세르장이라는 엔지니어는 사소한 이유로 총살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이처럼 나치 독일의 노골적인 탄압에 프랑스인들의 불만과 저항의식은 점점 높아졌다.
 
페탱의 비시 프랑스는 이러한 나치 독일의 만행에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나치 독일과 손을 잡은 프랑스측 인사는 페탱만이 아니었다. 오늘날 명품 브랜드의 대명사로 유명한 루이비통이나 크리스챤 디올, 르노 등은 독일과 협력하여 의류-공예-군수사업 등에 참여하며 막대한 이익을 올렸으며, 일부 유명인사들은 나치의 협력자이거나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오늘날 합작이나 협업을 주로 의미하는 '콜라보(영어 Collaboration)'의 어원은, 알고보면 나치 독일에 협력한 매국노를 뜻하는 프랑스어 '콜라보하또르(Collaborateur)'에서 유래했다.
 
이에 자유를 되찾고 나치 독일과 그 부역자들에게 맞서기 위한 저항세력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바로 레지스탕스의 등장이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레지스탕스는 이후 나치 독일이 점령한 모든 나라에도 확산되며 독일에 저항하는 세력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에 이른다.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거장 알베르 카뮈, <어린왕자>를 집필한 생텍쥐베리 등의 유명인들도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활약했던 인물들이었다. <로마의 휴일> <티파니에서 아침을>로 유명한 세기의 미녀배우 오드리 헵번도 데뷔 전인 10대 소녀 시절, 나치 독일이 점령했던 네덜란드에서 레지스탕스 회보를 배포하거나 연합군 인사들을 집에 숨겨주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레지스탕스를 대표하는 상징은 'V(브이)'자 표식이었다. 이는 승리를 의미한 빅토리(Victory)의 약자이자 레지스탕스 조직인 자유 프랑스의 심볼인 '로렌의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치 독일에 맞서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레지스탕스의 의지와 염원을 상징한다. 영국 수상인 윈스턴 처칠도 이러한 V자 사인을 즐겨한 것으로 유명하다.
 
페탱처럼 독일에 협력한 인물이나 회사의 포스터에 V자를 새겨놓고 낙서를 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프랑스를 비롯한 점령국 국민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저항정신에 대한 동질감과 연대의식을 공유했다. 얼핏 사소하고 유치해보이는 작은 저항 하나가 큰 변화의 물결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히틀러는 레지스탕스의 거센 저항을 탄압하기 위하여 독일군 한 명이 피살되면 그 보복으로 레지스탕스 혐의로 붙잡힌 프랑스인 수십명을 처형하겠다는 극단적인 지시를 내렸다.

실제로 독일군 중령 한 명이 레지스탕스에 피살되자 히틀러는 3일 사이에 약 100명 가까운 프랑스인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영화관 테러로 독일군 간부급 58명이 사망하자, 정확히 그 두 배인 116명을 한꺼번에 처형하기도 했다. 이처럼 독일군의 복수로 사망한 프랑스인만 약 860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프랑스인들의 분노와 저항정신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졌다.
 
페탱의 뒤를 이어 비시 프랑스의 수반에 오른 피에르 라발은 적극적인 나치 협력 정책을 오히려 더욱 강화했다. 라발은 거듭된 전쟁으로 인력이 부족해지자 '의무노동제'를 실시하여 수많은 프랑스의 남녀 청년들을 독일의 군수공장에 징집시켰고 이를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징역형을 내렸다. 라발의 만행으로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약 65만 명에 이르는 프랑스인들이 독일로 끌려가야만 했다. 독일은 여기에서 그치지않고 전황이 불리해자자 아예 비시 프랑스마저 무력 점령하기에 이른다.
 
나치와 비시 프랑스의 만행에 분노한 프랑스인들은 이제 소극적인 저항을 넘어 점차 강력한 무장투쟁으로 선회하기에 이른다. 실제 무장활동에는 가담하지 않은 프랑스인들도 레지스탕스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여성들은 유모차에 통신문, 무기, 식량 등을 숨겨 조달하면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레지스탕스를 돕기도 했다. 1943년에서 1944년 사이에서 무장한 레지스탕스 세력은 2만 5000명에서 최대 10만 명에 이르는 규모로 크게 확대된다.
 
해외 레지스탕스 조직을 이끌며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바로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이다. 프랑스의 준장이자 기갑사단 지휘관이던 드골은 페탱의 휴전협정 결정에 강력히 반발하여 영국에서 BBC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프랑스인들의 항전을 촉구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이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아 프랑스로 돌아올 수 없었던 드골은 해외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프랑스군과 민간인들을 모아 '자유 프랑스'라는 레지스탕스 조직을 결성하고 지도자에 취임했다.
 
드골은 1941년 군사학교를 창설하고 레지스탕스를 체계적인 전투가 가능한 정규군에 가까운 정예전력으로 육성했다. 드골이 양성한 장교들은 이후 세계 각지의 전장으로 파견되어 자유 프랑스군을 이끌고 나치 독일과 맞서 싸우는 주축으로 성장했다. 또한 드골은 영국-미국의 첩보기관들과도 공조하여 자국 내 레지스탕스 조직에게 무기와 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드골이 각별히 신임한 장 물랭은 프랑스 국내 레지스탕스를 맡아 '레지스탕스 전국회의'를 창설하며 당시 내부적으로 좌우파 이념으로 분열되어 있던 조직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로써 레지스탕스는 더 체계적인 조직적인 무장활동을 전개하며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나치 독일은 당연히 레지스탕스의 중심인 드골을 눈엣가시로 여겨 여러 차례 암살을 시도했지만, 그럼에도 드골은 저항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활약상을 바탕으로 드골은 프랑스의 대표 자격을 얻어 루스벨르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총리 등과 함께 카사블랑카 회담(1943년 1월)에 참석하며 당당히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독일은 레지스탕스에 대처하기 위하여 프랑스인들로 구성된 '밀리스'라는 민병대를 조직했다. 현지 사정을 가장 잘 아는 프랑스인들로 레지스탕스를 잡는 악질적인 수법이었다. 밀리스는 레지스탕스 즉결처형 및 암살, 잔혹한 수법으로 악명이 높았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나치보다도 오히려 밀리스를 더 두려워 했다고 할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사망한 프랑스인의 숫자는 약 3만 5000여 명으로 추정되며 이 중 나치에 붙잡혀 총살 당한 이들만 4000여 명이었다.
 
1944년 6월,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Invasion of Normandy)' 성공은 프랑스 해방의 신호탄이 됐다. 여기서 레지스탕스는 연합군의 요청을 받아 철로를 폭발시키고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며 상륙작전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파리에서는 레지스탕스와 시민들이 합심하여 독일군에 저항했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파리 해방을 위하여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진지를 구축하는 것을 도우며 결사항전을 펼쳤다.
 
궁지에 몰린 히틀러는 "파리를 연합군에 넘길 바에는 차라리 폐허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파리 주둔 독일군 사령관이었던 디트리히 폰 콜티츠는 고심 끝에 "후세에 파리를 파괴한 인물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며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한 덕분에 최악의 참화는 피했다.
 
이후 연합군의 거침없는 공세와 레지스탕스의 호응 속에 1994년 8월 25일, 프랑스인들이 꿈에 그리던 '파리 해방의 날'이 찾아왔다.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수반에 취임한 드골은 공식회견을 통하여 최초로 파리 해방을 선언했다. 레지스탕스의 활약을 인정받아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점령 당했던 아픔을 극복하고 당당히 '승전국'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나라는 되찾았지만 프랑스에는 아직 '과거청산'이라는 과제가 남아있었다. 드골은 히틀러의 흔적들을 모두 지우고, 나치에 협력했던 프랑스 부역자들에 대한 대독협력자 처벌법을 제정했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거리로 붙잡혀나온 대독협력자들에게 침을 뱉고 구타하며 야유를 퍼부었다. 독일인이랑 사귀었거나 나치에 협력했다는 의심을 받는 여성들은 강제로 삭발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정식재판을 통하여 처벌받은 나치 부역자만 9만 8000여 명에 이르렀다.
 
대독협력에 앞장선 주요 프랑스 정치인 중 페탱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당시 90세의 고령임을 감안하여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결국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가장 악질적이었던 라발은 음독자살을 시도했으나, 프랑스 정부는 정당한 처벌을 받게 하기 위하기 위하여 위세척까지 해서 그를 살려낸 뒤 결국 총살형을 집행했다.  프랑스인들은 아직도 2차대전 당시의 처절했던 아픔과 교훈을 잊지 않고 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프랑스 저항의 불꽃은 꺼져서는 안 되며 꺼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샤를 드골이 남긴 격언이다. 프랑스는 국가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이겨내고 2차대전의 당당한 승전국이자 오늘날의 선진국으로 부흥을 이뤄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레지스탕스들의 투쟁, 그리고 그들에 협력한 수많은 프랑스인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이 있었다. 자유와 평화에는 그에 걸맞는 책임과 헌신이 따른다는 것은 레지스탕스의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도 전하는 값진 교훈이다.
벌거벗은세계사 레지스탕스 샤를드골 히틀러 콜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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