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 혹은 절망은 불과 100여 년 남짓에 불과한 짧은 시간 동안 수차례 반복되어온 주제다. 맨 처음은 텔레비전의 대중적 보급과 함께 시작되었다.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면 되는데 굳이 극장 나들이를 해서 영화를 보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다음은 홈비디오 플레이어 보급과 함께 역시 유사한 논리로 주장되었다. 그리고 20세기 말, 국내에선 피부로 체감도가 덜한 편이었지만 북미에선 케이블 텔레비전 채널의 전면화와 함께 '미드(미국드라마)'라 불리는 장대한 규모의 텔레비전 시리즈가 등장하면서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영화'와 '방송 드라마'를 구분하던 기준을 모호하게 만든 '미드' 전성시대는 자연스럽게 OTT 서비스의 마음 먹고 투자한 콘텐츠로 계승되었다.
 
그렇게 물밑에서 성장하던 OTT 콘텐츠는 전 세계를 방구석에 꽁꽁 숨어 있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제한 코로나19 치하 몇 년 동안 그 위력을 떨쳤다. 극장이 얼어붙고 거대한 규모의 자원을 투입해 대박을 노리던 영화 흥행공식은 식어버렸다. 함께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불편 대신 자유롭게 안방에서 끊고 돌리고 선택권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법을 알자 '관객'은 개별화되어갔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늘어만 갔다. 숱한 디지털 크리에이터들이 열과 성을 다해 솜씨를 뽐내며 엄청난 압축률로 영화 1편을 1/10 시간 내로 요약해 제공하는 시간이 도래했다.
 
그런 속도와 요약 중독은 그저 유튜브 숏-무비 열풍으로 끝나지 않았다. 성질 급한 이들은 예전처럼 드라마가 매주 고작 한두 번 방영되는 감질맛을 참고 기다릴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에 발맞춰 OTT 서비스는 전편을 동시에, 혹은 최소한 2회 이상 묶어서 동시 공개하는 강수를 둔다. 

하지만 그런 '대세' 속에서도 여전히 '영화'라는 신생 매체는 고정되지 않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21세기에 걸맞은 변화를 이어가는 중이다.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할 때에만 누릴 수 있는 강점은 분명 존재한다. 다양한 표현과 용어로 이를 규정하려 하지만, 굳이 특정 개념으로 고정하지 않더라도 분명 '영화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것은 특수효과를 떡칠해서도, 스타들을 총출동시켜서도 아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에서만 체험 가능한 어떤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런 21세기 영화문법의 극단에 자신의 자리를 설정하려는 작업이다.
 
평화로운 산간마을에 보조금을 노린 글램핑장 공사 시도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간지대, 한 중년 남자가 익숙한 솜씨로 전기톱과 도끼를 사용해 장작을 팬다. 이윽고 동료와 함께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개울가에서 들통에 물을 길어 올린다. 한참 일하던 중 남자는 어린 딸을 하교시켜야 한다며 양해를 구하고 급하게 차를 몰아 학교로 향한다. 하지만 이미 딸은 기다리다 혼자 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부랴부랴 차를 몰아 딸의 경로를 추적한 남자는 숲속에서 딸과 재회한 다음 함께 숲속을 거닐며 산책한다. '자연인'의 덕목처럼 8살 여자아이는 숲의 식생에 대해 제법 훤하게 꿰뚫고 있지만, 그래도 아빠가 한 수 위다. 체험학습처럼 이것저것 숲의 지식을 전수하던 남자와 딸은 자연의 선물을 챙겨 집으로 향한다.
 
저녁에 마을 주민들의 조촐한 회합이 열린다. 동네 토지를 매입한 대도시의 회사가 글램핑장 공사를 앞두고 주민 간담회를 고작 이틀 후에 열 예정이라는 통보를 받은 참이다. 주민들 대부분은 공사에 부정적인 기색이다. 이들은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대응방안을 논의한다. 하지만 젊은 혈기에 불탄 청년 정도를 제외하면 우리가 종종 미디어에서 접하게 되는, 강제개발에 항거하며 투쟁하는 지역주민들에 비해 훨씬 온건해 보인다. 이들은 어찌 되었건 이야기를 들어보긴 들어보자며 이틀 후를 기약한다.
 
간담회가 열린다. 대도시 회사에선 두 명의 관계자가 간담회 실무를 진행한다. 주민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연예기획사에서 사업 확장 겸 코로나19로 인한 기업 보조금 지급을 노리고 기획한 글램핑장 사업에 썩 신용이 갈 리가 없다. 반대파 주민들은 각자의 지식과 논리로 애꿎은 업체 관계자를 몰아세운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동네 실정에 깊이 뿌리를 내린 데다가 워낙 업체의 계획이 현실과 유리된 지라 자연스럽게 설득력을 얻는다. 정화조의 제한된 용량으로 인한 수질오염 걱정이나 야간 관리자 부재로 인한 산불 우려 등 쟁점이 속출한다. 주민들은 새로 간담회를 준비하라고 권고한다.
 
실정을 파악한 회사 관계자 둘은 도쿄로 돌아가 프로젝트를 연기하고 주민들과 소통해 재정비할 것을 권유하지만, 컨설팅 지문업체와 회사 대표는 요지부동이다. 이들은 마을 주민들의 신망을 얻고 있고 지역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영화 시작과 함께 등장했던 바로 그 중년 남자인) '타쿠미'에게 관리인 자리를 맡겨서 회유 겸 도움을 얻어 계획을 실행시키라고 담당자인 둘을 들볶아댄다. 마을 주민들의 합리적 의견에 일리가 있음을 공유하던 둘은 곤란한 입장에 빠지고 만다. 어쨌건 지시대로 다시 마을로 향해 '타쿠미'와 미팅을 가지고자 한다.
 
일본 근현대사와 피압박 민중에 대한 성찰을 가미하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기본적인 줄거리만 본다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도시 기업의 강제개발에 맞선 지역주민과 자연의 대립과 투쟁으로 이어지는 그리 생소하지 않은 이야기로 읽힐 법하다. 하지만 그런 지레짐작으로 단선적으로 독해할 수 없다는 점이 본 작품의 최대의 매력이자 마법 같은 특징이 될 테다.
 
주민 간담회 자리에서 '타쿠미'의 발언에 담긴 내용처럼 이 동네 주민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이들은 3대 전에 개척 농민으로 이주한 이들의 후예가 대부분이다. 2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동아시아 각지에 나가 있던 수많은 이들이 간신히 목숨만 건져 본토로 귀국했고, 달리 갈 곳 없던 이 난민들이 토지개혁에 따라 산간벽지로 유입되어 땅을 개간해 새롭게 출발한 게 이 동네의 기원인 셈이다. 일본 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나리타 공항 반대 투쟁의 핵심에 있던 산리츠카 일대 농민들과 같은 유래를 지닌 이들인 것이다. 바로 '히키아게샤'라는 존재들이다. 가난한 이들이 제국주의 일본의 첨병으로 활용될 겸 생존을 위해 세계 각지로 이주했다가 재산을 몽땅 잃고 가족과 생이별해가며 겨우 돌아온 귀환자의 후손들은 늘 기득권 체제와 국가권력에 반항적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자연을 일정부분 파괴하고 자원을 이용하며 생활을 영위하지만 '선'과 '균형'을 지켜야 한다는 경험적인 철학을 공유한다. 마을 대표인 '스루가' 노인이 회사 관계자들에게 묵직하게 전달하는 것처럼,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마련'인 것이다. 적당한 사탕발림으로 시골 주민이라 무시하면서 대충 요식행위로 간담회 실적을 쌓으려는 기업에 대한 일갈인 동시에, 주민들이 체득한 자연과의 순리적 공존의 이치로서도 기능한다. 게다가 대도시에서의 삶에 지쳤거나 의문을 품고 방황하다 흘러 흘러 유입된 이들도 적지 않다. 도시에서 몇 해 전 이주해 우동 가게를 연 부부는 이곳의 물맛이 얼마나 특별한지 아느냐며 회사에서 반복해 강조하는 소비 확대를 통한 지역 활성화 논리를 순식간에 논파해버린다.
 
대개 이런 상황이라면 도식적인 분쟁과 비극으로 치달으며 낙관적인 승리나 현실의 벽에 부딪힌 주민들의 무력한 패배 둘 중 하나를 택하는 편리한 선택으로 기울기 딱 좋다. 하지만 동네 실정에 대해선 도외시한 채 오직 비용과 이익에만 골몰한 회사 수뇌부와 달리 이곳의 자연환경과 사람들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된 관계자 둘은 어떻게든 소통하며 현황 파악에 애를 쓴다. 단순한 선악의 대비로 몰아붙이지 않으면서 보다 거시적인 구도를 선보이려는 제작진의 의지가 확고해 보인다.
 
그들, 연예인 매니저를 하다 연예기획사에 눌러앉은 고참 '타카하시'와 요양보호사로 일하다 연예계로 이직한 '마유즈미'는 선악 구도로 단정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마유즈미는 주민들의 힐난과 질책에도 늘 경청하는 자세와 정중한 태도로 의견을 수렴하고자 일개 직원의 복지부동을 뛰어넘고자 노력하는 인물이다. 타카하시는 오랜 연예 매니지먼트 생활에 지쳐 있던 참이라 아예 본인이 글램핑장 관리인으로 전직해 버릴까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태도를 보고 있자면, 어쩌면 일정한 파괴와 후퇴는 피할 수 없더라도 최소한의 균형을 맞출 수 있지 않을까 낙관적으로 상황을 보고 싶어질 정도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단선적인 구도로 흘러갈 생각이 추호도 없다.
 
인간과 자연의 대비를 넘어 때로는 융합으로, 때로는 숙명적 대결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타쿠미'는 절친한 마을 사람들도 괴짜라고 부르기에 주저함이 없는 존재다. 그는 특별한 직업이 있는 것 같진 않지만, 마을의 대소사에 골고루 참여하며 일을 돕는 존재다. 자신의 입으로 '심부름센터' 같은 존재라고 일컬을 정도다. 마치 고(故) 김주혁 배우가 열연했던 한국영화 <홍반장>의 '홍반장' 캐릭터 같은 역할이라면 이해가 빠를 테다. 그는 이 동네와 자연에 대해선 뭐든 알고 있지만, 종종 건망증에 빠지곤 한다. 딸 '하나'의 통학을 챙기는 임무를 그는 늘 까먹곤 한다. 8살 딸은 그때마다 아빠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 거친 숲과 호수를 통과해 집으로 향한다. 인적 드문 동네에서 꽤 위험한 일이다. 딸을 소중히 여기지만 아내-엄마의 부재 속에 그의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들어 있을까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타쿠미'는 자연 친화적인 마을 이웃들 중에도 유독 돌출된 존재다. 그는 누가 봐도 별난 사람이지만 때로 그의 언행은 평범한 인간의 차원을 훌쩍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 괜히 그의 정체가 무엇인가 상상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그는 이 지역의 자연에 대해서라면 뭐든 다 알지만, 종종 알다가도 모르게 숙명론적인 초연함을 드러내곤 한다. 누구도 그가 지금 어디를 보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딸 '하나'가 8살에 딱 어울리게 칭얼대도 그는 무뚝뚝하게 반응하며 자기의 일을 우선한다. 과거에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이 동네까지 흘러들어왔는지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다.
 
'하나'는 '타쿠미'에게서 대자연의 지식과 섭리에 대해 전수를 받는다. 부녀 관계이지만 스승과 제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빠가 딸에게 알려주는 정보와 지혜는 도시에서 자상한 부녀관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대자연 속 위험과 죽음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그의 입을 빌어 설명되는 자연은 인간이 온전히 제어하거나 파악할 수 없는 고대의 존재처럼 들려온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부드러운 섭리는 조금만 냉혹해지면 홍수나 산사태 같은 자연재해를 연상케 만든다. 과연 '타쿠미'는 무엇을 겪어왔고 어떤 존재인 걸까?
 
그런 기묘한 상상과 함께 평범한 산책로처럼 보이던 도로 연변 좌우로 깊숙하게 조성된 숲 지대는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이 여전히 가득한 미지의 낯선 세계로 변환되기 시작한다. 멀리서는 인간의 사냥이 이뤄지는 중이다. 총소리가 잊을만하면 들린다. 빗맞은 사슴은 끝내 숲 구석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그 유해는 오래도록 방치되게 마련이다. 얼음이 낀 호수는 안일하게 접근하는 자에게 죽음의 키스를 건넨다. 독이나 가시를 가진 식물은 스스로를 보호하며 섣부른 침입자에게 응징을 가한다. 그런 위태로운 자연의 권능과 '타쿠미' 일가의 이미지는 퍽 닮은꼴이다.
 
자연보호와 환경보전에 대한 계몽적 도식화를 넘어 도달한 자리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독립된 1편의 장편 극영화인 동시에 동일한 영상 이미지를 공유하되 상이한 방식으로 소개되는 또 다른 장편영화와 대칭을 이룬다. 이는 본 작품의 출발점과 제작과정을 통해 확인된다.

감독의 전작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너무나 인상적인 음악 활용을 선보였던 음악감독 이시바시 에이코가 일종의 뮤직비디오로 활용될 영상 제작을 의뢰했고, 그의 고향인 나가노현 후지미마치 정에서 촬영을 진행하던 중, 프로젝트가 확장되면서 2편의 거울 쌍이 탄생한 셈이다. 상당 부분 영상 소스를 공유하지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개발에 맞선 주민과 자연의 대립 구도라는 서사를 강조하는 극영화로서, 또 다른 작업인 < Gift >는 73분 분량의 무성영화 형태로 완성되었다. 이 버전은 기본적으로 이시바시 에이코 음악감독에 의해 실제 라이브 연주로 사운드를 대신하는 방식으로 공개되는 중이다. 전통적 방식의 극영화 작업과는 차별화된 실험적 문법의 결실인 셈이다.
 
일본 내에서도 산과 계곡이 울창하게 자연을 보전한 지역인 나가노 현 스와호 주변의 풍광은 영화의 주제의식 중 뼈대라 할 자연의 힘과 조화를 이상적으로 구현한다. 오래 손발을 맞춘 제작진은 다양한 시청각적 실험을 병행한바, 전통적인 대사와 인물 구도의 장면 일부(주민간담회가 대표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서사 대신에 이미지 자체가 상징화되는 추상적인 전개를 취한다. 의도적으로 과잉된 '트래킹 숏'은 카메라가 마치 인물이 이동하듯 움직이며 동일한 화면에 색다른 의미를 덧붙인다. 반면에 고정된 채 화면을 빤히 응시하는 극도의 '픽스 숏'이 등장할 때는 저 시선의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혹시 화면 밖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지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사운드는 극도로 구분되는 활용법을 구사한다. 최소한의 서사 전개를 위해 인물과 대사 위주의 부분을 최소화한 자리에는 대사 대신에 확장된 뮤직비디오 마냥 이시바시 에이코의 창의적 실험과 도전의 결과물일 현대적인 불협화음과 긴장을 고조시키는 ost가 자유자재로 음성언어를 대체한다. 유려한 촬영을 통해 상징화된 대자연과 그 속에 개미처럼 붙어 있는 인간들의 이미지가 사운드트랙이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따라 천양지차의 기운으로 순식간에 바뀐다. 그저 형식 실험이라면 과잉이라 푸념해볼 만도 한데, 하나하나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광의의 주제와 연동된다. 이 정도면 논문용 작업에 가깝다.
 
여러 인터뷰에서 소개된 바대로 '타쿠미' 역의 오미카 히토시는 전문배우가 아니라 제작진 스태프의 일원으로 장소 헌팅 과정에서 그의 선 굵고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포착한 감독에 의해 선택된 존재다. 감독의 영화에서 드물게 등장한 청소년 배역인 '하나' 역 니시카와 료는 아역이라는 상투적 표현 대신 신비감과 함께 당당한 주역으로 제 자리를 확고히 한다. 또한 기업 '플레이모드'에서 난제를 떠맡은 두 관계자 역할의 배우들은 이미 감독의 전작 <해피 아워> 등에서 얼굴을 드러낸 바 있어 호흡이 척척 맞아떨어지며 기능적 캐릭터의 한계를 초월한다.
 
물론 이 영화가 정교하고 파격적인 면모를 겸비한 수작이란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저 신작에 대한 상찬으로 끝날 테지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일본의 거장들이 견지해온 단순한 도식화와 선악 대비 구도를 초과하는 성찰과 섭리를 계승한다.

거기에 '영상예술'만이 시도하고 도달 가능한 영역을 끊임없이 접목하는 가볍지 않은 도전의 최전선에 서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초기 작업부터 영화 속 인물과 배경을 통해 동시대 사회문제는 물로 역사적 배경과 상징에 대한 풍부한 인문학적 통찰을 선보인 바 있고, 즉흥적으로 출발한 본 작업에서도 그런 장기를 놓치기는커녕, 보다 거대한 소우주로 확장해낸다. 놀라운 세계관의 규모다. OTT 몰아보기로는 불가능한, 마치 과거 거장들의 시간 순서에 따른 진화를 목격하는 체험을 동시대에 겪는 기분이다. 마땅히 관객은 흥분하고 동료 창작자들은 자극받지 않을 수 없을 테다. 그리고 모두가 그의 차기작을 또다시 기다리게 될 테다.
 
<작품정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Evil Does Not Exist
2024│일본│드라마
2024.03.27. 개봉│106분│12세 관람가
연출&각본 하마구치 류스케
출연 오미카 히토시(타쿠미 역), 니시카와 료(하나 역),
코사카 류지(타카하시 역), 시부타니 아야카(마유즈미 역)
음악 이시바시 에이코 <드라이브 마이 카>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공/공동배급 (주)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공동제공 ㈜키노라이츠
 
2023 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
              국제비평가협회(FIPRESCI)상
2023 67회 BFI런던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악은존재하지않는다 하마구치류스케 이시바시에이코 오미카히토시 니시카와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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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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