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자주 영광스러운 순간에 대해 기록하고 기념했던 것 같다. 운동의 역사도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내가 살아오는 동안, 자주 기억에 남는 것은 오히려 실패와 고난의 시간, 외롭고 고독했던 시간이었다. 한때 나는 부끄러운 상황을 재빨리 지워버리고 기억에서 밀어내려고 애를 썼지만, 이제는 그 부끄러움이 나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그 흔적을 오래 들여다보려는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불화하고 관계를 단절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물론 여전히 잘 싸우지도 못하지만) 기꺼이 흉터로 남는 존재가 되겠다고 외치기도 한다. 모두와 아름답고 화목한 관계를 맺는 것도,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도 어차피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영웅적인 승리담이나 무용담이 넘치는 오래전 운동에 관한 이야기 속에는 갈등하고 고민하던 사람들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자주 지루했다. 내가 참여했기에 기억할 수밖에 없는 어떤 운동의 시간이 가끔 내게는 상처이기도 하고 실패이기도 한데, 왜 우리는 실패기를 궁금해하지 않는지 늘 의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영화 <미싱 타는 여자들>을 보고 나서도, 아프고 힘들고 한편 힘이 나고 뿌듯했을, 어린 당신들의 사진을 다시 만나는 장면 속 표정이 인상에 남았던 것 같다. 성취와 자랑스러움만큼이나 두려움과 혼란스러움까지도 말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실패해서 아팠던 기억과 감정을 나누는 일이 쉽지 않음을 잘 알기에, 그런 말을 용기 내 꺼내주는 이들이, 그리고 그런 얘기를 들어주고 전해주는 이들이 새삼 고맙다.
 
'안순애'를 매개로 돌아보는 경험
 
 <열 개의 우물> 주인공 중 한 명, 안순애 님.

<열 개의 우물> 주인공 중 한 명, 안순애 님. ⓒ 다큐멘터리 영화 <열 개의 우물>

 
그렇게, 운동을 하면서 갈등하고 고민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를 보았다. 바로 다큐멘터리 영화 <열 개의 우물>이다. <열 개의 우물>에 등장하는 이들 중에서 내 마음을 빼앗은 주인공은 '안순애'다. 영화 속에서 그는 사람이 지긋지긋했다고도 했고, 무서웠다고도 했다. 또 상처받아 재처럼 바스러지고 소진되었던, 옛날의 어린 안순애를 안쓰러워했다.

안순애의 이런 표현 덕분에, 나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활동의 와중에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숨어들었던 시간을 떠올리고,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애썼던 순간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열 개의 우물>은 도시 빈민들의 삶, 공부방, 탁아운동 등 돌봄이나 육아라는 이슈, 여성 노동운동의 역사 등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더라도 누구나 자기의 경험과 공명하면서 감상할 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자기들이 지나쳐 온 운동의 경로를 되돌아보았다고도 했고, 공허하게 빡센 운동이 아니라 치열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이 영화를 세 번 보았다. 첫 번째는 음악이 없는 편집 중인 판본으로 보았는데 잘 집중하면서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오래전 노동운동의 주역을 다룬 영화라는 사전정보 때문이지 않았을까. 두 번째 기회는 DMZ 영화제였다. 영화가 아주 다른 느낌으로 바뀌어 있었다. 특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단편선의 노래가 너무 좋았다. 영화제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에 초대된 안순애는 "나는 투사가 아니다, 지금은 농사꾼이다"라고 잘라 말하면서, 노동운동의 역사적인 순간에 있던 존재로 바라보는 관객들의 뜨거운 시선을 거절하는 듯했다. 그러면서 사상이 투철해서 노동운동을 한 게 아니라고 했다. 잘 모르지만, 살기 위해 노동조합을 했고, 살기 위해 도망도 쳤고, 또 살기 위해 이장도 하고 여성 농민운동도 하게 됐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도망칠 데 없어서 그냥 머물던 순간의 안순애도, 도망치기로 마음먹은 안순애도 다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뒤를 돌아보면 늘 낭떠러지"라, 도망칠 곳이 없어 살기 위해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하던 것을 했을 뿐이라는 안순애의 말은 속상하기도 했다.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 여성위원회가 진행한 공동체 상영회에서 세 번째로 이 영화를 보았다. 그때서야, 동일방직 사건의 사진이 나오지만, 자막으로 아무런 설명이 붙어 있지 않은 것을 새삼 알게 됐다. 퇴로가 없어 운동을 감당해야만 했던 안순애에 대한 김미례 감독의 마음 씀씀이가 아니었을까.

잘했다, 굳이 화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나의 결심

이 영화의 프로듀서기도 한 아정은 IW31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IW31은 '외국인보호소폐지를위한물결InternationalWaters31'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이주 구금시설 폐지를 주장하는 모임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영상으로 올라온 몇몇 공동체 상영회의 관객과의 대화를 살펴보다가 아정이 남긴 안순애에 대한 인상적인 설명이 있어서 옮겨보고 싶었다.

2023년 12월 열린 어느 공동체 상영회 관객과의 대화에서 아정은, 안순애가 사람이 싫다고 욕을 한 바가지 하면서 중얼거리지만, 사실은 얼마나 동료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살피는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전했다. 1970년대 후반, 동일방직 동료 여성노동자와 부산에 전단지를 뿌리러 갔을 때의 기억인데, 전단지에 적혔던 주장이나 구호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대도시에 간다고 한껏 꾸미고 새 운동화를 신었던 동료의 뒤꿈치가 온종일 걸어 다닌 후 핏자국이 가득해 약국에서 반창고를 사 붙여주었던 기억은 오히려 선명했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안순애의 마음이 바스라지고 재처럼 말라버렸던 것도, 그렇게 살갑게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내달리기만 했던 환경과 조건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김미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열 개의 우물>을 누군가는 돌봄 투쟁의 역사로 읽을 수 있고, 누군가는 여성노동 운동 역사의 중요한 현장을 지키던 사람의 이야기나, 농민운동을 하게 된 노동조합 활동가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갈등하고, 도망치고 싶고, 관계를 단절했던, 지난 활동의 관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굳이 화해하지는 않기로 마음을 먹었던 내 결심이 마음에 들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림보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3월호에도 실립니다.
열개의우물 여성노동자 여성농민 다큐멘터리 김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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