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구멍가게 하나도 10년을 버텨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0년을 넘어 20년, 30년, 어느덧 체인점이 몇 개라거나 어느 음식의 원조라거나 몇 대째 이어 영업을 한다거나 할 정도가 되면 틀림없이 고객을 사로잡는 저만의 비결이라 할 것이 있을 터이다.
영업점 하나도 그러할진대 어마어마한 자본과 두뇌가 뒤엉켜 싸우는 영화시장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나 들고나는 속도가 빠른 액션, 첩보장르에서 60년 넘게 그 아성을 지켜온 시리즈라면 관객을 반하게 하는 매력이 틀림없이 있는 것이다. 60여 년의 역사, 25편의 작품을 이어온 < 007 > 시리즈 또한 마찬가지여서 사람들은 다른 첩보액션물과 구분되는 < 007 >만의 것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 007 > 시리즈만의 매력은 무엇인가. 이 시리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 극장에 가서 보기를 기대하는 것 말이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상징은 역시 다음 두 가지로 정리될 테다. 하나는 본드걸, 다른 하나는 신기술이 어우러진 특별한 도구다. 이 두 가지를 빼놓고서 이 유서 깊은 시리즈를 논하는 건 무리일 밖에 없다.
미녀와 신무기, 다시 되찾은 시리즈의 상징들
시리즈 24번째 영화 < 007 스펙터 >는 잠시 밀어두었던 시리즈의 상징들을 다시금 껴안으려 시도한다. 어느덧 나이가 들었으나 여전히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미녀였다는 상징성을 간직한 모니카 벨루치, 또 프랑스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배우 중 하나인 레아 세두를 기용해 제임스 본드의 여자, 즉 본드걸로 만든 것이다. 뿐만 아니다. 지난 몇 편의 영화에선 잘 보이지 않았던 장비들을 전면에 배치해 본드가 위기를 탈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끔 한다.
시리즈의 정체성을 생각하면 별반 대수롭지 않은 설정이지만, 지난 몇 편의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이는 제법 흥미로운 선택이다. 2000년대 초반 들어 존폐의 위기란 말이 나돌 만큼 어려움을 겪은 시리즈가 새로이 제 정체성을 써나가며 기존의 상징을 멀리 밀어두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카지노 로얄>로 부활을 선언하고 <퀀텀 오브 솔러스>로 가능성을 탐색했으며 <스카이폴>로 역사를 쓴 시리즈는 다시금 제 정체성을 되찾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바로 그 정체성이 너무 강해져 식상함을 유발했고, 그 식상함이 관객을 질리게 했으며, 그로 인하여 반세기 이어져온 시리즈가 마감할 뻔했다는 우려도 없지는 않았을 테다. 그러나 50주년에 맞춰 공개된 <스카이폴>의 특별함은 < 007 > 시리즈가 새로운 전성기에 접어들었다는 확신을 갖도록 했다. 본래 오락영화가 아닌 예술성 짙은 영화를 연출해온 감독이란 점에서 불신의 시선을 받았던 숀 멘데스는 1980년대 이후 처음으로 두 편을 연달아 연출하는 감독이 되어 돌아왔고, 그는 다른 명장들이 그러하듯 제게 주어진 기회를 그저 그런 후속작으로 넘기려 들지 않았다.
모니카 벨루치와 레아 세이두
멘데스의 선택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시리즈가 놓아버려야 했던 것, 즉 본드걸과 화려한 장비의 복구였다. 이것이 없다면 시리즈는 잠시 동안은 < 007 >로 존재할 수 있어도 이내 여타 첩보액션물과 구분점이 사라진 작품이 되고 말리란 우려가 있었을 테다. <스펙터>가 맡은 역할이 그와 같아서 영화는 무려 2시간 20여 분에 이르는 긴 러닝타임 동안 모니카 벨루치와 레아 세이두라는 두 명의 유명 배우를 본드걸로 발탁해 전격 기용한다. 또한 기존에 활용된 것보다 많은 기능을 가진 무기를 활용하여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선은 본드걸이다. 특유의 매력을 발산하며 긴박한 순간에도 잘 빠진 미녀를 안는 제임스 본드의 모습엔 언제나 비판이 따랐으나 동시에 충분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영화와 본드 모두 여성을 그저 성적 대상으로만 활용한다는 점이 점차 큰 비판과 마주하기 시작했다. 특히 21세기 신흥 비평가 중에선 시리즈의 이 같은 모습이 여성을 성적 도구화하는 구시대적 연출이라 질타하기에 이르렀다.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본드걸은 대부분 육감적인 몸매를 뽐내며 등장하여 본드와 하룻밤을 지내고는 별 역할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일부 사건에서 역할을 해내는 경우도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수준에 불과했고 상당부분 본드에게 짐이 되기까지 했다. 개별 캐릭터가 이름을 얻지 못하고 본드걸이라 뭉뚱그려져 지칭될 만큼 그 쓰임이 단순했다. 영화는 이 같은 상황을 굳이 해소하려 들지 않았고 오히려 이를 시리즈의 상징이며 매력으로 삼았다.
정체성의 회복이냐, 과거로의 회귀냐
그러나 위기가 대두되고 영화의 틀을 완전히 새로 쓰는 과정에서 본드걸의 존재감 또한 달라지기에 이른다. 본드답지 않은 본드로 여겨졌던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그 시작인 <카지노 로얄>에서 베스퍼(에바 그린 분)와 만난다. 그녀는 이전의 본드걸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기가 민망하게 중대한 역할을 해낸다. 본드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그에게 은퇴까지 생각하게 할 만큼 마음 깊이 자리한다. 그리고는 그를 배신까지 하지만 본드는 그녀의 죽음을 영영 애석해하며 마음에 담아두기에 이른 것이다. 본드답지 않은 순정남 제임스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베스퍼의 죽음을 추적하겠다며 <퀀텀 오브 솔러스> 사태까지 일으켰던 그다. 그랬던 본드가 <스펙터>에 이르러 제가 죽인 악당의 아내(모니카 벨루치 분)며 저의 숙적처럼 맞섰던 악당의 딸(레아 세이두 분)까지 꼬셔내니 영화가 다시금 '옛 정체성'을 되찾았다는 해석이 무리가 아닌 것이다.
영화가 정체성의 회복에 진력한 건 다른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편에서 "이젠 그런 거 안 만들어요"하는 Q(벤 위쇼 분)의 대사처럼 화려한 장비로 눈길을 사로잡던 일이 종식됐음을 보인 시리즈였다.
그러나 <스펙터>에선 완전 방탄에 총격과 화염방사, 운전사 탈출 등 특수성능을 내장한 자동차와 알람폭발 기능을 갖춘 시계 등의 장비가 인상적으로 활용된다. 그 결과 샌님 프로그래머처럼 바뀌었던 Q의 캐릭터도 다시금 신무기 제작을 총괄하는 괴짜 박사처럼 보이는 효과가 생겨난다.
유서 깊은 시리즈의 거듭되는 고민
다분히 < 007 >스러운 상징을 복구한 선택이 영화의 성패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스펙터>는 그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쓰디 쓴 평가를 받아들었기 때문이다. 작품성 있는 영화를 여럿 만들더니 < 007 >까지도 그렇게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던 샘 맨데스가 명장병에 걸렸는지 영화의 규모를 너무나도 키운 탓이다. <카지노 로얄> 이후 제임스 본드가 상대한 모든 적들이 실은 한 비밀조직에 속해 있었고, 그 모든 계획을 주도한 것이 알고 보면 돌고 돌아 과거의 인연이라는 파괴적 설정으로 기존에 호평을 받았던 이야기조차 망쳐버린 탓이다.
뿐인가. 사막 한가운데 성처럼 쌓아둔 끝판왕의 비밀기지는 고작 폭탄 하나와 총 몇 발로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만다. 아무리 뛰어난 역량을 자랑하는 특수요원이라지만 본드는 <스펙터>에 들어 가히 괴력을 자랑한다. 권총으로 헬리콥터를 떨어뜨리지 않나, 3분 만에 초고층 빌딩에서 여자를 구해 탈출하는 등 전작과 비할 수 없는 역량을 과시한다. 이 모든 액션이 그만큼 강해진 상대에 대항하기 위해서라 할지라도 영화가 개연성이며 설득력을 크게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게 될 밖에 없는 것이다.
역시 오락영화는 오락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 해야 한다는 중론이 이어졌고, 샘 멘데스는 후속작 연출을 맡지 못하게 됐다. < 007 > 시리즈가 과거의 정체성을 조금 더 갖게 되었다는 걸 그만의 성취로 남겨둔 채로.
< 007 > 시리즈를 그답게 만드는 건 과연 무엇일까. 당대 최고 미녀들과 첩보원의 하룻밤 비밀스런 연애일까. 다른 어느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기상천외한 도구일까.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질문을 안고 이 유서 깊은 시리즈는 다음 편으로 넘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