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Viking)'은 현재의 스칸디나비아(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지역에 거주하던 북게르만족을 지칭하는 용어다. '유럽의 무법자'로 불린 바이킹들은 극한의 땅에서 다져진 생존력과 강력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유럽을 호령한 정복민족으로 명성을 떨쳤다. 바이킹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전성기였던 8세기와 11세기를 가리켜 세계사에서는 '바이킹 시대(Viking Age)'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유럽의 작은 세력에 불과했던 바이킹이 어떻게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존재가 될 수 있었을까. 흔히 야만스러운 해적이나 약탈자의 이미지로만 알려졌던 바이킹은 어떻게 유럽과 세계의 역사까지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까.
 
3월 5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41회에서는 '바이킹은 어떻게 잉글랜드 왕실의 핏줄을 바꿨나'편을 통하여 유럽의 역사를 바꾼 바이킹 시대의 명암을 조명했다. 중세 영국사 전문가인 이상동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바이킹이 강력한 전투민족으로 자리잡은 이유

바이킹은 본래 고대 노르웨이어로 '침략자'라는 뜻이다. 바이킹의 선조들은 기원전 5000년에서 1만 년 전까지 북유럽 일대에 자리잡고 살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스칸디나비아인' 혹은 '데인인' 등으로 지칭했지만, 8세기 이후 이들에게 빈번하게 약탈을 당한 유럽인들 사이에서 악명이 퍼지면서 침략자를 지칭하는 오늘날의 바이킹이라는 명칭이 굳어졌다.
 
바이킹이 강력한 전투민족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선천적으로 우월한 신체조건과 척박한 자연환경의 영향이었다. 9세기의 한 기록에 따르면 '바이킹 남성들의 키가 야자나무만큼 컸다'는 증언도 존재한다. 학계 연구에 따르면 로마시대 남성들의 평균 키가 168cm 정도였다면 바이킹은 176cm에 이르렀으며 키만 아니라 평균 체구도 동시대 유럽인들보다 월등히 컸다고 한다.
 
또한 경작지가 부족하고 겨울이면 추위와 배고픔이 일상이었던 북유럽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스스로 더욱 강인해져야만 했다. 일부 바이킹 집단에서는 아들이 태어나면 침대 밑에 칼을 놓아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칼은 바이킹 남자들에게 필수도구로 여겨졌으며, 바이킹 아버지들은 아들에게 '나는 네게 재산을 물려주지는 않을 테다. 너는 오로지 이 칼을 가지고 스스로 필요한 것들을 얻어야만 한다'고 전사로서의 조기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바이킹 사회에서의 분쟁 해결 방법은 '결투'였다. 바이킹 남자들은 결투를 통하여 승자는 모두 정당하다는 판결을 얻고, 패자에게는 몸값을 요구하거나 재산을 몰수할수 있었다. 당연히 결투를 하다가 죽는 경우도 다반사였고, 결투 신청에 응하지 않는 이들은 겁쟁이로 낙인 찍히거나 추방을 당했다. 이러한 집단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바이킹은 철저한 약육강식의 룰을 숭배하며 결투나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전사들도 성장했다.
 
바이킹들은 정신적으로 북유럽 신화를 숭배했다. 영화 <어벤져스> 시리즈나 게임, 판타지 등을 통하여 현대에도 대중적으로 알려진 토르(천둥의 신), 오딘(전쟁의 신), 로키(불의 신) 등은 모두 북유럽 신화의 주인공들이다. <반지의 제왕> 등 수많은 판타지 명작들의 모태가 된 북유럽 신화는 용맹하고 두려움 없는 주인공들이 거대한 스케일의 모험을 펼치는 이야기들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
 
바이킹들은 전사가 죽으면 사후에 발키리 여신과 함께 무지개 다리를 건너 신들의 세계인 아스가르드로 넘어온다고 믿었다. 자신들을 지켜주는 위대한 수호신이 있다는 믿음은, 바이킹 전사들의 정신력을 더욱 강인하게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다.
 
8세기에 이르러 바이킹들은 척박한 극한의 땅 스칸디나비아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의 진출에 눈을 뜨게 된다. 본래 스칸디나비아 지역은 험준한 산맥과 수많은 피오르 때문에 육지로는 이동이 어려웠다. 그러나 바이킹의 군함인 '롱십(longship)'의 등장과 항해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바이킹들은 이제 육지와 바다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이동수단을 얻게 됐다.

해상민족인 바이킹은 바다의 색깔과 파도의 방향, 냄새까지 고려하여 능숙하게 바다를 왕래했다고 한다. 또한 바이킹들은 방해석이라는 투명한 광물로 만든 선스톤을 통하여 빛의 굴절로 항해에 필수적인 태양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다. 바다에 대한 전문성까지 축적하게 된 바이킹은 이를 무기삼아 북해의 지배자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바이킹들의 생존방식은 바로 무자비한 '약탈'이었다. 한 기록에 따르면 바이킹들은 "우리는 좋은 전리품을 약탈할 수 있는 해안이라면 어디든지 간다. 우리는 땅 위의 그 어떤자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강인하며 그 어떤 해전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만큼 호전적인 성향을 여과없이 드러냈다고 한다.
 
바이킹들은 8세기 말부터 브리튼 섬(잉글랜드)과 서유럽 일대를 본격적으로 약탈하기 시작한다. 특히 바이킹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된 것은 수도원이었다. 당시 유럽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곳곳에 수도원이 세워졌고 독실한 교인들의 기부로 많은 돈과 재물이 쌓여있었다. 793년 8월 바이킹들은 잉글랜드 동부의 린디스판 수도원을 습격하여 수도사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재물들을 약탈해갔다.
 
이후로 유럽의 주요 수도원들은 바이킹들에게 해마다 습격을 당하는 수난을 피하지 못했다. 한 기록에 따르면 '바이킹 때문에 기독교 왕국이 멸망할 것 같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였다고. 또한 유럽 수도원의 한 성가에서는 '우리 영토를 파괴하는 야만적인 북방민족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옵소서'라는 가사를 통하여 신에게 구원을 요청해야할 만큼 바이킹의 악명이 당대 유럽사회에 엄청난 재앙이 되었음을 짐작케한다.
 
바이킹은 재물만이 아니라 사람도 약탈했다. 바이킹은 유럽 곳곳에서 수도사와 수녀, 민간인들을 납치하여 노예 시장에 내다 팔고 수익을 챙겼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두둑한 몸값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노예로 납치된 남성들은 건물이나 배를 짓는 육체적 노동에 이용되었고, 여성들은 바이킹에게 성적으로 착취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약탈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바이킹의 세력은 더욱 융성해졌다.
 
무서운 침략자로 악명 떨친 바이킹

9세기 들어 바이킹은 점차 단순한 약탈자에서 '정복자'로 진화한다. 바이킹이 눈을 돌린 것은 이번에도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가까운 브리튼 섬이었다. 당시의 잉글랜드는 앵글로 색슨족이 지배하던 7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하던 시기였다.
 
'전설의 바이킹'으로 불리우던 바이킹의 왕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는 브리튼의 노섬브리아 왕국을 약탈하러 갔다가 풍랑을 만나 좌초하면서 오히려 붙잡힌다. 라그나르는 뱀굴에 던져져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라그나르의 아들 이바르는 복수를 다짐했고, 이후 '바이킹의 잉글랜드 대침략'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당대 바이킹의 군사력은 유럽 최강으로 꼽혔다. 바이킹은 도끼, 검, 활, 창 등 다양한 병기들을 자유자재로 다루었으며, 무기제조 기술이 뛰어나 '울프베르트'(Ulfberht)라 불린 바이킹 검은 내구력과 유연성이 모두 탁월했다고 한다.
 
또한 광기에 가득한 호전적인 전사를 의미하는 베르세르크(berserk)라는 용어도, 바로 곰가죽을 뒤집어쓰고 용맹하고 싸우는 바이킹 최정예 전사들의 모습에서 유래했다. 바이킹은 전투에 나가기전 전쟁의 신 오딘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특별한 의식을 치렀고, 이를 통하여 곰의 영혼이 인간의 의식속에 타오른다고 믿었다. 바이킹은 동물의 가죽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춤을 추며 광란의 상태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당시 바이킹들이 최면이나 환각제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바르는 아버지 라그나르가 죽은 해인 865년, 브리튼 섬을 향하여 사상 최대 규모의 바이킹 침공을 감행한다. 제대로 된 정규군도 없었던 노섬브리아는 바이킹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했다. 이바르는 생포한 노섬브리아의 왕에게 산 채로 갈비뼈를 난도질하여 죽이는 '피의 독수리' 형을 내리며 잔혹하게 보복했다.

노섬브리아의 영역을 차지한 이바르는 이후 이 지역을 기점으로 삼아 잉글랜드 왕국들을 연이어 침공하기 시작한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도시의 거리에서 마주쳤던 소년들과 늙고 젊은 사내들이 모두 살해당했다', '어머니의 품 안에서 낚아채진 갓난아기는 그 눈앞에서 도륙당했다'며 당시의 참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바르는 저항하는 이들은 고하를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처형하며 바이킹의 세력을 넓혀갔다.
 
이러한 바이킹의 침략은 한편으로 잉글랜드인의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데 영향을 끼쳤다. 잉글랜드 7왕국의 하나였던 웨섹스 왕국의 알프레드 대왕은 바이킹의 공세를 저지해내며 앵글로색슨족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외부세력인 바이킹에 대항하면서 분열된 왕국 사이에서는 하나의 잉글랜드인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후 100여 년간 브리튼 섬에서 바이킹과 잉글랜드인의 공존기가 형성된다. 이때부터 바이킹과 북유럽 문화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역에 유입되면서 오늘날의 영국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바이킹과 대립하여 세력을 확장한 웨섹스 왕국은 927년 바이킹을 몰아내고 분열된 왕국들을 통일하며 잉글랜드 왕국을 건설한다. 하지만 잉글랜드 외에서 바이킹의 세력 확장은 계속되었다.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덴마크와 노르그(현 노르웨이) 왕국을 건설하고 프랑크 왕국을 침공했다. 이어 바이킹은 뛰어난 항해술과 적응력을 바탕으로 서쪽으로 진출한 세력들은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발견해냈고, 이어 지금의 캐나다 동부에까지 진출했다. 이는 훗날 콜림버스의 신대륙 발견보다 약 500년이나 앞선 기록이다.
 
내륙을 통하여 동쪽으로 진출한 바이킹들은 무역상인으로 활약하며 유럽에서 중동으로까지 무역로를 넓히는 데 성공한다. 중동의 패권을 쥐고있던 아바스 왕조가 흔들리고 혼란에 빠진 시기에는, 교역에 지장을 받게 된 바이킹들이 다시 침략자의 본성을 드러내며 중동 일대를 약탈하고 수많은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했다. 훗날 유라시아를 제패하는 몽골 제국보다 수백년이나 앞서 중동에 무서운 침략자로 악명을 떨친 것이 바로 바이킹들이었다.

한편 프랑크 왕국을 침공했던 바이킹 세력은 현지에 정착하여 '노르망디 공국'을 건설한다. 911년 프랑크의 국왕 샤를 3세는 바이킹들과 계속 싸우느니 차라리 그들의 힘을 인정하고 활용하기 위해, 이 중 한 무리의 두목이었던 롤로를 회유하여 왕국 북부의 영지를 수여하고 다른 바이킹 세력의 침입으로부터 왕국을 보호한다는 조건으로 충성을 서약받았다.
 
이 지역이 바로 현재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 지역이다. 바이킹은 북쪽에서 왔다는 의미로 노스맨(Norseman)이라 불렸고, 이는 다시 그들이 지배하게 된 지역인 노르망디(Normaundie)라는 지명과 노르만인(Normans)이라고 불리우는 정체성의 유래가 된다.
 
10세기 들어 덴마크 왕국을 지배하던 바이킹 세력인 크누트 대왕은 잉글랜드와 노르웨이까지 점령하여 사상 최초로 세 나라의 왕위를 모두 차지하고 바이킹의 대제국(북해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하지만 크누트 사후 북해제국은 오래가지 못하여 다시 분열되었다.
 
잉글랜드의 왕위를 놓고 여러 세력들간 다시 피비린내나는 '왕좌의 게임'이 펼쳤다. 바이킹의 후예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는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며 최대의 경쟁자인 웨식스 왕조의 헤럴드 2세를 제거하고 패권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해 12월 25일 윌리엄 1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대관식을 올리고 공식적으로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니, 바이킹의 후손이 잉글랜드를 통치하는 '노르만 왕조(House of Normandy)'의 시작이다. 윌리엄 1세의 핏줄은 모계를 통하여 오늘날 현대 영국 왕실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의 왕과 노르망디 공작을 겸했고, 이를 큰 위협으로 간주한 프랑스와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지며 훗날 백년전쟁(1337-1453)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바이킹의 세력다툼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관계, 더 나아가 유럽과 세계사의 판도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윌리엄 1세의 치세는 승승장구하던 바이킹 시대의 급격한 몰락을 가져오는 전환점이 된 시기이기도 했다. 바이킹 세력들이 기독교와 유럽문화를 받아들이며 차츰 문명에 동화되어갔기 때문이다. 11세기에 접어들며 약탈과 대외 활동이 줄어든 바이킹의 시대는 역사속으로 저물어가게 된다.
 
"희망없이 사는 것보다 싸우다가 사라지는 것이 낫다." 바이킹의 서사시 <불숭일족의 서사>에 등장하는 문구다. 바이킹은 유럽 역사에서 단순히 야만인이나 침략자라는 특정한 이미지로만 정의내릴 수 없는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닌다. 그들은 한편으로 상인이자 교역자였고, 때로는 위대한 탐험가로서 유럽의 활발한 교류를 촉진하는 데 영향을 미쳤고, 새로운 대륙으로 인류의 발자취를 넓히는 데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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