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유관순(柳寬順, 1902-1920) 열사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오늘날까지도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유관순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를 4개월 남겨두고 옥사하였을 때 그녀의 나이는 꽃다운 만 17세에 불과했다. 여느 또래들처럼 그저 웃으며 즐겁기도 모자랄 나이에, 왜 그녀는 그토록 가혹한 운명을 감수해야만 했을까. 우리는 과연 인간 유관순의 삶과 진면목에 대하여 과연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2월 28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강연 <벌거벗은 한국사> 97회에서는 '미처 몰랐던 3·1운동 이후 이야기, 유관순은 왜 옥중에서 갓난아이를 돌봤나'편을 통하여 유관순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의 용두리 마을에서 고흥 유씨 가문의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가문은 선대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며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게 됐다. 또한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柳重權, 1863-1919)은 전 재산을 바쳐 흥호학교를 설립하고 계몽운동을 주도하는 데 적극 관여한 인물이었다.
 
유관순의 가문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보수적인 조선사회와는 다른 서구식 사상과 가치관을 받아들였고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또한 이는 훗날 유관순이 여성으로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는 밑거름이 됐다.
 
친척 조카인 유제한의 증언에 따르면,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씩씩한 장난을 좋아하고, 장난을 하면 반드시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한다. 유관순이 적극적이고 리더십이 있는 성격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유관순은 성장하면서 차츰 조국이 처한 엄혹한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 유관순이 7세 때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대한제국이 국권을 빼앗기고 일제에 강제 병합되면서장장 35년에 걸친 일제강점기가 시작됐다. 어린 유관순의 마음에도 망국민이라는 현실과 함께 반일감정이 조금씩 싹트게 되는 순간이었다.
 
13세가 된 1916년, 유관순은 미국 여성 선교사 사애리시(본명 앨리스 해먼드 샤프) 부인의 권유로 전액 장학금을 받고 국내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었던 서울의 이화학당에 편입하게 된다. 당시의 유관순은 또래들처럼 재기발랄한 말괄량이로 유명했다고 한다.
 
유관순의 유쾌한 실제 성격을 보여주는 한 일화가 전한다. 이화학당 학생들은 잠자기 전에 기독교식으로 단체 기도를 했는데, 어느날 유관순이 대표로 기도하는 순서가 됐다. 유관순은 의례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마무리해야 할 대목에서, 돌연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명태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애드리브를 날렸다.

근엄한 분위기였던 같은 방 여학생들은 순간 참지 못하고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웃음소리를 듣고 방에 들어온 기숙사 사감은, 유관순을 비롯한 소녀 전원에게 모두 품행점수 낙제점을 내렸다고 하다.
 
꿈많던 소녀 유관순의 인생을 바꾼 순간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하지만 꿈많던 소녀 유관순의 인생을 하루아침에 바꾸게 되는 운명의 순간이 찾아온다. 유관순이 16세가 된 1919년, 대한민국의 황제 고종이 돌연 서거한다. 일제는 공식적으로 고종의 사인이 뇌출혈이라고 발표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고종이 일제에 독살당했다고 생각하며 분노했다.
 
고종의 장례식이 치러지기 이틀 전인 3월 1일, 경성을 포함한 7개 도시에서 조선인들이 삼삼오오 운집하며 만세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3.1 독립만세 운동(三一運動)'의 시작이다. 특히 일본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주역은 바로 어린 학생들이었다.
 
김복희 지사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 나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폭정 밑에서 고통과 굴욕을 밥먹듯이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더욱이 신학문을 배우던 당시 이화학당 학생들의 반일감정은 정말로 날카로웠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이화학당은 학생들이 위험에 처할 것을 걱정하여 교문을 닫고 시위 참여를 막았다. 하지만 유관순을 비롯하여 서명학, 김복순, 김희자, 국현숙 등 다섯 명의 여학생들은 학교 담장을 넘어 탈출하며 기어코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을 가리켜 이른바 '5인의 결사대'로 부른다.
 
유관순과 학생들은 고된 시위에 지친 상황에서도 수많은 인파속에서 만세의 전율을 맛보며 벅찬 감동을 느꼈다. 유관순은 그로부터 4일 뒤인 3월 5일 남대문에서 벌어진 학생연합 시위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런데 시위 확산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은, 이때부터 군중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며 강경 진압하기 시작했다. 3월 10일이 되어 총독부는 학생들이 시위를 주동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조선 전국의 학교들에 임시휴교령을 반포한다. 학교 기숙사가 문을 닫으면서 유관순도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내려온다.
 
유관순은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 유중원과 용두리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고향에서 또다른 만세 시위를 기획했다. 1919년 4월 1일 시위 장소였던 아우내 장터에는, 놀랍게도 무려 30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운집했다. 주민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주재소(지금의 파출소)로 나아갔다.
 
하지만 일본 경찰과 헌병대는 비무장 상태로 평화 시위를 하던 참여자들을 향하여 총검까지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만세운동의 현장은 순식간에 피비린내가 난무하는 학살의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일본의 만행에 항의하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도 현장에서 총탄을 맞아 함께 즉사했다. 눈앞에서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 유관순은 "내 나라를 되찾으려는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전쟁에서 쓰는 무기를 사용하여 우리를 죽이느냐"라며 울부짖었다.
 
일제는 '아우내 장터 학살사건' 이후 2주 뒤인 4월 15일에는 화성시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가둔 뒤 총탄을 퍼부어 집단으로 살해하고 방화까지 저지르는 대학살을 일으켰다. 이는 일본인 학교와 주재소를 습격한 조선인 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성 학살이었다.
 
2주 전 만세 운동이 일어난 장소였던 발안장터에서 가장 인근에 위치한 마을이었던 제암리가 본보기 차원에서 타깃이 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주민 30여 명이 살해되고 민가 30여 채가 소실됐다.
 
또한 일본군은 인근의 고주리로 넘어가 독립운동가 김흥렬 지사와 그 일가족 6명을 또다시 잔혹하게 살해했다. 일제에 은폐될 뻔했던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은 외국인 기자와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뒤늦게나마 국제사회에 진실이 알려질 수 있었다. 현재 제암리 사건 현장에는 당시의 독립운동 역사를 간직한 '화성시 독립운동기념관'이 설립되어 올해 4월 개관 예정이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3월 1일 <독립신문>에 올린 기고문에서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을 언급하며 '이날에 희락하고 놀 뛰는 자여, 이 광경을 잊지말라'고 부르짖었다. 조국의 현실을 외면한 이들에게 일제의 끔찍한 만행을 잊지 않을 것을 촉구하며,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기 전까지는 언제든 제암리 사태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그와 같은 사람을 다시 보지 못했다"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한편 유관순은 용두리 본가에 남겨진 어린 동생들을 걱정하여 돌아왔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녀는 손발이 꽁꽁 묶이고 눈과 얼굴까지 가려진 채로 끌려가 유치장에 구금됐다. 일제는 잡혀온 이에게는 공포감을 주고, 독립운동가를 본 사람들에게는 자칫 동요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얼굴을 공개하지 않은 것이었다.
 
1919년 5월 9일, 유관순의 재판이 시작됐다. 16세의 소녀는 사법권을 장악한 일제의 재판정에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홀로 서야 했다. 유죄가 인정된 유관순에게 내려진 1심 형량은 충격적이게도 무려 5년이었다. 당시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최고 형량을 받은 것도 3년이었다.
 
유관순은 재판정에서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나는 당당한 대한의 국민이다. 대한 사람인 나를 너희가 재판할 권리가 없다"고 꾸짖으며 의자를 집어던졌다고 한다. 일제는 이러한 유관순의 불순한 태도에 대한 본보기 차원에서 더욱 과중한 형량을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6월 30일, 유관순은 2심에서 그나마 3년으로 감형됐다. 이에 유관순은 "삼천리 강산 어디를 가도 감옥이나 다름없다"며 그저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어차피 일제강점기를 살아가야 하는 자체가 옥살이와 다를 게 없다는 의미였다.
 
유관순은 악명 높던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 옥살이를 하게 된다. 8호 감방에 투옥된 유관순은 하루하루 열악한 수감환경과 지옥같은 고문을 견뎌내야만 했다. 서대문형무소에는 고문실과 각종 장비가 갖춰져 있어서 수시로 수감자들을 끌어다가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고문을 자행했다고 한다.

또한 감방은 좁은 공간에 다수의 수감자들을 몰아넣고 건강이나 위생관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서 병으로 옥사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유관순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수감자들과 마음을 나누며 꿋꿋이 힘든 감옥생활을 버텨나갔다.
 
그해 11월, 앙명이라는 수감자가 출산으로 잠시 출옥한 뒤 아기와 함께 다시 수감되는 일이 있었다. 유관순을 비롯한 8호 감방의 수감자들은 불편한 환경 속에서도 불평이나 원망 대신, 기꺼이 산모와 아이를 챙기며 육아를 도왔다고 한다.
 
유관순과 수감자들은 부족한 음식을 조금씩 나눠서 덜어가며 산모와 아이가 영양부족에 시달리기 않게 배려했다. 또한 유관순은 극심한 추위로 인하여 아이가 써야 할 기저귀가 얼어붙자, 품 안에 넣어 자신의 체온으로 기저귀를 녹여주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어윤희 선생은 회고록에서 "어린애가 무슨 일이든지 충직하고 책임감이 강하여, 그와 같은 사람을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기억 속의 유관순을 회상했다. 어쩌면 본인도 아직 어른들의 보호가 필요한 10대 중반의 어린 나이에,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았던 유관순의 속 깊은 면모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해가 바뀌어 유관순은 감옥에서 17세를 맞이했다. 1920년 3월 1일을 기념하여 유관순은 감방 안에서 수감자들과 함께 옥중 만세운동을 벌였다. 다른 방의 수감자들도 호응하여 옥중 만세 소리가 형무소 밖까지 울려퍼질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일제는 보복으로 유관순을 끌어내 또다시 매일같이 잔혹한 고문과 구타를 가했고, 어느새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옥중만세운동 이후 한 달이 지난 1920년 4월, 일제는 영친왕 이은과 일본 왕실(훗날의 이방자 여사)간의 혼인을 기념하여 조선인 수감자들에게 특별사면을 단행한다. 유관순의 형기도 3년에서 1년 6개월로 절반이 감형됐다. 이로써 유관순은 약 9개월 정도만 지나면 풀려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출소를 불과 4개월 앞둔 1920년 9월 28일, 안타까운 비보가 전해진다. 유관순이 끝내 감옥에서 숨을 거둔 것이었다.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증언과 기록을 토대로, 유관순의 사인이 잔혹한 고문으로 인한 장기손상과 방광파열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유관순은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의연함과 당당함을 잃지않았던 유관순의 모습이다.
 
안타깝게도 유관순은 사후에도 끝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일제는 자신들이 저지른 잔혹한 만행을 숨기기 위하여 유관순의 시신을 내주기를 거부하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1930년대 중반이 되어 이태원 공동묘지는 일제의 군용기지로 재개발되었고, 시신을 수습해줄 가족도 뿔뿔이 흩어진 유관순의 묘는 무연고 묘로 화장처리시켜서 합장해버렸다. 현재 유관순의 고향 충남 천안시 병천면에서는 시신없는 가묘를 설립하여 유관순의 넋을 추모하고 있다.
 
"한국인이여, 1919년에 젊은이와 늙은이들에 진 커다린 빚을 잊지 마시오."

제암리 학살사건을 세계에 알린 의학자 겸 션교사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가 남긴 어록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만세를 외쳤던 17세의 소녀 유관순은 '3·1운동'의 상징이 되어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역사에는 유관순처럼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용기와 희생이 모여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후손들이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벌거벗은한국사 유관순 독립운동가 삼일운동
댓글5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