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수(惡手) 뒤에는 무리수(無理數)였다. 대한축구협회(KFA)가 또다시 위험한 결정을 내렸다. 축구협회는 지난 2월 27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축구회관에서 제3차 전력강화위원회를 개최한 뒤 브리핑을 통해, 3월 A매치 2연전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을 이끌 '임시 감독'으로 황선홍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낙점했다고 공식발표했다. 
 
축구협회는 지난 16일 2023 AFC 아시안컵 우승 실패와 대표팀 운영을 둘러싼 각종 논란을 이유로 독일 출신 위르겐 클린스만을 1년 만에 축구대표팀 감독직에서 전격 경질했다. 당장 다음 A매치 일정인 3월 북중미월드컵 2차예선이 코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빠른 시일 내에 후임 대표팀 감독 인선을 놓고 발등의 불이 떨어졌다.
 
촉박한 시간과 상황을 감안할 때 후임 감독으로는 자연히 국내파 감독 선임에 무게가 실렸다. 특히 홍명보, 김기동, 김학범 등 K리그 현직 감독들의 대표팀 차출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K리그 팬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격렬하게 반발하며 축구협회를 비판하는 여론이 크게 높아졌다. 특히 울산 팬들은 트럭시위까지 벌이며 홍명보 감독을 비롯한 현직 감독들의 차출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심상치 않은 여론에 부담을 느낀 협회는 결국 K리그 감독 차출을 포기했고, 3월 A매치는 일단 '임시 감독' 체제로 운영하는 것으로 다시 방향을 선회했다. 협회는 최종 감독 후보 3인을 놓고 논의한 끝에, 최종적으로 1순위였던 황선홍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A대표팀과 임시로 겸직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협회는 왜 '황선홍 카드'를 선택했을까
 
 '난파선'이 된 한국 축구의 키를 잠시 잡아줄 임시 사령탑으로 황선홍 한국 23세 이하(U-23) 축구대표팀 감독이 선임됐다.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회는 27일 오후 제3차 회의를 열어 3월 A매치 기간 대표팀을 지휘할 임시 사령탑으로 황 감독을 선임했다고 밝혔다.

'난파선'이 된 한국 축구의 키를 잠시 잡아줄 임시 사령탑으로 황선홍 한국 23세 이하(U-23) 축구대표팀 감독이 선임됐다.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회는 27일 오후 제3차 회의를 열어 3월 A매치 기간 대표팀을 지휘할 임시 사령탑으로 황 감독을 선임했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

 
황선홍 감독은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레전드 출신이다. '황새'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현역 시절 당대 최고의 공격수였던 황 감독은, A매치 103경기에 출전하여 50골(차범근에 이은 대한민국 역대 2위)을 넣었고, 월드컵 본선에는 무려 4회나 출장했다. 특히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대한민국 역사적인 월드컵 첫 승을 이끈 폴란드전 결승골을 기록하는 등, '4강 신화'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지도자로서도 성공가도를 달렸다. K리그1 포항 스틸러스와 FC서울 등에서 감독직을 역임하며 리그와 FA컵 우승 각 2회를 달성했다. 이후로는 한동안 부침을 겪으며 평가가 하락하기도 했지만, 지난 2023년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24세 이하 대표팀을 이끌고 '퍼펙트 우승'으로 대한민국의 3회 연속 금메달을 견인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황선홍 감독은 홍명보 울산 감독과 함께, 성공한 '스타플레이어 출신감독'의 대명사로 통한다.
 
황 감독은 예전부터 공공연하게 국가대표팀 감독이 최종 목표라는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경력이나 업적 면에서도 이미 A대표팀을 맡을만한 자격이 충분하며, 실제로 클린스만이 경질된 이후 유력한 대안중 하나로 꼽혀왔기에 이번 선임이 크게 놀라운 결정은 아니다.
 
협회는 왜 황선홍 카드를 선택했을까. 정해성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장은 신임 대표팀 감독의 조건으로 ▲ 전술적 역량 ▲ 취약 포지션의 선수 육성 능력 ▲ 지도자로서의 검증된 성과 ▲ 풍부한 대회 경험을 갖춘 경력 ▲ 선수 및 축구협회와의 소통 능력 ▲ 젊은 세대를 아우를 리더십 ▲ 최상의 코치진 구성 능력 ▲ 대표팀을 이끌고 성적을 낼 수 있는 능력 등을 기준으로 제시한 바 있다. 현재 황선홍 감독은 이러한 조건에 대부분 부합하는 몇 안 되는 국내파 감독이다.
 
황 감독은 K리그와 국제대회에서 지도자로서 모두 검증된 성과를 올렸고, 본인이 한국축구의 레전드 출신로서 유럽파가 주축이 된 현 대표팀의 스타플레이어들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을 만한 권위를 갖췄다. 또한 연령대별 대표팀에서 이강인, 백승호, 정우영 등 현 A대표팀에 속한 선수들 다수를 지도해 본 경험이 있어서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적합하다.
 
세계축구에서는 연령대별 대표팀과 A팀을 겸직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한국도 과거 허정무 감독이나 고 핌 베어벡 감독의 사례가 있다. 협회도 이를 고려하여 황 감독의 선임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애초부터 황 감독의 능력이나 자격이 아니라, '타이밍'에 있었다. 황선홍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 대표팀은 오는 4월 15일부터 5월 3일까지 카타르에서 개최 예정인 2024 AFC U-23 아시안컵을 앞두고 있다.

이 대회 우승보다 한국축구에게 더 중요한 목표는, 파리올림픽 본선 티켓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아시안컵 조별리그와 토너먼트를 거쳐 1위부터 3위 팀까지 올림픽 본선에 직행하고, 4위 팀은 아프리카 예선 4위 팀과 플레이오프로 마지막 본선 진출 티켓 한 장을 다툰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라이벌 일본을 비롯해 중국, UAE와 함께 '죽음의 조'에 속했다. 특히 우승후보로 꼽히는 일본은 2년전 우즈벡 U-23 아시안컵 8강전에서 황선홍호를 0-3으로 침몰시키는 '타슈켄트 참사'의 악몽을 선사했다. 지난 올림픽까지 9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한 대한민국이지만, 이번에는 조별리그 통과도 섣불리 장담할 수 없다.

차라리 애초에 겸직으로 시작한 감독이라면 2-3년전부터 미리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이원화'를 준비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일정이 촉박하다. 선수구성에서부터 대회 준비까지 그야말로 아시안컵에만 올인해도 모자랄 시점에, 협회가 가장 중요한 수장을 A대표팀에 '소방수'로 빼내가버린 것은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판단이 아닐 수 없다. 

대안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황선홍 감독과 함께 최종후보 3인에 이름을 올린 지도자는, 박항서 전 베트남대표팀 감독과 최용수 전 강원FC 감독이었다. 이 두 감독은 검증된 리더십에 현재 맡은 팀도 없어서, 감독직을 수행하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더구나 정식이 아니라 임시 감독직이고, A대표팀이 타이틀이 걸린 단두대매치를 앞둔 것도 아니라면, 더욱 현직인 황선홍 감독에게 무리한 부담을 줄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황 감독을 1순위로 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시즌을 앞둔 K리그 감독을 차출한 것과 사실상 다를 바가 없는 결정이었다.
 
임시 감독이고 겸임이라고 해서 A대표팀 감독직의 부담은 결코 가볍지 않다. 축구대표팀은 지난 아시안컵의 부진과 선수단 내분 사태로 큰 홍역을 치른 뒤라 첫 A매치인 북중미월드컵 예선에서 분위기 반전이 절실한 상황이다.
 
황선홍호는 오는 3월 21일 홈, 5일 뒤인 26일에는 원정으로 태국과 2연전을 치른다. 대표팀이 현재 2연승으로 조 1위에 올라 있어서 태국과의 2연전을 모두 잡으면 사실상 최종예선 진출을 조기에 확정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가 조금이라도 좋지 않으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황 감독이 뒤집어쓰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무엇보다 팬들과 전문가들이 그동안 줄곧 지적했던 부분은, 협회가 국내파 감독들을 다급할때만 손을 내는 '소모품'처럼 취급하는 관행이었다.

연령대별 대표팀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월드컵 본선을 1년 남겨 놓고 다급하게 지휘봉을 떠맡아 온갖 시행착오와 수모를 겪어야 했던 신태용 인도네시아 대표팀 감독이나 홍명보 울산 감독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A대표팀 감독 시절에 받은 상처로 인하여 레전드로서 쌓아온 명예까지 부정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황선홍 감독은 임시 대타 역할 정도가 아니라 언젠가 차기 정식 A대표팀 감독 후보로 거론될 만한 인물이었다. 한국축구에게 있어서 귀중하게 아끼고 보호해야할 지도자 자원이기도 하다. 불과 1년여전까지만 해도 황 감독은 여러 가지 실책과 지도력에 대한 의구심으로 여론의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지만, 클린스만과는 달리 아시안게임 우승을 통하여 겨우 극적인 명예 회복에 성공한 바 있다.
 
만에 하나, 황 감독이 임시 감독으로 썩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고, 올림픽팀의 10회 연속 본선 진출까지 좌절된다면 황 감독의 지도자 커리어도 회복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또다시 축구협회에게 돌아갈 것이다. 과연 협회의 이번 결정이 황선홍 감독과 한국축구 전체에는 또 어떤 나비효과로 돌아오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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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감독 축구대표팀 임시감독 올림픽대표팀 K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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