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포스터 이미지

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포스터 이미지 ⓒ 판씨네마㈜

 
영화를 보았다. 처음에는 별다른 큰 기대는 없었다. 1시간 30분 남짓한, 요즘 장편영화치고는 그리 길지 않은 상영시간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통과의례를 수행하듯 관람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흥미로운 구석이 몇 보이지만 대충 비슷한 소재와 배경의 몇 편 영화들과 비교해보는 재미 정도로 시간이 흘러갔다. 엉뚱한 상상력과 요즘엔 저만큼 사교육 시장이 발달했구나! 실감하면서, 과연 감독은 제법 비전형적인 이야기에 어떻게 마침표를 찍을까 궁금해졌다. 전개 과정에서 이해가 잘 가지 않거나 늘어지는 구석도 엿보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마침내 반전과 결말이 다가왔다.
 
대체 내가 무엇을 본 거지? 혹은 설마 정말 이렇게 결말을 맺는 걸까? 하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 때 단호할 정도로 이야기는 툭 끊어지듯 마무리된다. 쿠키영상 같은 에필로그가 존재하지만 크게 반전은 없었다. 그렇게 영화는 천연덕스럽게 파격적인 마침표를 확인시켜줬다. 교육 문제를 다룬 몇 문학과 영화들, 그리고 과학소설과 SF영화 고전 몇 편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지금껏 본 영화에 대해 기억을 되짚어가며 맥락과 함의를 해석하려 애써 보았지만, 사지선다 시험처럼 정답을 딱딱 예정한 게 아닌 이야기라 그저 소용돌이치듯 연속된 상념만 남았다. 근래 한국독립영화에서 파격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아졌다고 개탄하던 선입견을 일정 부분 희석해버리는, 그것도 미성년 아동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본 소감이다.
 
11살 동춘은 왜 페르시아어를 배우게 되었는가
 
 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스틸 이미지

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스틸 이미지 ⓒ 판씨네마㈜

 
단발머리에 뚱한 표정을 한 소녀가 영어학원 수업 중 원어민 교사에게 질문한다. 자신이 왜 이 수업을 들어야 하냐는 질문이다. 뜻밖의 질문에 난감하던 교사는 부모님이 아실 거라며 답을 얼버무린다. 교사의 답변을 간직한 소녀는 집에서 부모님에게 충실히 질문을 옮긴다. 하지만 부모님은 수건돌리기를 하듯 교사가 영어에 능통하니 답을 해줄 거라며 난처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끝내 소녀는 원하던 답변을 듣지 못했을 테다.
 
시간이 조금 지났다. 소녀는 11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다. 사립초등학교에서 이제는 모스부호 키트를 조작하고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관찰하는 중이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학원으로 직행이다. 국영수는 기본이고 태권도와 과학, 미술 등 기타 주요 과목과 예체능까지 소녀의 시간은 공부로 가득히 채워진다. 그는 묵묵히 부모의 기획에 따라 영재교육을 수행하지만, 내성적이고 무대 공포증까지 있어서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발표나 경연이 쥐약이다. 영어경연대회에 출전하지만, 제한시간 내로 결국 발표를 해내지 못한다. 소녀가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소녀는 점점 움츠러든다. 키도 더 자라지 않고 학급에서 교우 관계도 활발하지 못하다. 그 소녀, '동춘'은 자신의 엄마와 친한 집 딸인 동급생 '나영'과 단짝처럼 붙어 다니지만, 친구도 많고 성적도 동춘보다 더 나은 데다 외모도 키 크고 훤칠한 나영이 왜 자기와 어울리는지 본인도 의문이다. 용기를 내 나영에게 이유를 묻지만 동춘 엄마의 후배인 자기 엄마가 동춘을 잘 돌보라 했다는 답을 들을 뿐이다. 이건 숫제 친구라기보단 보호자 격이다. 둘이 엄마들과 함께 방문한 병원에서 성장판을 측정한 후 상담에서도 나영은 170cm 충분히 넘길 거란 예상에 엄마와 함께 기뻐하지만, 동춘은 150cm도 아슬아슬하다는 전망에 엄마가 더 풀이 죽는다. 동춘은 오히려 무덤덤하지만. 엄마가 더 안절부절한다.
 
동춘의 엄마는 딸을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필사적이다. 극성을 부린다거나 딸에게 강압적으로 대하진 않지만 마치 영재개발 프로젝트 책임자다운 자세로 임하는 중이다. 엄마의 모습은 아이돌 지망생 매니저를 겸임한 헌신적인 엄마의 전형이다. 목표를 세우고 대안을 수립하고 계획을 관리한다. 그런 엄마의 연구 끝에 장차 교육과정 변화와 함께 미래 대입 전형을 대비해 페르시아 어(이란어/타지크어/다리어 등을 포괄) 학원에 딸을 등록시킨다(물론 나영도 함께다). 엄마는 딸에게 페르시아어를 배우면 좋다고 설득하지만, 정작 구체적 이유는 따로 해설해주지 않는다. 그저 엄마가 알아보고 도움이 된다고 하니 점잖게 통보하는데 가까운 모양새다.
 
미확인 생명체 '막걸리'와의 근접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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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스틸 이미지 ⓒ 판씨네마㈜

 
동춘은 엄마의 의향을 한 번도 거부한 적이 없다. 하지만 자식 잘되라는 충정으로 가득할 엄마의 계획이 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인지 이해할 순 없다. 그저 따라갈 뿐이다. 그렇게 묵묵히 공부에 매진한다. 수학여행이 다가왔다. 아이들은 일생에 유일한 순간을 어울려 나름대로 즐기지만 출발 때부터 속이 더부룩하던 동춘은 얌전히 숙소에서 안정을 취하던 참이다. 그런데 어떤 계시처럼 신호가 오고, 소화전 틈에서 막걸리병이 자신을 부르듯 발견된다. 그 순간 동춘의 머릿속에선 마치 천사와 악마처럼 '후안'과 '털북'이라는 존재들이 갑론을박을 펼친다. 일단 막걸리병을 챙기지만 소지품 검사에서 걸리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에, 아침햇살 빈 병에 몰래 막걸리를 채워놓는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뒤, 집에서 잠든 동춘은 막걸리병에서 부글부글 기포가 올라오다 마치 대화를 요청하듯 수신호가 들려오는 것을 포착한다. 자신이 왜 배우는지도 모르고 익혔던 모스 부호와 닮았다. 이것이 모종의 언어로 이뤄진 신호라는 걸 확신한 그는 온갖 언어로 번역을 시도하지만 도무지 해독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치지 않고 도전했던 그는 마침내 모스 부호 조합이 페르시아어라는 것을 깨닫는다. 처음으로 수신된 내용은 그 주의 로또 복권 4등 당첨 예상번호였다. 반신반의했지만 실제로 당첨번호가 맞았다. 편의점에서 로또를 구입하려는 과정에서 미성년자인 동춘은 거부를 당하지만 마침 편의점을 방문한 어떤 아저씨에게 번호를 알려준다. 어딘가 평범하지 않은 아저씨는 그냥 받을 수 없다며 당첨금의 절반을 나눠준다. 막걸리는 좀 더 큰 공간에 자신을 옮기고 다음에는 발효과정을 설명하며 동춘이 생수통에 실행하길 원한다. 졸지에 양조과정을 진행하게 된 동춘이다.
 
페르시아어 수업을 실용적으로 임하게 된 동춘은 학원에서 1등을 차지하고 경연대회에 도전하게 된다. 무대 공포증을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발표를 마친 동춘에게 부모는 대견해 하며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감격한다. 동춘 역시 배운 게 다 이유가 있었다며 만족스럽다. 하지만 엄마의 야심은 더 커져만 가고, 딸의 방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막걸리 통을 발견하면서 모녀 관계는 파국을 맞는다. 막걸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동춘은 부모의 뜻을 거슬러 독자적인 행동을 개시한다.
 
어른들이 자녀에게 무의식 중 저지르는 사회적 학대의 기록
 
 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스틸 이미지

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스틸 이미지 ⓒ 판씨네마㈜

 
월/수/금: 수학, 영어, 페르시아어
화/목: 논술, KMO(한국 수학 올림피아드), 미술
토/일: 창의과학, 한국사


진학지도 학원에서 상담을 진행하던 중, 관계자가 질문한 동춘의 기존 수강학원 질문에 엄마가 답한 내용이다. 페르시아어 강습 이전에는 태권도 도장에 다녔고, 사교육 외에도 사립초등학교에서 진행하는 별도의 수업이 추가될 테다. 아빠는 자녀교육을 엄마에게 믿고 맡겼던지라 정작 자신의 딸이 몇 개의 학원에 다니는지 전모를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엄마는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상담실장의 주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빽빽하게 11살 아이에게 공부를 주문해 왔는지 문득 깨닫고 만다. 그 순간 표정은 마치,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와도 같이 낭패한 얼굴이다.
 
영화는 동춘의 엄마가 왜 그리도 극성스럽게 딸을 관리·감독하려 하는지 후반부에 들어서 차례로 해설하기 시작한다. 엄마 '혜진'은 온갖 노력을 다해 자수성가했지만, 청춘을 바쳐가며 고생한 덕에 획득한 대기업 정규직 자리를 결혼 이후 출산과 함께 포기해야 했다. 그는 자신이 못 다 이룬 꿈을 동춘을 통해 구현하고 싶다. 남편이 전적으로 자신의 계획에 동의해왔기에 그는 동춘에게 해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하며 꿈을 이루고자 진력해왔다. 물론 동춘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 나이 때엔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는 간과한 상태다. 그런 혜진의 맹목적 노력과 헌신은 가족 내력과도 연결된다는 게 밝혀진다. 로또 번호를 전해받고 동춘과 모종의 거래를 치른 아저씨의 과거와도 이어지는 부분이다.
 
폐가 같은 집에서 '자연인'처럼 사회와 동떨어진 삶을 살던 '영진'은 알고 보니 혜진의 친오빠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남부럽지 않은 성공 가도를 달리다 어느 날 해탈하듯 직장과 가족을 버리고 해외로 사라졌다. 돌아온 뒤 그는 명상법을 전수하며 기인의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뒷바라지하느라 청춘을 바쳤을 노모가 치매에 걸려 병원에 있지만 소식을 끊고 사느라 그런 사정도 알지 못한다. 우연히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자연인 행세로 출연한 오빠를 본 혜진은 그를 찾아가지만, 히피 마냥 즐겁게 추종자들과 어울리는 영진을 보고 분노에 차 돌아선다. 그리고 뒤늦게 모친을 문안 온 오빠를 외면하고 만다. 물론 동춘은 영진이 외삼촌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다. 그러나 엄마 혜진이 왜 그렇게 자신의 조기교육과 사회적 성공에 매달리는지 관객은 일정한 배경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동춘을 향한 주변 어른들의 (동전 양면처럼 작용하는) 기대와 헌신을 논증하는 배경 해설이긴 하지만, 정작 동춘은 아직 그런 사연을 설명받지도, 온전히 이해할 단계도 아니다. 그저 착한 아이가 자신을 위하는 부모의 뜻을 마지못해 따라갈 뿐이다. 하기에 늘 동춘에겐 입 밖으로 당당하게 끄집어내지 못하는 거대한 물음표가 온존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무수한 질문을 받는 처지인데도 정작 본인 자신은 제대로 궁금증에 속시원한 답을 들을 수 없는 11살 아이의 답답함을 어른들은 모른다. 알 리가 없다.
 
아동성장영화의 왕도에서 과감히 이탈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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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스틸 이미지 ⓒ 판씨네마㈜

 
엄마 혜진은 진학상담 과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닫는다. 여기에서 통속적인 아동성장물이라면 과오를 뉘우친 부모와 상처를 입고 방황하던 자녀가 눈물로 화해하고, 사랑으로 봉합하는 결말로 직진할 테다. 모두가 기대하는 안전한 해피엔딩의 정석이다. 아직 부모와 사회의 과도한 요구에 절망한 자녀의 극단적 선택과 파국으로 치닫기에는 11살은 너무 어리다고 판단하는 지점도 반영되겠다.
 
하지만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는 여기에서부터 예상하지 못한 급진성으로 직진하기 시작한다. 청소년 잔혹사를 주인공의 상상 속 털복숭이 친구들, 그리고 막걸리와의 교감으로 중화시키는 판타지 이야기로 만족해야 하나 싶었건만, 영화의 문제제기는 풍자적이면서도 폭주의 속도로 급행하는 것이다. 부모가 상담실에서 당사자의 장래 계획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고 있던 순간, 동춘은 말 그대로 탈주를 감행한다. 그가 홀로 건물 밖을 나온 순간 눈 앞에는 현대 한국사회의 거대한 풍경화가 펼쳐진다. 학원이 집중된 거리에서 동춘이 방금 나온 건물 방향으로 수십 수백의 교복 입은 중고생들이 사교육을 받기 위해 일방향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동춘만이 그 거대한 군중을 역주행하고 있다. 그는 홀로 막걸리와의 약속장소로 향한다. 중고생 언니와 오빠들을 빠져나온 다음 동춘의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대학입시에 성공해 양복과 넥타이를 착용한 성공한 직장인들의 천태만상이다. 과로에 지치고 회식에 취하고 왁자지껄하지만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 획일화된 그림이 사방에 가득하다. 막걸리를 구출(?)하고, 그와의 통신이 재개되자 전혀 영문을 알 수 없지만 막걸리의 요청에 따라 생전 처음 먼 여행에 나선다. 그 여정의 끝을 예측한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종착지에서 막걸리는 마침내 동춘에게 11살 초등학생이 왜 자신과 만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모스부호와 미적분, 프로그램 코딩, 심지어 일상에서 듣지도 쓸 일도 거의 없을 페르시아어까지 배워야 했는지 납득하도록 해준다. 선생님도, 부모님도 누구 하나 그에게 들려준 적 없는 명쾌하고 논리적인 설명이다. 비로소 그의 표정은 환해지고 그토록 원했던 세상의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은 셈이다. 관객이 보기엔 너무나 황당한 설정과 상황이지만 주인공의 시선은 한 점 의문도 없어 보인다. 마침내 모든 계획의 단추가 맞춰진 것이다.
 
입시지옥을 표현한 영화들의 색다른 계승자 같은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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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스틸 이미지 ⓒ 판씨네마㈜

 
'입시지옥'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는 개탄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모든 길은 입시로 통한 지 오래다. 단 한 번도, 어떤 정권도 교육개혁을 외치지 않은 적 없지만 근본적인 개혁은 전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나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같은 청춘 하이틴 영화나 드라마에서조차 극한의 입시경쟁은 핵심적인 소재로 공감대를 얻고 있었다. '참교육'을 외치며 전교조가 결성되고 숱한 희생을 감수하며 교육현장을 바꾸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고괴담> 시리즈, 하다못해 조폭 코미디의 대표작이라 할 <두사부일체>에서도 교육 문제는 중요하게 작용했음에도 세상은 더 나빠지는 데 가까웠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가 그렇게 절규하며 사회의 그늘을 폭로했는데도 말이다.
 
이 영화 속에서 국가가 시민교육 방향을 제시하고 공공교육 질을 향상하고자 수립하는 교육과정 대계조차 이미 학부모들에겐 그저 입시과정 대응의 유불리로만 수용될 뿐이라는 사실은 대체 교육의 의미와 기능이 무엇인지 반문하게 만들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 목적을 상실한 채 내 자식 잘되길 기원하며 노력을 경주하는 부모들의 초상은 그들이 체험한 학력자본의 결정력 때문에 이해할 수 있지만, 모두가 그렇게 막다른 길에서 제한된 동아줄에 매달릴 때 궁극적으로 어떤 파국을 맞이할지 상상하면 아찔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막걸리가 알려줄거야>가 구사하는 코미디 기조 대신에 리얼리즘 설정으로 나아갔다면 그야말로 청소년 잔혹동화로 손색이 없을 법하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영화가 현실의 잔인함을 블랙코미디로 적절히 중화시키는 장기를 발휘한 데에서 그치지 않고, 대안적 미래를 상상하는 고전 SF의 아이디어와 구상을 과감하게 도입해 펼치는 판타지 요소다. 지능을 가지고 논리적 의사소통을 통해 동춘과 교감하는 막걸리의 정체성은 서구 고전 과학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던 외계에서 온 액체 혹은 에너지 형태를 띤 정신생명체와 닮은꼴이다. 어른들이라면 경악과 공포로 대처할 테지만, 마땅히 속내를 나눌 친구도 없던 동춘에겐 처음 만나는 낯선 친구인 셈이다. 비록 모스부호와 페르시아어 조합을 거쳐야만 텍스트 형태로 송수신이 가능함에도 부모나 친구들보다 더 누수 없이 소통할 수 있다는 특별한 상황은 그만큼 주인공이 처한 실질적 고립과 소외의 바로미터인 셈이다.
 
그런 초자연적 존재가 제시하는 방향은 또한 영재교육 과정에서 동춘이 거의 최초로 공개질문했던 생명의 탄생과 그 기원에 대한 물음과 닿는다. 이 또한 신기할 정도로 동춘이 왜 이해도 안되던 온갖 조기교육을 수행해야 했는지 자문자답에 척 들어맞는다. 모든 게 다 지적 설계가 있구나 하며 11살 주인공은 경탄하고, 막걸리가 제안하는 진화와 유토피아로의 진출을 의심할 필요도 없이 받아들이게 만든다. 어른들은 이미 전두엽이 발달해 불가능하지만 동춘과 또래 아이들은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설명은, 주입식 조기영재교육의 폐단을 비웃으며 쓸모없는 지식을 비워내고 나서 진정한 초인이 된, 라블레의 풍자소설 <가르강튀아 이야기> 속 거인 왕들의 설정을 충실히 따라간다.
 
익숙한 고전 SF 명작들을 소환하는 상상력의 향연
 

그와 더불어 초자연적 존재가 제시한 모험을 향한 도전의 주인공은 동춘만이 아니다. 이 부분에서 영화는 아서 클라크의 고전과학소설 <유년기의 끝>이나 <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의 익숙한 설정을 연상케 하는데, 그 진화의 방향은 니체의 인간정신 3단계 설, 즉 '낙타'처럼 영문도 모르고 짐을 짊어진 채 고생하다 '사자'의 자세로 이해되지 않는 관습과 규범에 자유의지로 저항하고, 그 궁극에는 기존의 구습을 초월하는 '어린아이'로 발전한다는 주장에 충실하다. 11살 주인공의 살짝 초현실적 동화라고만 생각했던 선입견이 눈 녹듯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동춘과 같이 기회를 얻은 이들의 존재는 중의적으로 해석 가능한 열린 결말로 나아간다.
 
해당 묘사는 마치 기에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결말을 보는 듯하다. 현실에선 비극으로 끝나지만, 주인공의 상상 속에선 그가 원했던 모든 게 구현되는 이중적인 가설이 허용되는 그런 마무리는 아주 새롭진 않지만 의외의 장소에서 발견해 더 반가운 보물의 기운으로 충만해 있다. 누군가에겐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를 떠올리게 할 잔혹동화의 색채로, 다른 누군가에겐 <나니아 연대기> 속에서 세상의 때가 묻으면 돌아가지 못하는 '나니아'의 존재감으로 기억될,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환상적인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는 그저 평범한 줄 알았는데 기이한 전복과 질주로 가득한 영화다. 극단적인 표현과 설정의 파괴력으로 관객을 놀래키는 한국독립영화는 드물지 않지만, 11살 아이를 주인공으로 이만큼 근본적으로 과격하게 해석 가능한, 그러면서도 교훈극으로 읽히기에도 무리가 없는 작업은 낯선 풍경이기에 더 반갑다. 연기라기보단 실제 '동춘'이 등장한 것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박나은 배우에게 시선을 집중하게 되고, 베테랑 연기자들의 든든한 지원이 초중반 늘어질 수 있는 진행에 힘을 부여해준다. 동춘에게 모든 면에서 대칭이 되는 존재인 '나영' 역 한온유 배우의 이미지도 인상적이다.
 
물론 아쉬운 구석도 제법 있다. 장르영화적 개성에 매력을 느낀 이들이라면, 특히 후반부에서 좀 더 상세한 배경 설정과 장치가 아쉬울 테다. 또한 전체관람가 설정 때문에 주인공의 가족들 과거나 현재 상황 및 심리묘사의 세밀한 수위가 모자란 점도 한계로 기능한다. 하지만 여전히 아동 성장물에 요구되는 전제를 감안하면 이해할 만한 부분이다. 무엇보다 뚝심 있게 이 기이한 작업을 완성한 김다민 감독이 궁금해지고, 덩달아 감독의 해설 기회가 기다려지는 영화다. 관객들은 과연 동춘의 모험과 결말을 어떻게 해석할까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포인트가 될 테다.
 
<작품정보>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FAQ
2024│한국│성장 드라마, SF, 코미디, 모험극
2024.02.28. 개봉│91분│전체관람가
감독 김다민
출연 박나은(동춘 역), 박효주(혜진 역), 김희원(영진 역), 한온유(이나영 역)
제작 ㈜안나푸르나필름
제공 (주)홈초이스
배급 판씨네마㈜
공동배급 ㈜홈초이스
 
2023 28회 부산국제영화제 오로라미디어상
막걸리가알려줄거야 김다민감독 박나은 박효주 김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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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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