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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재활사의 말 이야기'는 15년 넘게 언어재활사로 일하며 경험한 이야기들로, 언어치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닿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는 글입니다. [편집자말]
치료가 끝나고 나면 다음날 치료 시간에 올 때까지 병동에서 수행할 과제를 내준다. 어느 날 A 환자가 가져온 숙제 종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숙제 없었어면 좋겠다'
'숙제 없었어면 좋겠다'
'숙제 없었어면 좋겠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입원 환자들의 하루 중 언어치료 시간은 30분이 배정되는데, 이 시간은 환자들의 집중 능력 정도를 고려할 때는 긴 편이지만 언어적 자극을 준다는 점에서 볼 때는 조금 아쉬운 시간이다. 실어증은 발병 후 치료를 빨리, 많이 받을수록 더 긍정적인 예후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치료를 빠르게 시작해서 치료를 받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환자의 현재 언어능력에 맞는 구성으로 치료가 자주, 많이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말 그대로 실어증 언어치료에 대한 조기 중재가 빠르고 많을수록 이후 언어 사용 문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도 감소한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무작정 치료시간을 늘리는 것이 어렵고, 다양한 방법으로 언어치료를 접근해보고 싶어도 환자의 건강 상태나 집중정도 또는 타 치료시간과의 조율 등으로 인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를 조금이나마 감소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는 것이 병동 과제이다. 병동 과제는 담당 언어치료사가 환자의 현재 언어수준을 고려해서 난이도와 양 정도를 설정하고 제시하여 병동에서 과제를 해 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날 A씨가 받은 과제는 순서대로 이야기 말하기(sequencig story telling)로 어떤 상황을 설명한 네 가지 문장을 읽고 이 상황이 생겨난 전후 관계를 고려해서 일이 일어난 순서를 매겨보게 한다. 난이도로 보자면 중상 정도에 해당하는데 아무래도 과제가 혼자서 하기에 조금 버거웠나보다. 과제가 하기 싫었던 A씨는 종이 여백마다 '숙제 없었어면 좋겠다'를 써 왔다.
 
과제 한가득 숙제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깜지를 써 놓았다.
▲ 깜지1 과제 한가득 숙제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깜지를 써 놓았다.
ⓒ 황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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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깜지를 써 오라고 한 것도 아니건만... 문법도 틀린 걸 과제 종이 한가득 빽빽하게 써둔 걸 보고 있자니 헛웃음만 나온다. 그래, 이 정도는 웃고 넘어갈 수 있지. 이만큼이라도 의사 표현을 하는 게 어딘가.

어느 날은 이랬다. 돈 계산 과제였는데 아마도 계산하기가 무척 귀찮았던가 보다. 제시된 '동전 4개로 700원을 만들려면 어떤 동전이 필요합니까?'라는 질문의 대답으로 '500원, 100원, 50원, 50원'이라고 답을 잘 찾아 써 놓고 주변에는 이렇게 빽빽하게 써 두었다. 숙제하기 싫어서 써 둔 이 흔적들을 보니 더는 할 말이 없다.

'은행가면 된다'
'은행가면 된다'
'은행가면 된다'

 
숙제 하기 싫음을 종이에 빡빡하게 적어 왔다
▲ 깜지2 숙제 하기 싫음을 종이에 빡빡하게 적어 왔다
ⓒ 황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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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렇기는 하다. 돈을 일일이 계산하는 대신 은행에 가면 되기는 한데, 생활 속에서 본인도 계산할 수 있어야지 무턱대고 은행에만 가면 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음... 이건 아무리 봐도 나한테 반항하는 거 같다. 병동 과제는 환자분 좋으라고 내는 것인데...

그래도 숙제는 계속 된다

실어증 환자들의 언어치료는 학교에서 추구하는 지식 습득용 국어공부와는 다른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은 '일상생활에서 언어를 사용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적용되는 범위가 일상생활이다 보니 상당히 광범위한 치료적 접근이 요구된다. 따라서 어떻게 치료를 구성해서 어떤 방법으로 치료를 하는지에 따라 매우 다양한 치료 접근 방법이 생긴다.

가령, 환자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연습시킨다면, 이때의 요구를 말로, 몸짓으로, 글자로 쓰는 것 중 어느 것으로 표현할지 선택하게 하는 거다. 환자가 선택한 방법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더 쉽고 편리하게 많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연습시키는 것까지가 모두 치료적 접근이 된다.   

흔히들 언어치료라고 하면 '발음이 어눌하고 이상한 경우에 받는 치료'를 떠올리는데 실제 언어치료의 일부만 바라본 다소 제한적인 입장일 뿐이다. 물론 언어치료의 영역 중에 이런 부분도 있지만, 언어가 의사소통의 핵심요소라는 점에서 보면 다르다.

환자가 어떻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올바르게 전달할 수 있을지는 치료사가 항상 고민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환자의 의사소통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언어치료는 더욱 다방면으로 적극적인 치료적 중재를 하려고 한다. 환자가 표현이 잘 되지 않는 상태를 잘 할 수 있는 상태로의 조정하는 과정을 치료를 통해서 개선하는게 필요하다.

의사소통을 잘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생각을 주고받는 것으로 타인의 말을 알아듣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숨은 의미를 알아채고 유추하고 기억해야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표현하고 어떤 상황이 있을 때 이를 논리적-순서대로 전개할 수 있는 것 역시 필요한 요소들이다.

이 모두가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자 의사소통과 연관된 것들이다. 즉, 이런 것들은 모두 상위언어(meta linguistic)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말을 할 때 앞의 모든 행위에 대해 의식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언어능력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발음이 이상하고 어눌한 것은 말, 구어에 관한 것으로 표현언어 쪽의 문제이다. 대표적인 것이 '마비 말 장애(dysarthria)와 조음 장애(articulation disorder)'다. 

뇌 손상 후 말하기와 관련된 신체부위 근육의 움직임 범위나 힘이 약해져서 목소리가 작아지거나 또는 불규칙적으로 목소리의 크기가 커졌다가 작아지는 경우, 술 취한 사람같이 말할 때 입에 무언가를 물고 있는양 "얼..." 하며 발음이 어눌해진 경우가 마비 말 장애다. 조음장애는 입술 모양이나 혀의 위치, 소리내는 방법이 맞지 않아 정확한 발음이 안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표현언어 문제는 누구나 그 사람의 말을 듣기만 해도 "어? 저 사람 말을 이상하게 하네" 하고 생각하지만, 수용언어쪽(알아 듣고 이해하는)의 이상은 한 번 듣고 이상하다는 생각보다는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뭔가 '좀 이상한데, 엉뚱한 걸' 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숨겨져 있는 언어적 문제를 표면으로 이끌어내 언어 사용의 오류를 끄집어내고 오류를 수정하게 해줘야 한다. 이면에 포함되어 있는 다양한 언어능력까지 모두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진정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언어치료를 잘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의사표현에서 환자가 반항하고 버틴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을 알아챌 수 있는 의식이 생겼다는 걸 의미한다. 자신의 주변 상황이나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이해가 된다는 뜻이자,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이런 숙제를 가져오시는 것도 즐긴다. 여기에 조금 더 긍정 회로를 돌려보면 다 치료를 받은 덕분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반항도 표현의 한 가지야, 괜찮아~' 하고 혼자 맘을 다독여본다. 이 말인즉슨, 나는 내일 또 병동 과제를 내 줄 것이란 얘기다. 처음 치료 받으실 때보다 좋아지셨으니 더 복잡하고, 긴 걸로 많이 드릴까 봐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블로그에도 같이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실어증과제, #나만의실어증진전정도측정법, #개기는방법, #실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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