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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뜻하는 영단어 '유니버시티(university)'는 어떤 집단의 구성원 '전체' 또는 그들의 '모임'을 의미하는 라틴어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에서 유래한 말로 중세의 직능인들의 조합이나 길드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는 당시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차 있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교사와 학생의 공동체(universitas magistrorum et scholarium)'를 사용하면서 이후 대학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교사와 학생을 학술공동체의 주체로 동등하게 병기한 것처럼 이들의 배움은 해설이 중심이 된 강의보다 주제에 대한 질문과 토론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고양시키는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 중세 대학의 목적은 그들의 커리큘럼을 지칭하는 '자유인을 위한 학예(artes liberalis)'라는 표현처럼 구성원들로 하여금 분과학문의 전문적인 지식 습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승인하고 어떠한 위계에도 굴하지 않는 자유인으로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는 서구의 전통만은 아니다. 유가의 경전, <대학(大學)>은 배움의 목적으로 사상(事象)의 이치를 궁구하여 이를 바탕으로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도리를 파악하고 이를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는 방식을 설파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관용구처럼 배움이란 단순한 수신의 목적과 자신과 친밀한 내집단에 대한 관심을 넘어 모두 함께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한 전망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학교는 어떠한가? 자본이 야기한 과도한 경쟁으로 서로에 대한 혐오를 통해 서로를 적대하고 있는 현실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고 이로 인해 공생공락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에 대한 전망 또한 희미해진 지 오래다. 배움에 기반한 구성원들의 생활 공동체로서의 학교는 사라지고 살아남기 위한 기술을 가르치기 위한 학원만이 살아남고 있는 현실이다. 배움 또한 상생을 위한 기초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보다 조금이라도 앞서 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2022년부터 새롭게 시작된 '길동무 문학학교'의 취지는 이에 대한 저항에 있다. '길동무'는 우리가 같은 방향으로 함께 길을 걸어가는 수평적 존재라는 것을 지시한다. '문학'은 사람을 수치와 도표로 환산하지 않고 개별 존재의 내면을 언어를 매개로 응시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예술 양식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학교'는 단순히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실존과 배움을 서로에게 보충하는 상보성에 기반한 공동체를 의미한다.

요컨대 '길동무 문학학교'는 시중에 범람하는 일반적인 글쓰기 클리닉이 아니라 문학과 삶의 호환을 통해 사회의 변화에 실천적으로 개입하는 청년 작가를 양성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의 확장과 성숙을 위해, 그리고 고립되고 파편화된 삶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문화의 확산을 위한 우애와 연대의 정신에 기반한 생활공동체라는 이야기다.

자신을 얽매는 어떠한 권위에도 속박되지 않고 스스로를 등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 자본이 주도하는 출구 없는 미로에서 문학을 매개로 새로운 출구를 생성하고자 하는 사람 그리고 그 험난한 길을 함께 가고자 하는 길동무를 찾는 사람이라면 올해로 3기를 맞이하는 '길동무 문학학교'의 문을 두드려보는 것은 어떨까.

'사람은 가르치면서 배운다(homines dum docent discunt)'는 세네카의 격언처럼 어쩌면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를 가르치며 서로에게 배우는 '강학(講學)'이자 '학강(學講)'으로 반갑게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문학평론가. <청색종이> 편집주간

 
  

태그:#길동무문학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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